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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 김병철
  • 입력 2015.05.10 06:30
  • 수정 2015.05.10 06:34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김제동은 기다렸고 그의 시대가 왔다. 서바이벌 오디션과 힐링 장사의 틈바구니를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렸기 때문에 그의 경청과 공감의 가치가 더욱 빛이 난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아, 다음주에 뵐 수 있어서 좋네!” 지난 5월3일 방영된 제이티비시 <김제동의 톡투유-걱정 말아요 그대>(이하 <톡투유>)를 마무리하면서, 김제동은 정규편성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왜 아니겠는가. 2009년 파일럿 방영 당시 호평을 들었던 문화방송 <오 마이 텐트>는 “한국방송에서 하차시킨 진행자를 한 달도 안 되어 문화방송이 덥석 쓰는 건 문화방송의 자존심에 대한 훼손 아니냐”는 방송문화진흥회 인사들의 부적절한 언사와 함께 정규편성에 실패했다. 2010년 엠넷에서 파일럿 녹화를 했던 <김제동 쇼> 또한 석연찮은 방송 연기로 인해 방영도 해보지 못한 채 접어야 했다. 현장을 찾아준 관객들의 고민과 사연을 받고 김제동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며 대화를 나누는 형식 자체는 <오 마이 텐트>나 <김제동 쇼>나 <톡투유>나 다르지 않다. 그걸 고려한다면 김제동이 그가 가장 오랫동안 해왔고 잘할 수 있는 포맷을 안방극장에 제대로 선보이기까지, “다음주에 뵙겠습니다”라는 멘트를 하기까지 6년이란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 6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막말의 1인자였던 김구라는 그나마 말을 곱게 하는 축에 끼는 사람이 되었고, 무한경쟁을 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더 극한의 경쟁을 보여주는 티브이엔 <더 지니어스> 시리즈에 비하면 얌전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종합편성채널들이 등장하면서 당장 방송사들부터 극심한 경쟁체제에 돌입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육아 예능, 관찰 예능, 요리 예능까지, 뭐 하나 터졌다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유사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잔잔한 프로그램들은 신속히 문을 닫았다. 잠시 웰빙과 힐링의 열풍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잊어버리기엔 무한경쟁이라는 삶의 조건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독한 입담을 자랑하는 이들과 멘토로 호명되었던 이들이 차례로 명멸하는 동안, 김제동은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저 에스비에스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게스트의 말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어쩌면 그것이 최선이었으리라. 김제동은 웃음을 주기 위한 짓궂은 농담을 조심스러워하는 성미의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시대의 조류에 맞춘답시고 갑자기 독한 개그를 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어쩌다가 등산이나 난초 가꾸기를 즐기는 자신의 삶을 명예퇴직자의 삶에 비유한 농담이라도 하고 나면, 혹시 그 농담이 명예퇴직자들에게 결례가 되진 않을까 걱정된다고 정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의 코미디언 아닌가. 그렇다고 그가 누군가를 가르친다거나 제 의견이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종류의 재담가인 것도 아니다. 관객들을 내려다봐야 하는 무대 구조를 못내 불편해했던 김제동은 객석이 위에 위치한 소극장에서 <토크콘서트-노브레이크>를 시작했고, 공연을 하면서도 내내 “제가 해결책은 못 드립니다. 다만 고민을 들어드리고 제 생각은 이렇다고 말씀드리거나 잘 모르는 건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라고 전제조건을 걸곤 했다.

