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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동시, 그 아이의 비웃음

아이가 잔인한 동시를 썼다. 아이의 시를 처음 봤을 때는 나도 아이가 너무 각박한 세상에서 힘들게 자라서 저렇게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다른 시에서 비쳐지는 차갑고 번득이는 시선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평범한 현실에 잔인한 표현들을 덧칠해 놓고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자 너는 무엇을 볼래? 보았다면 이제 어떻게 할래?' 아이는 자기가 곧 마주하게 될 '어른들의 세상'을 비웃는 것 같았다. 아이는 기계처럼 학원에 끌려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처참하게 그린 게 아니라 당신 어른들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며 도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백승호
  • 입력 2015.05.09 06:42
  • 수정 2016.05.09 14:12
ⓒGetty Images

스물 중반에 논술학원에서 일했다. 중학생 남짓 아이들에게 독후감을 내주고 첨삭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수십 명의 학생들이 제출한 독후감을 읽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맞춤법이 틀려서도 아니고 비문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독후감에 녹여낸 아이들의 세계 자체가 지옥 같았다.

"필리어스 포그는 좋겠다. 돈이 많아서."

"제제는 불쌍하다. 가난한 집에서 얼마나 힘들까?"

어쩌다 한둘이 돈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필리어스 포그의 80일간의 모험에서 아이들 대부분은 그의 2만파운드와 그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다니는 삶을 부러워했다. 독후감은 필리어스 포그의 2만 파운드로 시작해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동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서 그들이 제제를 부러워하는 건 딱 하나였다. 제제는 숙제도 없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잔소리도 없었다. 더 슬프고 웃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제제가 가난하단 이유로 동정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집에서 어떤 말을 듣고 있을지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아이야 너의 삶은 네 손에 얼마만큼의 돈이 쥐어질지에 따라 바뀐단다. 네 손에 돈을 쥐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한단다. 그러니까 일단 내 말 들어라. 돈이 없는 사람의 삶은 지옥이란다.

서슴없이 저런 말을 내뱉는 부모도 분명 있겠지만 보통의 부모는 아이에게 저런 말을 직접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다는 아니다. 그 부모는 아이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겪는 돈의 지옥이 얼마나 생생한지 알려주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기에 아이들의 독후감은 너무 생생하고 솔직하게 '어른들의 세상'을 반영했다.

게임탓을 해 보고 음란물을 탓해 죄책감을 씻어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 아이들의 어른들. 그 어른들의 아이들은 서로에게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그게 지옥 같았다.

아이가 잔인한 동시를 썼다. 여기저기서 그 아이의 시와 끔찍한 일러스트를 공유했다. 어른들은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아이를 직접 비난하기에는 면이 서지 않는지 그 부모를 비난한다. 혹은 우리 어른들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사회 전반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슨 문제인지 꼬집지는 못한다. 그냥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의 다른 시까지 찬찬히 읽으면 새로운 모습이 보인다.

아이의 시를 처음 봤을 때는 나도 아이가 너무 각박한 세상에서 힘들게 자라서 저렇게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다른 시에서 비쳐지는 차갑고 번득이는 시선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평범한 현실에 잔인한 표현들을 덧칠해 놓고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자 너는 무엇을 볼래? 보았다면 이제 어떻게 할래?

아이는 자기가 곧 마주하게 될 '어른들의 세상'을 비웃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고작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냐'며 혀를 끌끌차거나 '요새 아이들' 운운하며 호들갑을 떠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이는 기계처럼 학원에 끌려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처참하게 그린 게 아니라 당신 어른들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며 도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의 시를 보자마자 스물 중반에 보았던 독후감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답답해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때보다 나아진 거라곤 그 아이들과 내가 어떠한 지옥에 처해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아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체념한 지 오래였다. 나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 어른의 책임'이라며 죄책감을 덜고 있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창피하다. 아이의 비웃음이 여기까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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