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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보다 요리였어" 산업디자인을 전공해 구글코리아에 다니다 요리사가 됐다(인터뷰)

  • 박수진
  • 입력 2015.05.05 07:51
  • 수정 2015.06.01 13:59

퇴근해 엄마 옆에 다가앉았다. 마음을 졸이며 이야기를 꺼냈다. “나 회사 그만두고 요리할래.” 빨래를 개키던 엄마는 처음엔 놀란 눈치를 보이다가 곧 “그럼, 하고 싶은 거 해. 엄마도 할아버지 반대로 미대를 못 간 거 평생 후회한다. 후회해”라고 답했다. 곁에서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빠는 “이제 더 맛있는 요리 먹을 수 있는 거지”라며 웃어넘겼다.

비장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냈는데, 고교 때부터 비싼 학비를 내며 미국으로 유학해 명문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구글이라는 ‘신의 직장’을 다니던 딸이 돌연 그만두고 요리를 배우겠다는데…, 부모에 대한 설득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뭐지, 이건?’

마지막 관문은 직장 상사. 베이징 출장을 다녀온 매니저는 아침 일찍부터 팀 미팅을 하며 의욕적으로 할 일을 설명했다. 미팅이 끝나고 매니저와 둘이 남았을 때,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저 그만두고 싶어요”라고 말을 꺼냈다. 중국계 미국인인 매니저는 잠시 침묵하더니 “왜?”라고 물었고,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말에 “와우” 하며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했다. 동료들도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게 부럽다며 축하 인사에 바빴다. 얼떨떨했다. 그렇게 안주원(31·사진)씨는 20대 중반에 요리사의 길로 들어섰다.

20대 중반에 구글코리아를 그만두고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 안주원 씨.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안씨가 힘들게 들어간 구글코리아는 복지와 사회적 대우가 엄청났다. ‘구글러’라는 타이틀만 있으면, 마치 슈퍼마리오 전자게임에서 슈퍼스타를 먹은 레인보 마리오가 된 느낌이었다. 심지어 미국 출장길에 마주친 출입국 관리도 구글에 근무한다는 말에 신나게 도장을 찍어주며 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무료함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2년6개월 만에 그만두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우연히 만난 미국인 노숙자와의 대화였다. 한창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안씨는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로 출장을 가서 토요일 호텔 근처의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양파 100개와 피망 200개를 다져야 하는 일. 봉사를 마치고 노인과 합석해 식사를 하는데, 한 노인은 “예전에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주말마다 끓여 먹던 스튜 생각이 난다”며 울먹였고, 또 다른 노인은 “이젠 저세상에 있는 아내가 끓여주던 스튜가 최고”라고 자랑했다. 잠시 자리를 떠 화장실에 간 안씨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들과 생각이 얼마나 큰 즐거움과 보람을 주는지를….”

안씨는 불안함과 망설임 끝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요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증조할머니는 한꺼번에 만두 몇백개를 빚고 내장탕과 순대를 맛나게 만들던 요리의 대가였고, 아버지는 미식가다. 집에서 조기구이를 해도 몸통에 먼저 젓가락을 댔다간 호통이 떨어졌다. 먼저 꼬리를 따고, 아가미가 있는 목덜미부터 파고들어, 뼈대를 따라 몸통을 해체한 다음 완벽하게 살코기와 가시를 분리한 뒤에야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 젖어 막연히 관심을 갖고 있던 요리가, 기대와 달리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던 회사생활이 싫어지며 그를 강하게 끌어당긴 것이다.

제빵사 자격증과 한식요리사 자격증을 딴 안씨는 미국의 요리학교로 또다시 유학했다. 그는 서양 학생들이 ‘당연히’ 버리는 연어 머리로 요리를 해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기도 했다. 현지 레스토랑의 인턴 과정은 혹독했다. 감자를 가로세로 5㎜ 정육면체로 썰기, 양파를 두께 1㎜로 채썰기, 껍질 벗긴 피망을 가로세로 2㎜ 정육면체로 썰기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사과 상자에 가득 들어 있는 줄기콩을 4㎜ 네모로 재단해야 하기도 했다.

귀국해서 강남의 유명 레스토랑에 취직해 2년가량 근무한 그는 올해 들어 2월부터 이태원 경리단 골목의 조그만 막걸리집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국산 막걸리와 청주에 어울리는 안주를 만든다. 메뉴판엔 술만 있고, 안주는 조그만 칠판에 그때그때 쓴다. 손두부, 계란장조림, 오리구이, 김치 등이 그날그날 그의 손끝에서 마음대로 준비된다.

“음식은 만든 이와 먹는 이의 마음이 통해야 해요. 화려하고 새로운 맛 대신 잊혀가는 우리의 맛을 살리고 싶어요.” 초보 셰프인 그는 우선 두부의 맛을 알리고 싶어 한다. 직접 아침에 두부를 만들어 안주로 내놓는다. “원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요. 그래서 손님들에게 맛있는 집밥을 먹여주고 싶어요.”

최근 자신이 요리사로 들어선 과정을 풀어 <구글보다 요리였어>(브레인스토어)를 펴낸 안씨는 저녁 손님맞이를 준비하며 이전엔 느끼지 못한 행복감을 만끽한다고 썼다. “행복해지는 법을 찾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눈뜨자마자 엄청난 용기가 솟아나서도 아니고 누군가가 알려줘서도 아니었어요. 처음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손대기 시작한 제빵과, 전공과목이 지겨워 일부러 들었던 철학 수업, 운동하려고 시작한 춤, 이런 ‘딴짓’ 속에서 행복의 단서가 보였어요. 내가 무얼 할 때 즐겁고, 무얼 잘할 수 있는지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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