말하자면 시대의 대리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피로한 세상은 누군가 자신의 욕망을 대리해주거나 고통을 치유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김제동은 김구라처럼 정치나 경제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를 적나라하게 대리해주지도 못하고, 멘토 열풍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처럼 모든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것처럼 굴지도 않았다. 톱클래스 사회자였던 김제동이 안방극장에서 석연찮은 퇴장을 한 것은 방송 외적인 요소 탓이 컸지만, 어느 순간 방송에 복귀한 이후에도 보조 사회자나 특급 게스트 정도로 제 위치를 재조정해야 했던 건 그 탓이었다. 독한 개그를 치기엔 지나치게 양순하고, 멘토를 자처하기엔 과하게 신중하고 겸손한 남자. 물론 그라고 시대에 맞춰보려는 노력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다. 독한 개그가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을 때,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기 애매했던 김제동은 자신의 작은 눈과 얼굴을, 노총각이라는 특징을, 한산해진 스케줄을 고백하며 자폭했다. 그러나 듣기 좋은 노래도 하루 이틀인데, 자기 비하적인 개그의 수명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30대만 해도 비교적 무리 없던 노총각 타령은 40대가 넘어가며 더는 농담처럼 들리기보단 노총각 히스테리에 가까워졌고, 자신의 외모를 소재로 던지는 농담 또한 종종 도가 지나쳐 자격지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공격적인 코미디는 그에게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쯤 해서 반전이 일어난다. 진중한 토크쇼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듯했던 순간, 다른 종편 채널들과의 차별화를 꾀하던 제이티비시가 론칭한 일련의 토크쇼들이 다시금 ‘길게 이야기하고 오래 들어주는’ 토크쇼의 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썰전>, 기존에 지상파에서 다루지 못했던 성 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녀사냥>, 국내 거주 중인 외국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사회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비정상회담>까지. 그간 토크쇼가 다루지 못했던 영역을 건드린 제작진의 선택도 주효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사가 서서히 ‘공감’하고 ‘경청’하는 쇼로 이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경쟁과 노골적인 욕망의 전시로 인한 삶의 피로를 들어줄 사람이 간절한 시대, 하지만 멘토들의 공허한 가르침으론 그걸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분명해진 시대엔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간절히 필요하니까. 사람들은 “아이도 갖고 싶고 커리어우먼으로도 성공하고 싶은 내가 비정상이냐”라거나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두려워 새학기를 시작하는 게 겁이 나는 내가 이상한 거냐” 따위의 소소한 고민에 공감하고 열띤 토론을 하는 청년들을 보며 환호했다. 잘 들어주고 신중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각광받기 시작하며 덩달아 “뇌가 섹시하다”는 기괴한 표현도 인기를 끌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행운이 오진 않지만, 때론 시대의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색깔을 꾸준히 유지하고 다듬어온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곤 한다. 마치 리얼버라이어티 전성기에 잠시 주춤했던 신동엽이 화려하게 부활한 것처럼, 자신의 색깔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온 김제동 또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종류의 쇼를 티브이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톡투유>에서 김제동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답을 주거나 마이크를 독점하지 않는다. 관객의 사연을 받아서 듣고, 그에 대해 조심스레 자기 의견을 들려주고, 패널로 참여한 최진기 강사와 정재승 교수, 요조에게 공을 패스한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이게 정답은 아니”라는 점을,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 모두 고민을 푸는 각자만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다른 프로그램에선 노총각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는 <톡투유>에선 웃겨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외롭고 싶진 않은데 혼자 있고 싶다”는 속내를 고백하기도 하고, 스케치북으로 얼굴을 가린 방청객에게 “방송이 끝날 때쯤엔 함께 얼굴을 마주보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그걸 강요하는 것 또한 폭력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요조의 말에 금방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한다. 6년 동안 <토크콘서트-노브레이크>에서 꾸준히 갈고닦아온 소통의 기술을, 김제동은 무대 위에서 유감없이 쏟아낸다.

5년 전 엠넷 <김제동 쇼>의 파일럿 녹화가 있었을 무렵, 제작진이 인터넷에 공개한 촬영 실황을 보며 나는 기대감에 부푼 글을 썼다. 아마도 방청석과 무대 사이의 간극이 가장 좁은 토크쇼가 될 거라고. 기대가 큰 만큼 방영이 결렬되었을 때의 실망도 컸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오히려 김제동에겐 그 시간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온갖 서바이벌 오디션 열풍을 거치고, 선지자를 자처하며 힐링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 혹하고, 그 모든 게 사실 답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다시금 경청과 공감의 가치에 주목하기까지의 시간 말이다. 조금만 더 일찍 나왔더라면 “실력 있는 이들이 인정받는 공정한 경쟁”이나 “젊은이들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멘토들”에게 치여 제값을 평가받지 못했을 테니까. 아주 먼 길을 돌아서, 김제동과 <톡투유>는 그렇게 기묘한 방식으로 제시간에 우리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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