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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 10주년 기념 인터뷰] 다음 10년의 인물,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 김병철
  • 입력 2015.05.06 10:38
  • 수정 2015.05.20 13:03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창간 1주년을 맞이해 2015년 3대 기획 시리즈를 추진합니다. 국내외로 첨예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 30만을 넘긴 다문화 가정, 불법과 합법을 통틀어 170만 명에 육박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3대 기획 기사 보기

1. [허핑턴포스트코리아 1주년 독점 인터뷰] 탈북자 신동혁 "죽음의 수용소, 14호 탈출은 거짓이 아니다"

3.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인터뷰] 탈북자 학교이자 다문화 학교, 장대현학교의 학생들

허핑턴포스트는 창립 10주년을 맞이해 전 13개 에디션을 통해 다음 10년을 상징하게 될 인물을 만났습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선택은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입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누가 한국 사람일까?

1. 부모는 한국인이지만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국어를 못하며 한국 국적을 포기한 재미교포.

2. 부모는 캐나다인이지만 한국에 심취해 귀화했다. 한국어가 유창하고 한국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3.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부 장관. 1973년 서울에서 김종숙으로 태어나 생후 6개월 프랑스로 입앙됐다. 한국어를 못하며 40년 후인 2013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4.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1977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자스민 바쿠어나이 이 빌라누에바'로 태어나 1995년 남편 이동호씨와 결혼, 1998년 귀화했다. 필리핀에서 19년, 한국에서 20년 살았다.

국어사전은 한국인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한국 국적을 가졌거나 한민족의 혈통과 정신을 가진 사람'

1은 한국 국적은 없으나 혈통은 가졌고, 2는 그 반대다. 이민과 국제결혼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한국인, 한국사람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시기가 우리 앞에 당도했다. 급증하는 농촌 결혼과 이민자 통계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의 수는 당연히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증가하는 다문화 가정은 한국을 다문화 사회로 만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뒤따를 편견과 사회적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그 모든 걸 앞서 경험하고 있는 인물이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이다. 그는 지난 수년 동안 겪은 논란을 오해라고 생각할까?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할까? 혹은 차별이라고 받아들일까. 허핑턴포스트 코리아는 지난 4월 30일 국회를 방문해 이 의원을 만났다. 그는 많이 웃었고, 많이 한숨을 쉬었고, 그럼에도 그의 모든 말은 선명했다.

대담 = 김병철 에디터, 김도훈 편집장

사진 = 레스(less)

1. 완득이 엄마

- 영화 '완득이' 때 하셨던 인터뷰들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이렇게 정치인으로 인터뷰를 하게 될 거란 생각은 서로 하지 못했죠.

= 그때가 좋았어요.(웃음) 한국에서 사랑만 받으며 자라다가, 국회에 왔더니 이렇게 욕 먹을지 몰랐어요. 저도 하도 힘들어서 아이들에겐 기사 보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도 최근 연달아 나온 (제 인터뷰)기사를 읽어보니 "내가 그래도 아직 긍정적이구나"라는 생각을 들어요. 역시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제가 시집간 게 18살 때에요. 운 좋게 좋은 식구를 만났고요.

①이자스민 “이렇게 욕먹을 줄 몰랐다… 댓글 다 읽는다”(미디어오늘)

②“악성 댓글도 대한민국에 제 등을 돌리게 하진 못해요”(한겨레21)

-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된 거에요?

=남편 말로는 한국에 인사만 하러 가는 거였어요. 양가 다 (결혼을)반대했거든요. 필리핀 결혼식에 시집에서 아무도 안 왔어요. 친정 부모님은 너가 왜 환영도 못 받냐고 하셨고요. 제가 순진한 거죠. "결혼은 이 사람이랑 하는 거지, 시집 식구랑 하는 거냐" 근데 한국에 와보니 시집 식구랑 하는 거더라고요.(웃음) 원래는 한국에서 살 생각은 없었어요.

- 그런데 어쩌다가 정착하게 된 거죠?

= 3개월 후 필리핀으로 돌아갔는데 임신한 걸 알게 됐어요. 남편은 무조건 한국에서 낳아야 한다고 했고, 건너온 후로 눌러 앉게 된 거죠. 전 필리핀에 돌아가서 학업을 마치려고 했는데, 남편도 시부모님도 "아이는 누가 돌봐주냐?"고 하셨어요. 나중에 안 이야긴데, 첫 손자를 데리고 안 돌아올까 봐 걱정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장손이에요.

- (반대했던)시부모님의 태도가 달라진 계기가 있어요?

= 결혼했는데 그냥 받아들인 거죠. 한국에 오니까 "잘 살아라"고 하셨어요.

