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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째 의식 없는 이건희 회장

  • 김병철
  • 입력 2015.05.07 16:04
  • 수정 2015.05.07 16:05
ⓒ한겨레

2010년 1월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 시이에스(CES)에 참석한 삼성 이건희 회장 일가. 왼쪽부터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 리움 관장, 이 회장, 이서현 제일기획 사장, 최지성 부회장(미래전략실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한겨레 자료사진

이건희(73)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해 5월10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지 1년이 됐다. 이건희 회장은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20층 VIP실에 입원 중이다. 가족을 제외하곤 이 회장의 병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삼성그룹은 이 회장의 병세가 계속 회복 중이라고만 얘기한다.

한국 재벌의 상징 같은 존재였던 이 회장이 갑자기 쓰러진 지 1년, 삼성그룹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년에 걸쳐 진행됐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회사 인수·합병(M&A)과 상장, 매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쓰러지기 전 시나리오가 없었다면

삼성은 지난해 7월 옛 삼성에버랜드의 사업 부문을 재편한 뒤 제일모직으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9월에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을 결정했다. 11월에는 삼성SDS를 상장한 데 이어, 화학·방산 부문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12월에는 제일모직을 상장했다.

삼성SDS와 제일모직의 상장은 삼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성SDS와 제일모직은 그동안 삼성그룹의 시스템 관리와 단체급식·건물관리 등을 도맡는 등 이른바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급격히 성장한 기업으로 꼽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진 이들 기업의 주식가치는 계속 커졌다. 탈법·편법 논란 속에 총수 아들의 경영권 승계 자금을 마련한다는 사회적 눈초리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두 기업이 지난해 말 무리 없이 주식시장 상장에 성공하면서, 삼성은 표면적으로는 부정적인 사회 여론을 정면 돌파한 셈이 됐다. 이 부회장은 또 지난해 10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지분 0.1%씩 매수하는 것을 금융위원회에서 승인받기도 했다. 그동안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역할이 치우쳐 있던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의 또 다른 축인 금융 부문에도 깃발을 꽂은 것이다.

삼성을 오랫동안 지켜본 한 경제지 기자는 “삼성이 일사천리로 사업 재편을 진행했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기 전에 시나리오가 완성돼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사업 재편이 마무리되면서 이제 경영권 승계로 단계가 넘어가고 있다”고 평했다.

삼성그룹의 사업 재편 과정이 착착 진행된 것과 달리 삼성은 ‘이건희 이후’ 전략 방향에 대한 고민도 안고 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증권사 연구원은 “요즘은 이재용 부회장 체제로 가는 과도기다. 과도기이다보니 투자 결정이 과감히 내려지지 않고,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재벌 개혁론자로 꾸준히 삼성을 관찰해온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지난 1년간 삼성을 보며 느낀 것은 삼성이 매우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스마트폰 갤럭시S5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삼성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주력 사업 분야를 개척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고, 내부에서 (새 사업을) 개발하는 성장 방식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M&A도 필요한 시점인데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의식 없어도 보고는 충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세 번째)이 지난 3월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중신그룹 창전밍 회장(두 번째)을 만나 금융사업 협력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를 담당하고 그룹 회장 직책도 없어 금융사업을 협의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입길에 올랐다. 삼성그룹 제공

삼성은 올해 새 스마트폰 갤럭시S6를 내놓으며 세계 시장 1위 업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주가는 갤럭시S5의 판매 부진 이후 지난해 10월 107만8천원까지 폭락했다가, 1년 전과 비슷한 수준인 141만원(4월30일 종가 기준)까지 회복한 상태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경쟁력이 회복됐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올 1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실적은 매출(47조1179억원)의 경우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12.2% 감소했다. 영업이익(5조9794억원) 가운데는 스마트폰 대신 옛 주력상품이던 반도체(2조9300억원)가 큰 몫을 차지했다.

애플이 아이폰6를 내놓으며 선풍적 인기를 다시 모았고, 스마트폰이 많이 팔리는 중국에선 중국 업체 샤오미 등의 추격이 거세다. 삼성 스마트폰은 하드웨어의 기능이 훌륭한 것이 장점이어서, 이른바 ‘스티브 잡스 팬’이 많은 애플과 달리 기술 수준을 쫓아온 업체에 쉽게 추격을 허용할 수 있다.

세계 시장에 끊임없는 격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삼성서울병원 20층은 조용하다.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은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 회장의 병실을 찾고 있다. 생명유지장치 없이 자가호흡을 하고 있는 이 회장의 건강도 확인하고 그룹의 일도 간단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회장을 향한 보고는 충실히 한다는 것이다.

최 실장이 매일 이 회장을 찾는 것에서 보듯 삼성은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의 영향력이 큰 회사다. 삼성의 미래전략실은 계열사 간 사업 조정과 대규모 투자 방향을 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래전략실의 계획은 이건희 회장의 승인을 통해 확정되고, 그 책임은 그룹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 지는 형식이었다. 경영학계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한국 재벌이 발빠른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삼성반도체가 이른바 ‘치킨게임’(대규모 투자 경쟁)을 통해 일본·대만의 경쟁 업체를 제친 것도 이런 일사불란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총수가 없으니 ‘밀고 나갈’ 책임을 누가 질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를 대신해 주요 행사에 참석하고 다른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만나는 등 활동 폭을 넓히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그룹 총수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지난해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 땅 ‘한국전력 부지’ 매각 입찰에서 삼성이 밀린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현대자동차그룹은 예상을 뛰어넘는 10조원가량의 금액을 써내 한전 부지를 따냈다. 삼성 역시 서울 서초동 사옥을 지을 때에 견줘 회사 규모가 3배 가까이 성장해 새로 입주할 건물이 필요했지만 과감한 베팅을 하지 않았다.

