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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짜리 창업지원사업을 포기하며

팀을 꾸리고 그 팀이 제품을 만드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창업지원사업이 지향해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무슨 창업교육이니 마케팅 지원사업이니 이런 잡다한 일에 창업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쏟게 만든다. 무슨 서류를 만들라고 시키고, 심지어는 해병대 캠프까지 가라고 하다니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싶을 정도다. 이런 건 사업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최소화해야 하는 부분인데, 정부지원사업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이런 걸 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게다가 무슨 보고는 그렇게 많은지 분기에 한번에 중간 평가, 멘토링, 최종 평가, 보고서 등등...

  • 김석준
  • 입력 2015.04.29 13:57
  • 수정 2015.06.29 14:12
ⓒGetty Images

창업 지원 사업의 최종 합격 발표는 일주일 전쯤 났고, 취직을 위한 면접도 그쯤 결정되었다. 딱히 취직 면접이 결정되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고, 물론 취직이 결정된 건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 즈음엔 지원 사업에서 빠질 것을 이미 결심한 뒤였다.

오늘 아침

27일 아침 9시반부터 OT가 있다고 해서 아침 7시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이미 결심은 내려져 있었으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서 일단 가보기로 했다. 1시간 반쯤 예상하고 집을 나섰는데, 여유 있게 움직이기도 했으나 거의 2시간이 걸리는 먼 곳이었다. 이곳을 매일 다녀야 하는 것이 지원사업의 조건이었는데 아마 며칠 못 버텼을 것 같다. 어쨋든 당연하듯이 이런 행사는 30분쯤은 연기되게 마련이고 늦게 도착하긴 했으나 행사는 아직 준비 중이었다. 명찰을 찾고, 출석부에 서명하고, 강당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코딩 연습이나 좀 하다가 가려고 했으나 관계자가 와서는 딴짓하지 말라며 핀잔을 준다. 짜증이 확 났다. 여기까지 온 것도 나는 나름대로 노력한 건데. 그래 그냥 집에나 가자. 담당 교수님께 사정과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나섰다. 지금은 집으로 가는 지하철이다.

왜 하려고 했었나?

4년 동안 A 라는 회사를 만들었었고, F 라는 팀을 만들었었다. M모 회사와 도움을 주고 받다가 일원이 되기도 했었다. 늘 스타트업과 벤처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년간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느꼈으며 지속가능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뭐 당연히 잘 안됐다. 어찌됐건 그간의 경험을 양분 삼아 마지막으로 스마트홈 멀티탭이라는 아이템으로 다시 한 번 지원을 받아보기 위해 늘 그렇듯 문서질을 했다. 결과는 좋았으나 "이걸 정말로 해야 하나? 그리고 이걸로 회사를 꾸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날 계속 고민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도 아이템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가치가 있는 회사로 성장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은 콘셉트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제품을 만드는 것은 어찌됐건 가능할 것 같으나,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우며 또한 돈도 많이 든다. 게다가 그 판매한 돈으로 회사를 꾸리고 운영해 가는 일은 앞서 언급한 모든 것들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걸 지금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은 나를 'No'라고 말하게 만들었다.

1억으로 안되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1억짜리 정부 창업지원사업은 사실 생각만큼 큰 돈이 아니다. 좀 분석을 해보자.

정부지원사업의 지원금 정책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항목으로 구성된다.