-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같이 살고 있어요. 처음엔 시부모님, 시할머니, 시동생까지 6명이 같이 살았어요. 저희가 아이 둘 낳고, 시동생이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아서 식구가 11명까지 늘어났죠. 2010년 남편이 떠나고 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9명이에요.

-가족이 많지만 정치인으로 살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지도 궁금하네요.

=모든 엄마들이 하는 것과 똑같아요. 일어나면 아이들부터 깨워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는데, 눈 뜨자마자 애들 방부터 가요. 위대한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던데, 저는 엄마니까 어쩔 수 없어요.(웃음)

- 그 아이들이 이제 벌써 대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에요. 중,고등학교 때는 완득이처럼 사춘기를 극복하면 되지만, 군대 가고 취업하면 다른 장벽에 부딪치게 될 것 같아요.

= 작년 국제이주기구(IOM) 총회에서 아빠는 일본 사람, 엄마는 필리핀 사람인 28살 친구를 만났어요. 일본에서 산 이 친구는 어릴 때는 몰랐는데, 20대 초중반이 되니까 '어릴 적 그게 차별이었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고 했어요. 아이들에게 "넌 언제 차별 받았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으면 '없다'고 해요. 나중에 알게 되는 거죠. 대한민국의 다문화 가정이라는 게 20년 정도밖에 안됐잖아요. 제가 초창기 이주민인데 5, 10년 후에 이 세대 아이들이 자신들이 받았던 차별을 말하게 될 거에요. 공익광고를 보면 다문화 가족은 무조건 까만 아이가 '왕따'나 놀림을 당하는 거로 나와요. 그러면 착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다 같이 웃으면서 끝나죠. 왜 꼭 그렇게 보여주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참 안타까워요.

- 차별 받지 않고 취직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에는 성소수자 쿼터 같은 게 있어요.

= 우리 사회가 가진 큰 질문 중 하나에요. 다문화 아이들은 똑같이 바라봐야 하는지, 아니면 특별히 여겨야 할지. 딜레마가 있어요. 우리 딸 이야기인데요. 학교에서 출석을 부르잖아요. 다들 "네, 네"라고 답하다가 제 아이가 "네"라고 하니까, 선생님이 갑자기 멈춰서 "지수(가명)네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니깐 잘 지내"라고 말했다고 해요. 거기까지는 괜찮아요. 나중에 애가 "선생님한테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해 달라"고 해요. (수업 중에도)"지수야 뭐 해줄까" 계속 자기한테만 더 물어본다는 거죠. 저는 이걸 '잘못된 배려'라고 표현해요. (한국에서 태어난)제 딸 같은 아이에겐 똑같이 대하는 게 더 좋아요.

우리 사회에는 두 종류의 다문화 아이들이 있어요.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외국에서 태어나 중도입국한 아이들. 우리 제도는 하나로 묶어서 지원해요. 초창기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무조건 방과 후 학교를 시켰어요. 모아서 경복궁도 보내고 하는데,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 왜 굳이 경복궁에 두세 번 더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맞춤형 복지처럼 맞춤형으로 해야 하는데 연구도 안 되어 있고, 하라니까 그냥 묶어서 다 하는 거에요. 제도적 배려는 역차별 논란이 있어요. "다문화 가정이라고 어린이집에 먼저 들어갔다더라." 이런 식이죠. 정부기관에서는 3%를 장애인으로 의무 고용하게 되어 있는데, (다문화 제도가) 장애인 운동을 따라가는 게 맞는 건지, 이게 어려워요.

2. 첫 이주민 국회의원

이자스민 의원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15번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그 전엔 서울시 외국인공무원 1호인 외국인생활지원과 주무관으로 일했고, 한국어가 유창해 KBS1 '러브인아시아'와 EBS 한국어 방송 등에 출연했다.

- 국회에 들어와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 처음에 다른 의원님들이 "한국말 잘 하네"라고 했어요. 아무리 이주민이라도 국회의원을 시켰다면 (당연히) 한국어를 잘 할 거 아니에요. "내가 이주여성이라서 이런 얘기가 나오는구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야겠다. 이주민의 대변인 역할로 국회에 왔으니 제대로 해야겠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 첫 이주민 국회의원으로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요?

= 처음이라는 게 가장 어려워요. 새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물어볼 사람도, 따라 할 것도 없잖아요. 처음이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해야죠. 두 번째, 세 번째 이주민 의원이 나와야 하잖아요. 인터넷 댓글 중에 이런 것도 있어요. "한국 국회의원인데 왜 외국인에 대한 정책을 하는가?" 한국인을 위한 정책을 하는 의원은 299명이나 있어요. 전 한국인이 된 외국 출신 사람들을 대변하라고 국회의원을 시킨 거잖아요. 지역구가 아닌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취지도 그렇고요. 비례대표의 취지가 잘 이해가 안된 것 같아요.

