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르포] 엄마는 외할머니를 끌어안은 채 발견됐다

지난달 29일 차타포 마을 화장터에서 소리내 울고 있는 라즈를 친척이 위로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차타포 마을 화장터에서 소리내 울고 있는 라즈를 친척이 위로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 네팔 소년 라즈 타차모 이야기

지난달 29일 낮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도시 박타푸르는 흡사 전쟁터 같은 분위기였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폭격을 맞은 듯 허물어진 벽돌집들이 눈에 띄었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에 비해 복구가 더뎠다. 주민들은 굳은 얼굴로 무너진 벽돌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대체 그 많은 신들은 어디로 간 거야?”

기자와 동행한 네팔 엔지오 ‘수카와티’의 대표 미노드 목탄(44)이 한숨을 쉬었다. 네팔은 ‘신들의 나라’로 불린다. 다양한 힌두교 신들이 사람들과 함께 산다고 이들은 믿는다. 심지어 작은 돌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게 네팔 사람들의 철학이다. 그런데 25일 벌어진 대지진의 재앙 앞에서 신은 눈을 질끈 감은 것일까.

열다섯 소년은 박타푸르 거리의 한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물 흐르듯 흘렀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딸꾹질을 하며 그억그억 소리를 냈다. 괴로운 표정의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엄마가 없어졌어요. 엄마가 돌 안에 있어요. 아직 못 찾고 있어요.”

소년의 이름은 라즈 타차모. 라잔의 엄마 푸르나 락스미(41)와 외할머니는 닷새째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진이 났을 때 엄마는 외할머니와 함께 집에 있었다. 소년은 바깥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어 화를 면했지만, 엄마와 외할머니는 집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분명 집에 계셨는데 사람들이 못 찾고 있어요.”

지난달 30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15㎞ 떨어진 도시 박타푸르의 차타포 마을에서 대지진으로 엄마와 외할머니를 잃은 라즈 타차모(15·왼쪽)와 그의 여동생 로자 타차모(10)가 자신들이 살던 부서진 집을 배경으로 섰다. 라즈는 전날 화장터에서 어머니 푸르나 락스미(41)와 외할머니 크리슈나 마야 고사인(76)의 주검에 직접 불을 붙였다. 네팔에선 부모의 주검에 불을 붙이는 일을 아들이 직접 해야 부모가 내세에 편하게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무너진 벽돌 더미 안에 숨을 쉴 만한 공간이라도 있다면. 그 틈으로 엄마가 살아있다면. 라즈의 눈물이 땅바닥에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엄마 찾았대!”

친척 형인 비노드 바이나토(30)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라즈의 집은 이날 오전부터 한국 정부가 파견한 119 국제구조대가 수색하고 있었다. 수색 몇 시간 만에 성과가 난 것이다. 라즈의 일그러진 얼굴은 그러나 펴지지 않았다.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라즈가 비노드 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즈가 사라진 뒤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고 거센 비가 내렸다.

<한겨레>는 지난달 29일부터 1일까지 사흘 동안 라즈 타차모와 그의 동생 로자 타차모(10)와 함께 보내며 대지진 이후 네팔인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고 기록했다.

엄마 껴안고 죽은 엄마, 그 육신에 직접 불을 붙이다

마을 중앙에는 사원이 있었다. 사원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에 통제선이 쳐져 있었다. 통제선 안에서 한국에서 파견된 구호요원들이 분주하게 무너진 집들 사이를 오갔다. 구조대는 내시경 카메라처럼 생긴 장비를 이용해 돌더미 속에 파묻힌 주검이 있는지 살폈다. “후두두둑” 무너진 집 벽에 힘겹게 붙어 있던 깨진 벽돌들이 낙하했다. 주민들 수십명이 웅성거리며 구호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달 29일 오후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15㎞ 떨어진 박타푸르. 열다섯살 소년 라즈 타차모의 엄마 푸르나 락스미(41)는 자신의 어머니, 곧 라즈의 외할머니인 크리슈나 마야 고사인(76)을 꼭 끌어안은 채 주검 상태로 발견됐다. 이날 오전 한국 정부가 파견한 119 국제구조대가 수색하던 이는 이 두 모녀였다. 두 모녀의 주검 수습 장면은 이튿날 네팔 텔레비전 뉴스로 소개됐다.