정부 현금 지원 : 70% / 창업자 현물 부담 : 20% / 창업자 현금 부담 : 10%

여기서 창업자의 현물 부담 20%는 창업자 자신의 인건비로 갈음하게 되니 실제로 창업자금은 8천만원 선으로 형성된다. 게다가 현금 부담 10% 1천만원을 빼면 실제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은 7천만원이다. 이건 대부분의 지원사업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R&D, 창업지원 등등 거의 같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그래도 7천만원, 내 돈 천만원 합쳐서 총 8천만원이니까 반씩 나눠서 개발하는데 4천, 마케팅하는데 4천 정도 하면 어? 이거 꽤 괜찮게 들린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 사업비는 각 항목별로 구성되는데 보통 제품 개발비는 총 금액의 50% 정도 선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근데 이것도 참 괜찮은 지원사업에서나 그렇지 그 미만인 경우가 훨씬 많다. 어쨌든 그렇게 보면 8천만원의 50%니까 최대 4천만원 정도 선으로 개발비를 쓸 수 있다는 거니 간단하게 생각한 거랑 비슷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이 사업의 경우 1천만원 이상의 아웃소싱 건이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말 매우 복잡하다. 법인이어야 하고, 업력이 몇 년 이상이어야 하며, 수많은 복잡한 서류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자. 한 회사의 입장에서 외주를 받을 때 4천만원짜리 사업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특히 업계에서 잘하는 회사라고 봤을 때 최소 2-3명이 6개월가량 투입되는 프로젝트에서 그 정도 예산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그런데, 무슨 절차가 엄청나게 복잡하고 증빙할 서류 또한 어마어마하다. S/W의 경우도 그런데 제조업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양산품 지원에 관련된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시제품만 만들고 속일 생각하지 말라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들을 하는 거 보면 이 지원사업의 목표가 도대체 뭔지 이제 좀 혼동스럽다.

결국 4천만원이라고 해야 부가세 빼고 뭐 빼고 하면 3천5백선으로 떨어지고, 그나마도 뭐 디자인이니 뭐니 하고 나면 진짜 쓸 수 있는 돈이 생각보다 훨씬 작다. 인건비도 지원되는 지원사업이니까 이 정도면 그야말로 양호한 수준이나, 그 인건비라는 것도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된 사람을 쓸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어떤 미친놈이 170~80만원 받으려고 아직 프로토타입도 못 만든 회사에 들어가겠는가? 결국 주위 사람 이름을 가져다 쓰고 돌려 쓰고 뭐 이런 짓거리를 하게 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결국 회사에 맡기기는 애매하고, 인건비를 돌리고 제작비를 돌리고 하는 과정에서 또한 10~20% 정도 돈은 날라간다. 그럼 남는 건 3천 남짓? 이걸로는 1년 대표 인건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걸로 뭘 만들겠다고? 순진하거나 영악하거나 둘 중 하나다. 즉, 망하거나 사기 치거나. 정부 사업에 헌터들이 들어오는 걸 막겠다고 무슨 규칙만 복잡해지는데, 그럴수록 지원금 헌터들은 환영하기 마련이다. 절차가 너무 복잡하니까 제대로 된 사람들은 지레 질려서 그만두고, 지원금 헌터 입장에선 규칙이 복잡하다 보니 그것만 잘 처리하면 우선 집중 감시 대상에서는 벗어나니 얼마나 좋겠는가?

제품을 만들었다면?

그래 우여곡절 끝에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 치자. 예를 들어 이 회사가 VC에서 투자를 받았다면, VC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제품이 잘 알려지고 판매되도록 함께 노력할 것이다. 근데 이 정부지원사업의 주체에서는 그럴 이유가 별로 없다. 공무원들 일을 안해서 그렇다고? 아니다. 내가 볼 때 이런 지원사업 운영하는 측에서는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컨설턴트도 고용하고 하는데, 수많은 지원 업체들의 판로까지 신경 써준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사실 공무원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다. 아니 이 지원사업 출신의 A라는 회사가 갑자기 성장해서 대기업이 되었다 치자. (그럴 리는 없지만서도) 그러면 이 공무원에게 어떤 이득이 갈까? 그렇지 않다. 뭐 고과에서 조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안정적인 직업을 택해서 오신 분들인데 사고만 안치면 꽤 괜찮은 연금을 제도가 기다리고 있는데, 자칫하면 형평성 문제도 생길 테고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다. A 회사에서 그때의 은혜를 높이 사서 경영진으로 영입... 할 리가 없잖나. 공무원이라는 입장상 해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는 말이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마케팅 비용(개발비의 30%나 되려나?), 제품 양산에 대한 커다란 부담, 작은 회사 제품에 관심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 장애물이 많아도 너무나 많다. 산 넘어 산인데 그 산이 에베레스트쯤 된다고 생각해봐라. 장비 없이는 도저히 올라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정부지원사업은 거기에 등산화 하나 정도 사준다고 보면 된다. 올라간다는 게 말이 안되는 건 아닌데, 경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거다. 같은 상황에서 VC라면 장비를 마련해주고 노련한 셀파 정도는 고용해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오르기 힘들다는 건 여전히 변하지 않지만, 출발점이 완전히 다르다.

