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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회에 가입하며

13살 어느 날 세상과의 시각적 소통이 끊어진 날 이후로 내 머릿속의 영상은 많은 부분 고정되어 있다. 디지털 앨범을 꺼내보듯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나 그때의 모습으로 건강하게 웃고 계신다. 얼마 전 상조회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전문상담원의 확인전화를 받으면서 맘이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관은 어떤 것으로 하고 상복은 어떻고 염은 어떻게 하고... 장례절차에 대해서 자세히도 설명해주는 친절한 목소리는 의도와는 반대로 나를 너무도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너무도 자세한 설명 속 장례식장에는 아직 충분히 젊으신 나의 부모님이 누우시려 하고 있었다.

  • 안승준
  • 입력 2015.05.08 10:51
  • 수정 2016.05.08 14:12
ⓒ한겨레

13살 어느 날 세상과의 시각적 소통이 끊어진 날 이후로 내 머릿속의 영상은 많은 부분 고정되어 있다.

거울 속 나의 얼굴도 매일 지나는 도시의 풍경들도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옷차림도 나는 아직 90년대 초를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전해 듣는 세상의 모습들은 많이도 화려해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은데 내 상상 속의 그림들은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꿈쩍도 않고 응답하라 1993의 필름들만을 재생해 준다.

난 가끔 갑자기 눈이 보인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는데 때때로는 영화 속 부시맨처럼 매순간 신기해 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기도 한다.

나만의 영상 속 장면들은 흐릿해지기도 하고 조금씩은 왜곡되어가기도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방금 찍은 사진처럼 뚜렷하게 보이는 것 중 하나는 가족들의 얼굴이다.

디지털 앨범을 꺼내보듯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나 그때의 모습으로 건강하게 웃고 계신다.

난 어머니 아버지의 외모에 대해 잘 물어보지 않는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로 인해 더 빨리 변해 있을 모습들을 알게 되는 것이 많이도 두렵고 무섭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갑자기 눈이 보이게 된다면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것도 두 분의 모습이겠지만 가장 두려운 것도 그 장면이다.

어느새 60대가 되었다는 아버지의 작은 읊조림도 어머니 병들기 전에 얼른 장가가라는 어머니의 푸념도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나의 고정되어버린 영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상조회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입을 하게 되었다.

조건도 괜찮고 믿을 만한 곳이기도 하고 주변 동료들도 많이들 가입하기에 특별한 고민 없이 권유를 승낙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전문상담원의 확인전화를 받으면서 맘이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관은 어떤 것으로 하고 상복은 어떻고 염은 어떻게 하고... 장례절차에 대해서 자세히도 설명해주는 친절한 목소리는 의도와는 반대로 나를 너무도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너무도 자세한 설명 속 장례식장에는 아직 충분히 젊으신 나의 부모님이 누우시려 하고 있었다.

일찍 준비해 두면 더 오래 사신다는 주변의 격려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일을 멈추고 곰곰이 부모님의 연세와 10년의 불입기간이 끝났을 때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나와 어떤 기다림도 예고도 없이 이별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취를 하고 외형적으로는 독립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모님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만큼 많은 부분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나의 삶을 살고 계시고 있는 것이다.

대가 없는 사랑과 한량없는 은혜라는 말들을 흔하게도 내뱉으면서 의례적 작은 선물들로 감사를 대신하려 했던 내가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이런 글을 오늘 쓴다 해도 그 분들이 가실날을 나에게 미리 알려준다 해도 내가 크게 변하지는 못할 것이고 부모님 또한 내게 뭔가를 크게 바라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몰랐던 것,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은 해봐야 한다.

내 마음 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까만머리 주름 없는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기다려 주시지는 못한다.

일 년이면 수차례 경험하는 누군가의 장례식들처럼 나도 언젠가 원치 않는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쁠 수도 없고 담담할 수도 없겠지만 어떻게든 준비는 해야 한다.

내겐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가시는 길 끝까지 편히 모셔드립니다."라는 광고문구가 마음을 더욱 서글프게 만든다.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천천히 가실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로 바꾸면 어떨까?

조금 더 건강할 수 있는 정보를 알려주는 상조회, 부모님이 원하시는 효도가 무엇인지 상담해 주는 상조회,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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