‘리틀 부다’ 배경 된 바로 그 박타푸르

라즈를 다시 본 건 한 시간쯤 뒤인 오후 3시30분, 마을 화장터에서였다. 화장터는 얕은 개천을 끼고 있었다. ‘허누먼테’라는 이름의 잿빛 강이었다. 화장터 한켠 바닥에 하얀색 천으로 덮인 주검 두 구가 놓여 있었다. 오리들이 어슬렁거렸고 살 썩는 냄새가 풍겼다. 마을 주민들이 주검 옆에 향을 피워두었다. 4월말 네팔은 초여름 날씨다. 주검은 금방 부패됐다.

화장터 밖에서 울고 있는 라즈의 모습.

화장터에 도착한 라즈는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이어 라즈의 여동생 로자 타차모(10)가 친척 언니의 손을 잡고 화장터에 나왔다. 로자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라즈도 친척 누이의 품에 얼굴을 묻고 말이 없었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주검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 주저앉은 타차모 남매는 차마 엄마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타차모 남매의 아버지 크리슈나 고팔 타차모(42)는 3시54분에 도착했다. 황망한 표정의 크리슈나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마을 사람들은 코를 막고 유족과 주검을 두리번거리며 지켜보았다. 경찰이 찾아왔다. 종이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전화기로 숨진 이의 신원을 상부에 보고했다. 경찰의 업무가 다 끝나자, 타차모 남매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장례식이 시작됐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주검에 직접 불을 붙이는 라즈.(오른쪽 둘째)

타차모 남매는 네와르 부족의 일원이다. 네팔은 다양한 부족이 함께 사는 국가다. 네팔에서 가장 흔한 부족 중 하나인 네와르 부족은 주검을 강 옆에서 화장한다. 상은 13일 이어지는데 주검은 일찍 화장한다. 타차모 남매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숨진 지 나흘이나 지나 발견됐기에 가족들은 곧바로 화장을 시작했다.

친척들이 주검 옆으로 다가가 천을 살짝 걷어낸 뒤 몸에 걸친 장신구 등을 떼어냈다. 이어 천 위에 동전과 지폐 등을 놓았다. 모여 있던 여자들이 갑자기 오열했다. 10여분쯤 뒤 남자들이 주검을 들것에 들고 장작불 위로 옮기려 했다. “아마, 아마”(엄마, 엄마) 라즈와 로자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고 친척들은 훌쩍이며 두 남매를 지켜보았다.

친척들이 라즈의 윗옷을 벗기고 ‘카스토’(khasto)라고 불리는 흰 천을 몸에 걸게 했다. 라즈는 어머니의 몸에 물 몇 방울을 뿌렸다. 물은 속세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신성함을 의미한다. 그때 엄마의 가려졌던 얼굴이 천 바깥으로 살짝 비쳤다. 벽돌더미 아래서 나흘을 보냈다. 부패가 너무 많이 진행된 탓일까. 엄마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까맸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친척어른의 지시에 따라 라즈도 활활 타오르는 나무 막대를 들어 엄마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부모의 주검에 불을 붙이는 건 아들의 몫이다. 그래야 부모가 내세에 편하게 도달할 수 있다고 네팔 사람들은 믿는다. 주검이 활활 타오르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라즈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열다섯 소년에겐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라즈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 어딘가로 걸어갔다. 주검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잿가루가 되어갔다. 까마귀들이 화장장 옆 냇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박타푸르의 마을 곳곳이 라즈네 집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타푸르는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말라 왕조시대 왕국 수도 세 곳 중 하나였다. ‘귀의자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이 도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리틀 부다>의 배경이 됐을 정도로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영화 속 한국전쟁 직후 서울의 모습을 보는 듯 혼란스럽다.

타차모 남매는 박타푸르의 차타포 마을에 산다. 들판 너머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어지는 산을 품은 이 평화롭던 마을은 이제 폭격을 맞은 듯 곳곳의 집들이 무너져 내렸다. 성한 집보다 무너진 집이 많다. 언덕 위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오르자 길 양옆으로 무너진 벽돌집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주민들이 진흙탕이 되어버린 골목길을 슬리퍼 하나에 의지해 분주하게 오갔다. 무너진 집에서 가재도구를 꺼내 왔다.