천안사업장 조은주씨 지난 2월 세상 떠나

삼성테크윈 노조원 1300여 명이 지난 4월14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연구개발센터 앞에 모여 한화그룹으로의 매각을 반대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삼성테크윈 노조 제공

또 삼성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인 지난해 5월14일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진작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점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사과했지만 구체적 해결 방안은 해를 넘긴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수년을 끌던 회사와 피해자 쪽의 협상은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로 넘어갔고,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이 달라진 게 없다고 이야기한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가 사과했을 때만 해도 삼성이 바뀌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후 협상 과정에서 획기적으로 바뀌었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협상 과정에서) 삼성은 산재 승인과 보상에 대해 미흡한 안을 내놓았다.” 그사이 삼성전자 천안사업장에서 일하다 혈액암 진단을 받은 조은주씨가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이종란 노무사는 “이재용 부회장 체제로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삼성의 기업문화와 조직문화가 (백혈병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본다. 삼성 내에 노조가 만들어지고 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올 때 삼성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지난 1년간) 사업 조정 과정에서 보듯이 그룹의 의사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백혈병 문제도 해결해보려고 진정성 있게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 내부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도 감지된다. 지난해 삼성전자서비스노조는 삼성전자 협력사와 단체협약을 맺었다.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40여 일간 파업을 한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비록 협력사와 맺은 단협이긴 하지만 ‘삼성’ 이름이 붙은 노조가 인정을 받음으로써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에 균열이 생긴 셈이다.

삼성그룹의 사업 재편 과정에서 한화그룹에 매각한 삼성테크윈·삼성토탈 등 계열사에도 노조가 새로 등장했다. 이들 노조는 “이재용 부회장이 추진하는 사업 조정은 인정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삼성 본관 앞에서 매각 반대 집회를 연 이들은 다른 삼성 계열사 직원들을 향해 “당신도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며 매각 반대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동안 국내 1위(자산 기준 대기업집단 순위) 삼성이라는 사회적 지명도와 안정된 일자리, 높은 임금에 취해 있던 노동자들도 그룹 최상위층의 판단에 따라 한순간에 처지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의 충성도가 떨어지고 있는 낌새도 보인다. 삼성웰스토리 노동자 668명은 지난 2월 제일모직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삼성웰스토리 직원인 김영수(가명)씨는 “내가 누구를 위해 일했나 싶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건희 모델과 팀 쿡 모델

삼성그룹 최근 2년간의 움직임

이들의 이야기는 2013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회는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정거래위원회 자료를 보면, 2013년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은 삼성그룹 내 60개 계열사와 거래하고 있었고, 내부거래 비중은 전체 매출액의 43.1%에 이르렀다. 제일모직의 대주주는 이재용 부회장 등 총수 일가였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은 이재용 부회장(주식 지분 23.23%)→제일모직(19.34%)→삼성생명(7.54%)→삼성전자로 이어진다.

관련 법 제정 이후 제일모직의 급식부문을 분사해 삼성웰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증권가에선 일감 몰아주기 때문에 제일모직으로 쏠리는 눈길을 피하려고 삼성그룹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 제일모직 급식부문이 삼성그룹을 통해 버는 매출이 상당해 이를 분산시킬 의도였다는 것이다. 삼성웰스토리 노동자들은 “굳이 삼성에버랜드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회사가 시키면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이들은 2013년 11월 자회사로 분리된 뒤 2014년 12월 진행된 제일모직 상장 때 우리사주 주식을 받을 기회도 얻지 못했다.

상장 뒤 이재용 부회장이 보유한 제일모직 주식의 가치는 4조9천여억원(4월30일 종가 기준)에 이른다. 이 부회장은 제일모직에서 일하지 않았지만 10여 년 전 48억3100만원을 투자한 게 1천 배 넘게 ‘뻥튀기’돼 돌아왔다. 주식은 없지만 제일모직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회사 성장에 기여했다가 자회사 직원이 된 김씨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김씨는 “회사에 배신감이 크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가 숨진 뒤 2011년 애플의 새 사령탑을 맡은 팀 쿡은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에 시달렸다. 혁신의 애플을 만든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팀 쿡은 스티브 잡스가 부정했던 ‘대화면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었고, 이전 경영자와는 다른 탈권위주의적 모습으로 주위의 우려를 걷어냈다. 애플은 여전히 사상 최고의 이익을 내는 회사다.

이건희 회장 시절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은 ‘빠른 추격·황제 리더십·무노조’ 경영으로 대표되는 회사였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의 뒤를 따를지 아니면 팀 쿡의 뒤를 따를지에 따라, 3세 경영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에 대한 논란도 재점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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