시작부터 망해 있다

그러다보니 창업지원사업에 들어오는 업체들은 두 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1. 원래부터 하던 건데 지원금을 좀 받아보려고...

2. 지원금을 받아서 아이디어를 사업화해야지...

1번의 경우는 스타트업이라고 부르기가 좀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로컬 기반의 자영업, 일종의 외주성 업체인 경우가 많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스타트업은 아니더라도 창업지원사업의 과실을 가장 잘 누리게 된다. 그저 내가 하던 거에 돈이 1억 들던 걸 5천만원으로 줄여주는 그런 느낌? 그러다보니 대박이라고 까진 부르는 성과는 몰라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부터가 안정적인 회사였거든.

실제로는 2번이 70% 이상을 차지하는데 아이디어만 가지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가 기술자가 아니거나, 기술자라고 하더라도 제품을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한마디로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지원금의 대부분은 외주비용으로 소모하게 되고, 뭔가 이상한 물건이 나오긴 했는데 판매할 수 없는 상태이거나, 완성하지도 못하고 사업계획서만 줄창 쓰다가 지원 기간이 끝나고 만다. 그걸 지원사업 운영기관에서는 '양호' 하다는 표현을 쓴다. 망하긴 했는데, 돈은 잘 썼다는 말이다.

여러번 이런 경험을 직접 해보고, 또는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나니 창업지원사업의 취지가 궁금해진다. 진짜 이걸로 창업을 지원하려는 건지 아니면 국가에선 할 만큼 한다는 생색을 내려는 건지. 제품 개발도 제대로 안되는 회사에게 마케팅부터 가르치질 않나, 사업계획서를 수십백번 수정하게 독려하지 않나. 얼마 전엔 가치관 경영? 이런 말도 안되는 것도 하더라. 웃기는 소리지.

창업지원사업 왜 안되냐면

사업계획서를 잘 쓰고, 마케팅을 잘 하는 것, 가치관 경영 모두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회사에는 아직 제품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업의 첫걸음은 팀을 꾸리는 것이고, 그 두번째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스타트업이라고 부르는 회사들은 말이다.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회사는 결국 외주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회사에 투자할 VC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스타트업이라기보단 그냥 외주업체가 될 가능성이 높고 외주업체가 큰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국내의 수많은 SI 업체가 증명하고 있다.

팀을 꾸리고 그 팀이 제품을 만드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창업지원사업이 지향해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무슨 창업교육이니 마케팅 지원사업이니 이런 잡다한 일에 창업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쏟게 만든다. 무슨 서류를 만들라고 시키고, 심지어는 해병대 캠프까지 가라고 하다니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싶을 정도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바로 스타트업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건 사업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최소화해야 하는 부분인데, 정부지원사업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이런 걸 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게다가 무슨 보고는 그렇게 많은지 분기에 한번에 중간 평가, 멘토링, 최종 평가, 보고서 등등...

이해는 간다. 정부 입장에서 세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보니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꼭 필요한 일로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들이 사업의 성공을 가져올까? 좀 더 큰 금액은 어떨까? R&D 사업 같은 경우는 보통 금액이 연간 최소 5~6억을 호가하고, 3년 동안 집행한다. 결국 15억 정도를 지원하는 건데 역시 까다롭기 그지 없다. 그런 R&D 성과물이 어떻게 되었나? 차라리 예전 처럼 사업 평가가 허술할 때가 훨씬 연구 성과도 좋았다. 적어도 지금보단 나았다. R&D 거품 어쩌고 하는 소리가 최근에 나온다는 건 그 동안은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보여줬다는 것 아니겠는가?

