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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름이다. 타투를 하자(이미지)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타투안내서

지난 25일 오후 서울 자양동 컨테이너 쇼핑몰 커먼 그라운드의 복합문화공간 ‘토이 리퍼블릭’. 타투이스트(타투+아티스트) ‘에스피베일’과 일반인 7명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타투(문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주에 걸쳐 두차례 열린 ‘타투의 이해’ 워크숍 자리였다. 앞서 지난 18일에는 타투이스트 ‘레이지슬로우’가 일반인들과 만났다.

“지난주 워크숍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타투에 관심이 생겨 친구 2명을 데리고 또 왔어요. 작은 타투를 가볍게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 여러 타투 장르 얘기를 듣고 ‘뉴스쿨’(미국에서 유래한 타투의 한 스타일)로 마음이 기울었어요.” 최연지(26)씨가 말했다. 심상민(20)씨는 “지나가다 벽에 붙은 그림이 멋있어서 들어왔다”고 했다. “사실 타투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는데, 얘기 들어보니 예술의 한 종류라는 걸 알게 됐어요. 기회가 되면 저런 멋진 그림을 타투로 새겨보고 싶어요.”

지난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타투숍 ‘서울잉크’. 황정현(21)씨가 양어깨에 꽃에서 모티브를 딴 인도풍 문양의 타투를 시술받고 있었다. 4시간 넘게 시술받은 그는 “꽤 아프지만, 끝나고 나니 짜릿한 쾌감이 든다. 아프지 않고선 얻어낼 수 없다는 점도 타투의 매력”이라고 했다. 황씨는 스무살 때 발등에 첫 타투를 새겼다.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뒤 “삶은 공정하지 않다. 그것에 익숙해져라”는 영어 경구에서 위안을 얻고는 이를 영원히 몸에 남긴 것이다. “처음이라 잘 안 보이는 곳에 작게 새겼는데, 이후 눈에 잘 띄는 곳에 더 큰 타투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타투 시즌이 돌아왔다. 반팔 옷을 입기 시작하는 요맘때부터 추석 연휴까지가 타투 시술이 가장 활발한 기간이다. 매년 돌아오는 타투 시즌이지만 해가 갈수록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타투이스트들은 입을 모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문신은 조폭문화를 상징했다. 경찰에 검거된 조폭 무리를 비추는 뉴스 화면에는 어김없이 온몸을 시퍼렇게 뒤덮은 문신이 등장했다. 동네 목욕탕에서 문신을 한 남자라도 만나면 괜히 위축되곤 했다. 타투이스트가 공포에 떨면서 ‘형님’들 몸에 문신을 새겨줬다는 무용담도 심심찮게 전해진다. 타투는 문신의 영어 표현일 뿐이지만, 이처럼 문신이라는 말에 담긴 부정적 고정관념 때문에 타투로 일컫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통용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예술계 종사자들이 타투를 받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서울 홍대 앞에 타투숍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고, 인디 음악인, 연예인, 디자이너 등이 주요 고객이 됐다. 타투 마니아로 유명한 펑크록 밴드 노브레인의 이성우(보컬)는 2011년 ‘타투’라는 노래도 발표했다. “흐지부지한 일상에/ 너를 기다리는 샴페인/ 자 이제 빛나는 몸에 꿈을 새겨/ 너의 긴긴 잠을 깨워줄/ 지워지지 않는 파라다이스/ 자 이제 빛나는 몸에 꿈을 새겨.”

타투는 이제 조폭이나 일부 연예인·예술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옆집 평범한 여대생의 손목에도, 앞집 평범한 회사원의 정장 셔츠 안에도 타투가 자리잡고 있는 시대가 됐다. ‘서울잉크’를 운영하는 타투이스트 정길준은 “오후 6~7시에 양복 차림으로 와서 상담하고 타투를 시술받는 분들도 많다. 엄마와 딸이 같이 오는 경우도 있다. 이제는 타투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보편화돼가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일반인들은 보통 별, 십자가, 하트처럼 작고 단순한 문양을 새기는 패션타투나 글자를 새기는 레터링을 선호한다. 보일 듯 말 듯 한 부위에 작게 새김으로써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레터링은 사실 타투의 주요 장르로 볼 수 없다. 하지만 글자에 디자인 개념이 들어간 캘리그래피가 발달하면서 최근 들어 레터링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레터링은 작은 크기로도 충분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레이지슬로우는 “레터링에는 자기만의 의미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유명한 외국 격언보다는 좋아하는 노래 가사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글귀를 새겨야 타투에 대한 애착이 평생 간다”고 조언했다.

외국에선 타투가 주류 대중문화로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유명 타투이스트들이 웬만한 연예인이나 예술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타투 티브이쇼도 생겼고, 패션업계와 타투이스트의 협업도 빈번하게 이뤄진다. 나이키가 타투이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 운동화와 점퍼를 처음 선보인 게 10년도 더 된 일이다. 타투 문화가 널리 퍼진 미국과 일본에선 타투 컨벤션(박람회)도 자주 열린다. 정길준은 한때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일하고 타투 컨벤션에도 참가했다. 컨벤션 대회에서 우승해 받은 트로피도 4개나 된다. “외국인들은 미용실이나 이발소 가듯 타투숍을 가요. 제가 한국에서 운영하는 타투숍 고객도 60% 이상이 외국인인데, 한국에 여행 왔다가 기념하려고 문신을 새기는 이들도 많아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한국 아이를 입양하러 온 부부가 아이의 한국 이름 ‘현’을 각자 팔에 한글로 새긴 사례(맨 위 왼쪽 사진)도 있다고 정길준은 귀띔했다. 그들에겐 타투가 미적 표현이자 특별한 기억의 저장고인 셈이다.

국내에서도 타투 문화가 차츰 변화하고 있다. 패션타투나 레터링으로 시작한 사람들이 좀더 큰 문신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단순한 디자인에 알록달록 색깔이 들어가는 미국 전통 문신 올드스쿨이 최근 유행하고 있지만, 올드스쿨에서 파생된 뉴스쿨, 일본 전통 문신 이레즈미, 흑백사진 같은 블랙 앤 그레이, 직선과 곡선 위주의 트라이벌 등 다양한 장르를 찾는 이들이 느는 추세다. 반려동물이나 가족 얼굴을 새기는 이들도 있다.

한쪽에선 타투가 보편화되고 있지만, 한쪽에선 여전히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것도 사실이다. 레이지슬로우는 “영국에 머물 땐 동네 할머니가 내 타투를 보고 ‘예쁘다’며 말을 걸 정도로 자연스러웠는데, 한국에 오니 마트에 가거나 지하철만 타도 사람들이 쑥덕거리더라.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 만큼, 다름을 인정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타투 관련 법안이 없어 “문신도 의료인만 할 수 있는 의료행위”라는 판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도 세계적 흐름과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타투 문화가 더욱 자연스러워질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국회에선 타투를 양성화하는 법안 제정을 추진중이고, 정부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레이지슬로우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중장년층이 되면 우리도 외국처럼 타투가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잡을 거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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