취재에 동행한 미노드 목탄(44)이 한 주민과 대화를 시작했다. 미노드의 표정이 좋지 않다. “제 아이가 병원에 있어요. 바로 여기 무너진 벽돌더미에서 발견됐어요. 제 아내가 아이를 꼭 끌어안은 덕분에 아이는 살았지만 아내는 죽었어요.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쳤어요.” 노브라즈 프루자부티(41·남)가 미노드에게 말했다.

프루자부티의 집은 무너졌지만 그가 운영하던 가게는 다행히 건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프루자부티처럼 집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곳곳 들판이 천막촌이 되었다. 타차모 남매의 집도 이제 천막이다.

함께 모인 친척 26명과 30㎏ 쌀포대

밤이 되었다. 라즈는 어딘가로 가고 없었고, 라즈의 동생 로자만 친척들이 마을 어귀 들판에 친 천막 안에 있었다. 집이 무너져 내린 건 타차모 남매의 집만이 아니었다. 마을에 함께 모여 살던 타차모의 친가, 외가 친척들도 모두 집을 잃었다. 천막 안에는 친척 여섯가구 스물여섯명의 식구들이 같이 생활한다.

로자는 지진이 났을 때 벽돌더미에 깔렸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됐다고 한다. 친구들과 집 밖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을 때 집들이 무너졌다. 벽돌들이 비처럼 로자를 덮쳤지만, 다행히 서까래 나무 따위가 소녀의 몸을 보호해주었다.

“저는 비가 오는 줄 알았어요. 친구들에게 ‘비가 오니까 멈춰 있자’고 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꽝’ 하는 소리가 났어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병원이었어요. 많이 무서웠어요.”

로자는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오른 손등에 긁힌 자국이 있었고 딱지가 앉아 있었다. 청바지의 무릎에는 돌에 긁힌 듯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엄마는 저에게 혼자 멀리 다니지 말라고 했어요. 엄마가 얘기한 게 계속 생각나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로자는 눅눅해진 이불더미에 몸을 기댄 채 조용조용 말했다.

밤이 늦어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저녁 8시께 천막을 나왔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 마을은 암흑에 빠져 있었다. 전기가 모두 끊겼다. 사람들은 간이 발전기를 이용해 충전시킨 손전등에 의지해 밤을 지새웠다. 어둠 속에서 들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댔다.

나마스테. ‘저의 신이 당신께 인사드립니다.’ 네팔에서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인사다. 턱 아래쪽에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인사말을 건넨다. 네팔은 신의 나라다. 온 세상 만물에 다양한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어머니와 집을 잃은 타차모 남매는 이튿날 오전 천막을 다시 찾은 기자에게 신이 전하는 안부를 건넸다. “나마스테.”

주민들이 라즈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주검을 옮기고 있다.

날이 밝자 어제보다 천막 안이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바닥은 흙 위에 짚을 깔고 다시 낡은 스티로폼을 깔았다. 사람 키보다 조금 더 높은 기둥 네개를 땅에 박아 그 위에 천막을 씌웠다. 더러운 이불, 이곳저곳 정신없게 놓인 솥과 냄비들 옆으로 꼬마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녔다. 밤이슬을 머금은 천막 가장자리에선 물이 뚝뚝 흘렀다. 곡식을 말릴 때나 쓰던 천막이 지금은 임시 거처의 지붕이다. 여섯평 남짓한 공간에서 스물여섯명이 대책없이 지내야 한다.

“구호품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어요.”

라즈의 작은아버지 라잔 타차모(33)가 말했다. 천막 안에 쌀 포대가 보였다. 30㎏ 정도 되어 보였다. 그 옆에 감자 세 포대가 놓였다. 스물여섯명이 이 식량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삼일? 사일? 일주일? 아이들이 얼마나 배를 곯느냐에 따라 버티는 기간은 길어질 것이다. 카트만두보다 지진 피해가 심한 박타푸르에서는 이날까지도 문을 연 식료품점이 없었다.

라즈가 친척 형들과 함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라즈의 집에는 원래부터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없었다. 친척 형이 갖고 있는 최신 스마트폰이 라즈에게는 신기하다. 전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이의 표정으로 거리에 앉아 있던 라즈의 얼굴이 다소 편안해진 듯 보였다.