정부지원사업의 취지라는 것이 벤처 활성화라든가 기술 개발이라든가 하는 타이틀을 표면적이라도 들고 나오는 것이 사실인데 이것을 실현은커녕 사업 자체를 진행하는 난이도가 너무 높다 보니 결국 지원금 사냥꾼만 달려들고, 정말로 의지는 있으나 규모는 작은 바로 그 지원이 필요한 중소기업에서는 지원 자격도 안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때려쳤다

창업지원사업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일까? 여러 번 직접 간접으로 겪은 바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안되는 돈이라고 신나게 설명했지만 그걸 다 쓰지도 못하는 것이다. 보통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진행되는 지원사업에서 10개월차쯤 가서는 지원 단체건 참여 기업이건 지원금을 다 쓰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제품은 나오지도 않는데 마케팅은 어떻게 할 것이며, 외주를 준 부분은 외주 업체 혹은 그 일을 맡긴 사람의 문제로 완성이 되지 않아 최종 납품이 연기되어 잔금을 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특허는 나오긴 했는데 기대한 것과는 달리 이걸 왜 했는지도 모르겠고, 예산은 분명 1억임에도 막상 쓴 돈은 그 반도 안되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국내 창업지원사업의 정체다. 큰 돈을 주는 것 같지만, 막상 쓰는 입장에선 이것저것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외주를 준다고 한들 영세 (소규모가 아니다) 업체에 싼 값에 맡기다 보니 퀄리티는커녕 의도한 대로 만들기조차 힘든 것이 사실이고, 인건비는 얼마 안되니 기껏 사람을 뽑아봐야 어중이 떠중이만 모여들 수밖에 없다. 좋은 팀을 가지고 하면 되지 않냐고? 그러면 투자를 받지 왜 굳이 지원 사업을 하나? 일주일의 교육기간 중 관계자였는지 강사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여튼 이런 말을 하더라.

여러분들은 여기 와있는 이상 우리가 매체에서 보는 스타트업과는 다른 길을 가고 계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열심히 배워서 자립하세요.

동감한다. 이미 창업지원 어쩌구에 들어와 있는 이상 굳이 등급을 따지자면 1등급은 아닌 거다. 조건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 물론 2등급이라고 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살아남는 것조차 어려운 벤처판에서 성공에 대한 기대값이 확률적으로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스타트업을 하고 싶다고? 좋은 팀을 만들어서 투자를 받아라. 그렇게 못하겠다고? 창업은 하지 마라.

스타트업은 꼭 창업을 해야 하나?

그렇다고 스타트업을 떠나고 싶진 않다. 대기업이 가진 자본력이나 인력 등이 필요한 규모의 일은 분명히 세상에 있을 것이다. 반대로 스타트업이 가진 유연성이나 활력이 필요한 분야도 역시 존재한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끌리는 사람인 것 같다. 아직도 해결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느낀다.

앞으로도 나는 이곳에서 열심히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겠지만, 적어도 창업을 통해서 할 생각은 없다. 취미로도 충분히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제품들도 만들 수 있으며(사실 대부분의 지속적인 벤처들은 이렇게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오픈소스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 또한 많이 있다. 언젠가 또 확신이 오고 좋은 팀이 만들어지면 다시 한 번 이 분야에 뛰어들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정부사업을 받아 창업하는 헌터가 되고 싶진 않다.

나는 그동안 헌터가 아니라고 자신해 왔으나, 뒤돌아 보면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아니 정부지원사업은 좋은 의도를 가진 스타트업 창업가들을 현상금 사냥꾼으로 만들고 있다. 기술도 없는 사람에게 덥석 돈을 던져주거나,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신용 보증이라는 수천만원의 빚을 만들도록 유도하거나, 제품도 없는 회사에게 마케팅비를 쓰게 하거나... 시작은 순수했으나 그 끝은 타락일지어다.

나는 세상을 조금 더 좋게 만들고 싶었지, 세금을 눈 먼 돈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스타트업을 하고 싶었지, 사업꾼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직하게 살고 싶었지, 결코 편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1억짜리 창업지원사업을 포기하고, 이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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