- 새누리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제안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여당이 이주민을 주요 투표권자로 인정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 아무래도 그렇게 볼 수는 있어요. 사실 투표권을 가진 이주민은 15만~17만명밖에 안 되지만, 시부모님이 있잖아요. 19대 총선 때 약세인 지방을 중심으로 엄청 다녔는데, 저를 보고 "엄마, 1번, 1번 새누리당 찍어" 이런 이주 여성들이 많았어요. 그렇게 다 연결이 돼요. 저랑 이에리사 의원님이 팀으로 다녔는데요. 나이 든 분은 이에리사 의원을 '탁구 여왕'으로 기억하고, 젊은 분은 저를 '완득이 엄마', 이주 여성들은 '러브인아시아 나온 이자스민 언니' 이렇게 알아봤죠. 그렇게 "표를 두 개 줄 건데 1번만 찍으면 된다"고 말하고 다닌 거에요.

- 새누리당 정책이 이자스민 의원님과 안 맞을 때도 있지 않아요?

= 다문화 가정 정책엔 여야가 없고요. 특히 (농촌 지역이 있는)지방 의원들은 관심이 많아요. 저한테 자주 오고, 제가 뭐라도 만들길 바라죠. 근데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19대 상반기엔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북한이탈주민 정책을 다뤘는데, 다문화 정책과 비슷해서 도움이 됐어요. 여성가족위원회에서는 다문화 정책을 했고, 하반기에는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이주노동자 정책을 다루고 있고요. 참 신기한 건 야당이 이주노동자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이주노동자는 투표권이 없잖아요.

- 이주민 국회의원이 탄생하면서 정치권과 우리 사회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 아들 관련해서 질타를 받았는데 저는 사실 신경도 안 써요. 그 기사도 몇 번이나 출처가 바뀌었고요. 대학 막 들어가서 적응해야 할 아들한테 미안한 일만 생기는 거죠. 그래도 저는 안 숨었어요. 행사도 다 갔고요. 다른 의원님들이 저한테 그래요. "우리나라가 다문화에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우리 국민들 이해 수준이 거기까지는 안 가서 이 문제가 된 거다. 이자스민 의원이 있음으로써 '우리가 아직 멀었구나. 좀 더 해야겠구나'를 알게 됐다." 정책하시는 분들이 "큰 깨달음"이라고 해요. 심하게 반발할수록 의원님들은 "이거 바로 잡아야 한다"라고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임기가 1년 남았는데요. 20대 국회에선 이주민 의원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나요?

= 유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야당 의원들이)농담으로 사람 좀 소개해 달라는 데, 인재 찾기가 어려워요. 일단 한국어를 잘 해야 하잖아요. 제가 한국에 온 20년 전엔 일본과 필리핀 이주민이 많았어요. 통일교가 두 나라에 많잖아요. 베트남은 2000년도에요. 필리핀 사람들은 영어를 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잘 안 배웠죠. 일본 사람들은 정치계에 들어가기 어렵구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많지가 않아요.

- 국회의원을 마치면서 꼭 하나 완성해놓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 우리나라는 10, 20년 후엔 더 다문화 사회가 될 거에요. 나라 문을 닫지 않는 이상 구성원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걸 어떻게 소화하느냐. 지금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다음에 국회의원이 안되더라도 다문화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현재 국무총리실에 3개 위원회가 나뉘어져 있어요.(외국인정책위원회, 외국인노동자정책위원회, 다문화가정정책위원회) 실무국도 없이 위원들만 있고, 1년에 한두 차례 회의만 해서는 어려워요.

- 허핑턴포스트 각국 편집장들이 독일 뮌헨에서 회의를 했을 때 프랑스 편집장에게 '샤를리 엡도' 테러에 대해 물어봤어요. "이민자 역사가 긴데 사회, 문화, 제도적으로 호응 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 한국도 같은 상황을 겪을 수 있다. 조언을 해달라." 그런데 "이미 봤다시피 우리도 조언해 줄 말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 유럽은 우리와 상황이 굉장히 달라요. 프랑스는 노동이민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는 안되잖아요. 결혼이민밖에 안돼요. 여기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한국적인 요소가 있고요. 우리 아들만 봐도 필리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순 한국인이에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고, 엄마가 필리핀 출신일 뿐이에요. 우리는 미국, 유럽 이민 정책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맞는 정책을 찾아가야 해요.

3. "필리핀X을 왜 국회의원 시켰어"

인터넷에선 필리핀 출생인 그에게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국인 피살 책임져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독일 출생으로 귀화한 이참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겪지 않았던 경험이다.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이 '이자스민법'으로 알려져 온갖 공격을 받았고,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도 수차례 올라갔다.