“어제 많이 슬퍼 보였다”고 말을 건네자, 소년은 씨익 웃을 뿐 말이 없다. 작은아버지 라잔이 대신 말을 받았다. “라즈가 밤새 자다가 무언가에 놀란 듯 몸을 떨었어요.” 라잔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라잔의 집도 무너졌다. 떨어진 벽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졌다. 여러 바늘 꿰맸다.

“좋은 집 구해 과일나무 심자 했는데…”

주민들에게 외국인 기자의 방문은 신기한 구경거리다. 라즈, 로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스무명 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경했다. 라즈, 로자와 천막을 나섰다. 10여분 걸어가자 남매가 다니는 6층짜리 바게스와리(bageswari) 학교가 나왔다. 이 학교에선 초·중·고등 교육이 함께 이뤄진다. 마침 학교 앞 간이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함께 밥을 먹었다. 라즈가 입을 열었다.

“저희 집은 5층짜리 건물이에요. 지진이 났을 때 엄마와 외할머니는 4층에 계셨어요. 할머니는 옷을 꿰매고 계셨고 엄마는 부엌에 있었어요. 저는 엄마가 씻으라고 했는데 나중에 씻겠다고 하고 집 밖에서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집이 무너져 내렸어요.”

지진이 닥친 25일 오전 11시56분의 상황을 라즈는 똑똑히 기억했다.

“집이 무너졌어요. 3층까지는 그래도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어요. 4층과 5층은 무너지고 없었어요. 3층에 올라 할머니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다시 땅이 흔들렸어요. 집을 다시 나와 외삼촌 사티아 람에게 엄마와 외할머니가 4층에 계셨다고 말했어요. 외삼촌은 제가 더이상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어요. 하지만 일요일(4월26일)과 월요일(27일)에 계속 삼촌 몰래 집에 가보았어요. 저는 엄마가 돌아오시기를 계속 기다렸어요.”

엄마 이야기를 꺼내면서 라즈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저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예요. 학교 숙제도 도와주셨어요. 엄마는 말을 못하는 장애가 있어요. 아빠도 같은 장애가 있고요. 사람들은 엄마 말을 못 알아들어요. 하지만 저는 알아들어요.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나중에 꼭 좋은 집을 구해 마당에 과일나무도 심고 행복하게 살자고 했어요.”

남매의 집은 풍족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짐꾼으로 일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텼다. 가족은 외할머니 집에 얹혀살았다. 그런 집마저 이제 사라지고 외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라즈는 이제 9학년(고등학교 1학년)이고 동생 로자는 5학년(초등학교 5학년)이다. 남매는 둘 다 학교에서 10등 정도 했다. 한 학년에 150여명 정도 있다고 한다. 이 정도 성적이 10학년까지 이어지면 대학 진학도 가능하다. 네팔에서는 10학년 때 에스엘시(SLC·일종의 수학능력시험)를 치르고 2년 더 공부한 뒤 대학 진학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라즈는 진학의 꿈을 접은 듯 보였다. 소년은 며칠 새 갑자기 철이 들어버렸다.

“저는 과학 공부를 좋아해요. 하지만 10학년까지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둬야 할 거 같아요. 큰이모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서 장학금까지 받고 공부했지만 결국 돈이 없어 졸업을 못했어요.” 라즈는 자신이 대학을 갈 수 없는 형편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집까지 무너진 상황에서 당연한 판단일 것이다. “외삼촌은 호텔 버스를 운전해요. 친척들이 저를 어딘가에 취직시켜주지 않을까요?” 속눈썹이 긴 라즈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말했다.

라즈 옆에서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던 동생 로자가 갑갑한 듯 몸을 꼬았다. 로자가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목 부분이 찢겨 있었다. 집이 무너질 때 로자의 옷이 다 사라져 친척 오빠가 입던 옷을 빌려 입었다고 했다.

“저는 의사가 되고 싶어졌어요. 다친 사람들 많이 보니까 치료해주고 싶어요.”

