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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검도에는 영화관 카페가 있다

이 35석짜리 작은 영화관, 은근 고품격이다. 좌석 간격이나 음향 설비, 인테리어까지 기분을 좋게 한다. 오늘의 영화에 대한 해설이 시작된다. 제목은 '푸른 하늘 (A Patch of Blue).' 듣도 보도 못한 1965년 미국 흑백영화다. 예술영화나 한국 내 미개봉 영화, 제3세계 영화와 희귀 고전 영화를 보여주는 이 영화관 카페는 연중무휴. 영화 선정을 하는 선정위원회와 10인 번역위원회를 두고 있다. 관객들의 상영 요청도 적극 수용한단다.

  • 정경아
  • 입력 2015.05.07 10:40
  • 수정 2016.05.07 14:12

강화도 옆 작은 섬 동검도에 가는 날이다. 본섬인 강화도를 잇는 다리가 놓여있으니 더 이상 섬이 아닌 섬. 근데 신기하다. 난간도 없는, 한낱 시멘트 구조물이지만 다리는 육지와 섬 사이, 섬과 섬 사이에 엄연한 심리적 경계선을 긋는다. 단절감이랄까,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가느다란 봄비 속, 동행한 두 친구와 선두리 어시장 근처에서 회를 곁들여 매운탕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목적지는 DRFA란 난해한 이름을 가진 작은 영화관 카페. 하와이안 코나 커피를 주 종목으로 하는데 내 친구 하나가 그곳 주방 스탭으로 일한다. 도착해보니 친구는 하루 휴가를 내고 경주에 가고 없다. 카페 2층에 앉는다. 코앞에 동검리 개펄이 쫙 펼쳐진다. 주인인 유선생은 인디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오늘은 커피를 내리고 서빙까지 도맡아 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5천원. 거기에 2천원을 추가하면 영화를 볼 수 있는 세트 상품이 이 집의 대세 메뉴다. 쌀국수나 피자를 곁들인 식사와 영화 패키지도 있다. 3시 상영 영화를 택한다. 근데 이 35석짜리 작은 영화관, 은근 고품격이다. 좌석 간격이나 음향 설비, 인테리어까지 기분을 좋게 한다. 25석 정도가 찼다. 관객은 모두 50대, 60대 여성들. 남성은 전멸이다. 베이지색 울 라운드 티를 입고 일층과 이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빙을 하던 유선생, 돌연 스크린 앞 키보드에 앉아 연주를 시작한다. 왕년의 앤디 윌리암스가 불렀던 달달한 노래, 'And I Love You So.' 살짝 배 나온 동네 주민 같은 유선생의 투박한 손이 그리도 감미로운 선율을 두드릴 줄이야. 그날의 관객 취향이나 날씨 등을 고려해 피아노 곡목을 선정한다나.

오늘의 영화에 대한 해설이 시작된다. 제목은 '푸른 하늘 (A Patch of Blue).' 듣도 보도 못한 1965년 미국 흑백영화다. 예술영화나 한국 내 미개봉 영화, 제3세계 영화와 희귀 고전 영화를 보여주는 이 영화관 카페는 연중무휴. 영화 선정을 하는 선정위원회와 10인 번역위원회를 두고 있다. 관객들의 상영 요청도 적극 수용한단다.

미국 남부의 어느 도시, 눈먼 18세 백인 아가씨 셀리나의 힘든 일상이 그려진다. 술에 찌든 엄마 로즈 앤과 집 나갔던 아빠의 부부싸움 도중 잘못 던져 진 산성 물질로 인해 어린 시절 실명한 셀리나.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며 구슬 꿰기 부업을 한다. 학교는 커녕 친구를 사귈 기회조차 없다. 이혼한 엄마와 외할배랑 함께 산다. 공중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는 엄마의 술주정과 학대는 갈수록 심해진다.

우연히 공원에서 마주친 흑인 남성 고든의 도움을 받은 후 그에게 우정과 사랑을 함께 느끼게 된 셀리나. 따뜻한 심성을 지닌 야근 직장인 역에는 시드니 포이티어.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이 풋풋하다. 흑백 간 분리 차별이 엄혹했던 1960년대 사회배경 속, 고든이 흑인임을 알게 되지만 셀리나는 그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냉철한 고든은 애틋함을 누르고 그녀를 특수교육학교로 보내는 조치를 주선한다. 그녀를 가족에게서 구해낸 것이다.

피부 빛깔이 하얀지 검은지를 분별하고 차별하는 사회를 향해 사람과 사람 사이 선의와 우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묻는 영화. 시각 장애인이 첫사랑에 눈뜨는 모습을 통해 눈에 보이는 질서인 흑백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정당한지를 묻고 있다. 좋은 영화다. 어쩌면 내 생전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영화를 저작권 확보부터 번역까지 해서 보여준 주최 측의 열정에 기립박수를 보낼 지경.

극장의 불이 켜진다. 엇비슷한 나이대의 여성 관객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학교 동창이거나 동네 친구. 직장 동료들이었거나 아이들의 학부모클럽이겠지. 중년여성들이 값비싼 음식점을 휩쓸고 다닌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동검도의 작은 영화관 카페를 찾는 주요 고객도 바로 이 중년여성들. 감성 욕구와 수요를 충족시키는 공간들을 지키는 문화운동의 당당한 주체세력이기도 하다. 이 작은 영화관 카페엔 꼭 봐야할 영화 100편 목록까지 있다나. 자주 와야겠다고 일행은 다짐한다.

오나가나 노후 계획이 화제다. 길어진 노후를 위해 얼마만큼 돈을 모아야 하는지 다들 떠들어 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노후 자금 준비로 노후 준비가 끝나는 건 아니다. 물론 긴 노후를 지탱하기 위한 재무 능력은 필수. 그에 못잖게 중요한 게 있다. 함께 놀 친구 명단과 적당한 일거리다. 마음 맞는 친구 명단이 점점 더 주요 재산 목록이 되는 요즘이다. 또 퇴직 전 업무와 관련이 있거나 없는 일감도 필수. 내 친구들도 재취업이나 창업 교육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60대 초반인 친구 하나는 교직에서 조기 퇴직한 후 지자체가 제공한 베이비시터 교육훈련을 받았다. 요즘 맞벌이 가정의 아기를 돌보러 출퇴근한다. 아기 돌보기가 생각보다 중노동일 뿐 아니라 책임감이 무겁다는 그녀. 손목과 허리 통증이 베이비시터의 직업병이라고 하소연하지만 노동이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한 축임을 실감케 한다. 적당한 일거리와 매달 백만 원의 수입이 퇴직자들의 로망이라는 설이 과연 유력한 모양.

길어진 노후로 뭔가를 새로 배우고 익힐 필요도 많아진다. 나도 올해 된장학교와 댄스, 그리고 선불교 학생이다. 된장학교 동기생들끼리 다음엔 식초학교를 다닐까, 막걸리학교를 다닐까 함께 궁리 중이기도 하다. 5년 후 귀촌을 목표로 어느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 힐링 약초학과를 다니며 준비 중인 이들도 있다. 배우는 건 긴장되면서도 즐겁다. 퇴직 후의 날들을 지루할 틈이 없게 한다. 재취업과 창업으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 배워서 남 주는 자원활동가로 거듭날 수도 있다. 이래저래 미래 설계를 주제로 고민들이 많아진다. 누구에게나 다시 시작하고 싶은 꿈, 쓰임새 있는 인간으로 살다 가겠다는 꿈은 나이 들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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