- 인터넷에 올라오는 인종차별성 비난 중 대표적인 게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에요. 이런 댓글에 뭐라고 말씀하고 싶으세요?

= 내 나라에 와 있잖아요. 내 나라는 한국이에요. 사실 (그런 말이) 아프죠... 필리핀 사람들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에요. 아마 제가 오랫동안 씩씩하게 살 수 있는 건 그 덕일 거에요. 정말 빡빡한 이 사회에서 그런 것도 없으면 정신이 나갔을 거에요.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결혼하면 우리나라의 평균 '아이큐'가 떨어진다. 수학 능력이 떨어진다는 댓글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것도 있어요. 다문화 아이들 축구팀이 있는데, 감독님이 "다문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한국 축구의 희망을 봤다"고 말하셨어요. 한 아이 엄마가 라틴계인데 "한국 아이들에게 없는 게 그 아이에게 보이더라"는 거죠. 라틴계가 유연성이 좋잖아요.

- 그런 댓글은 대개 젊은 층이 작성할 것이라고 추측이 되는데요.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세대 별로 차이가 있나요?

= 여성가족부가 다문화 수용성 설문조사를 해요. 초중고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높게 나와요. 젊은 층이 더 열려 있다는 거죠. '검경'에서 의원실로 전화가 온 적이 있어요. 저에 대한 나쁜 글을 남겨서 제 3자에게 명예훼손 고발을 당한 친구가 있다고요. 보좌관이 전화통화에서 '왜 그랬냐'고 물어봤어요. "그냥 재밌어서요. 다른 사람들이 다 올리기에. 그리고 '좋아요' 누르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라고 말하더래요. 인터넷 현상이기도 해요. 이자스민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는 거죠. 인터넷 신문사들도 관련 없는 내용이라도 늘 기사 제목에 이자스민을 넣어요. 더 클릭하니까. 그게 슬프죠. 제가 블로그에 '댓글 기능'을 없앴어요. 제가 처음이다 보니까 많은 다문화 이주민들이 보고 싶어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주 여성이 이메일을 보냈어요. "이제는 못 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메일을 보내요. 정보를 얻고 (이 의원이)좋아서 들어갔는데 거기 가면 상처를 받고 나갑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요."

2년 전에 한 경제학자가 "경제가 나쁘면 나쁠수록 가장 약한 타깃을 (공격)한다. 앞으로도 경제가 더 나빠질 테니까 단단히 각오하라"고 했어요. 화풀이를 하는 건데요. 저는 그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정말 화풀이라고 생각하고 싶고, 화풀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쁜 마음을 먹고 댓글을 다는 거라면 정말 안 좋은 거잖아요. 근데 정말 중요한 건 사회가 그렇게 나오면 나올수록, 댓글이 나쁘게 나올수록, 국회에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슈가 되면 이주민 정책, 다문화 정책을 더 고민하게 된다는 거에요.

-뭐든지 아주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아요. 그런 에너지를 준 '롤모델'이 있나요?

= 당연히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건 남편이에요(편집자주: 그의 남편은 2010년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을 그를 통해 배웠고, 내가 정치계로 입문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지지해줬어요. 그와의 결혼 15년 간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가볍게 술 한잔을 하고 노래방을 함께 갔어요. 사람들이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부부가 뭐 그리 서로 할 말이 많냐”고 할 정도로 말이에요. 제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어준 건 바로 제 남편이었어요.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정치인, 엄마의 삶을 살지만, 그래도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순간들이 있겠죠? 어떻게 푸세요?

= 모바일폰으로 게임을 해요.(웃음) 바쁜 와중에 휴대폰을 홀로 들여다보면서 게임을 하면 뭔가 충전이 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예전에는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했는데, 어딜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기 때문에 조금 불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공공 장소는 피하려고 해요. 혼자 할 수 있는 것만 해요. 모바일 게임처럼요.(웃음)

-정치 외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는 뭔가요?

= 아이들이요. 제가 정치에 입문한 것도 아이들 때문이에요. 한국의 다문화 가정에 사는 아이들은 롤모델이 없어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들 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으면 내가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자고 생각했죠. 정치에 뛰어들어서 어떤 비난을 받든, (나와 다른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게 0.001%라도 더 도움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만 있다면 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거죠. 그리고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면, 모든 한국의 아이들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믿어요.

-그렇다면 다문화 가정이든 아니든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아이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부모와 사회와 타인이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는 거에요. 마틴 루터 킹은 'If I cannot do great things, I can do small things in a great way'(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은 일들을 위대한 방식으로 하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죠.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위대하고 거대한 성취'만을 목표로 삼아요. 하지만 작은 일일지라도 위대한 방식으로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멋진 삶일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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