가재도구 챙기러 집에 갈 필요가 없네

아이들과 차타포 마을에 있는 집에 갔다. 10여분을 함께 걸었다. 마을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무너진 벽돌더미들이 남매의 집 50여m 앞부터 쌓여 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벽돌더미를 올라 집 앞으로 걸어갔다. 마을 주민들은 무엇 하나라도 더 건질까 싶어 무너진 집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집의 폭이 5m 남짓 될까. 좁은 터에 5층까지 올려진, 아니 이제 허물어져 3층까지만 남아 있는, 폐허의 벽돌집이 남매가 살던 집이었다. 1층의 출입문은 벽돌더미에 파묻혀 반 정도만 공개돼 있었다. 허리를 숙여 반파된 건물 안으로 잠시 들어가보았다. 2층에 올라서자 흙먼지가 낀 구두 한 켤레가 보였다. 주전자와 냄비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라즈의 가족들이 다른 이웃들처럼 열심히 가재도구를 챙기러 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집에는 원래부터 값나가는 살림살이가 없었다.

“더르락처.”(무서워)

로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른 주운 것들을 집어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구두를 건네자 라즈가 “제가 학교 갈 때 신는 구두예요”라고 말했다. 남매를 데리고 집터를 떠났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4층에서 숨졌다. 4층 천장이 무너졌을 뿐 나머지 아래층은 멀쩡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구조대가 투입돼 엄마를 발견했더라면 혹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라즈가 말했다. “내가 분명 엄마가 저 위에 있다고 말했는데 어른들은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얇은 슬리퍼 위에 맨발을 얹은 라즈가 진흙탕이 된 골목길을 걸어가며 말했다.

오후 5시. 하늘에 석양이 깔렸다. 들판의 벼들은 익어가고 멀리 보이는 산은 푸르렀다. 염소들은 느긋하게 들판에서 낮잠을 잤다. 자연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사람들만 혼란 속에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다시 찾아온다는 말이 전해졌다. 지진은 예고가 없다. 괴소문이지만 주민들은 불안했다.

타차모 남매의 가족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사당으로 갔다. 주검의 화장은 끝났지만, 아직은 장례 기간이다. 남매의 몸에 다시 카스토라고 불리는 하얀 천이 씌어졌다. 사당 앞마당에는 짚 돗자리가 깔렸다. 마을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각각 다른 돗자리를 깔고 앉았고, 여자들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로자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맺혔다. 남자들은 손에 쥔 하얀 쌀을 조금씩 먹었다. 사당 한가운데 돌탑에 새겨진 힌두신 조각상이 황망한 애도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의식이 끝난 뒤 라즈가 말했다. “많이 아프지 말고 편하게 가시라고 했어요.” 13일 동안 라즈는 고기, 렌즈콩 등 음식을 먹지 못한다. 1년 동안은 우유도 먹을 수 없다. 힘겨운 저승길에 오른 어머니를 생각해 자식도 최소한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라고 취재에 동행한 미노드 목탄이 말했다. 타차모 남매는 기자를 남겨두고 또다른 의식을 치르기 위해 사당을 떠났다. 곧 해가 졌다.

강가에 음식을 뿌리는 네누마 의식

1일 새벽 3시께 네팔 카트만두에서 여진이 느껴졌다. 기자가 머물고 있던 시내의 호텔에서도 물건이 흔들릴 만큼 진동이 느껴졌다. 이날 낮 12시께 박타푸르의 타차모 남매를 다시 찾아가 간밤에 별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라즈는 간밤의 여진을 느끼지 않고 편히 잘 잤다고 말했다. 어깨에는 하얀 천을 그대로 두르고 있었다. 이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를 위한 또다른 의식을 치렀다. 네와르족은 고인이 죽은 지 7일째날 강가에 여러 음식을 뿌리는 ‘네누마’(nenuma)라는 의식을 치른다. 까마귀나 개가 찾아와서 제일 먼저 먹는 음식이 고인이 저승길에 들렀다 먹은 음식으로 간주된다.

“엄마가 맛있는 거 드시고 힘을 내셨을까요.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라즈가 마을 어귀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손을 모으고 말했다. 구호단체가 트럭을 몰고 와 물 보급을 시작했다. 라즈는 물양동이를 가지러 천막으로 걸어갔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길에 미노드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없던 사람들에게 대지진과 같은 재앙은 어떤 의미일까.

“그냥 그 상태로 삶이 끝난 듯 느껴지는 것이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모든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겁니다. 누군가가 돕지 않는다면 말이죠.”

※수카와티 모금계좌는 우리은행

612-113997-18-482

(Chijman gurung)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