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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150만 아르메니아인이 체계적으로 살해됐다. 그런데 아직도 ‘집단 학살'로 인정되지 않는다

  • 김도훈
  • 입력 2015.04.27 13:23
  • 수정 2015.05.01 07:31
Armenian youth hold images from the Armenian genocide during a demonstration  in front of the Turkish consulate to commemorate the 100th anniversary, in Jerusalem, Israel, Friday, April 24, 2015. Historians estimate up to 1.5 million Armenians were killed by Ottoman Turks around the time of World War I, an event widely viewed by genocide scholars as the first genocide of the 20th century. Turkey, however, denies the deaths constituted genocide, saying the toll has been inflated and that those ki
Armenian youth hold images from the Armenian genocide during a demonstration in front of the Turkish consulate to commemorate the 100th anniversary, in Jerusalem, Israel, Friday, April 24, 2015. Historians estimate up to 1.5 million Armenians were killed by Ottoman Turks around the time of World War I, an event widely viewed by genocide scholars as the first genocide of the 20th century. Turkey, however, denies the deaths constituted genocide, saying the toll has been inflated and that those ki ⓒASSOCIATED PRESS

1915년 4월 24일. 오스만 제국 정부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리던 이스탄불에 살던 아르메니아 출신 시인 다니엘 바루안을 비롯해 200명의 지식인들을 체포했다. 붕괴 직전에 봉착한 오스만 제국에게는 아르메니아 커뮤니티의 중점 역할을 하는 시인, 화가, 작가, 서점 주인, 정치인 등이 위험 요소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대부분의 아르메니아 출신 기독교인들이 러시아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거의 살해됐다. 몇 사람의 행동이 무고한 집단 희생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직도 많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시리아 사막으로 추방되기 시작한 그 해 8월, 바르안이 고문에 못 이겨 죽었다고 당시의 목격자들은 말했다. 수많은 남자, 여자, 어린이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세계 각지의 아르메니아 출신 사람들이 지난 주 이스탄불에 모여 150만 명의 죽음을 초래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 미국과 터키를 비롯한 몇 개 국은 이 사건을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 기념했다. 100년이 지났지만 당시 사건은 아직도 지정학적인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아래는 그때 비극에 관한 놀라운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죽은 아르메니아인들

1,500,000

1915년에서 1917년 사이에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 숫자.

"강간과 구타는 너무도 흔한 일이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책을 쓴 퓰리처 수상 역사학자 데이비드 프롬킨은 그의 저서 ‘모든 평화에 막을 내릴 평화(A Peace to End All Peace)’에 이렇게 적었다. “즉시 처형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 식량, 물, 피신처도 없이 산으로 또 사막으로 추방됐다.”

어린 시절에 자기가 아르메니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이스탄불의 한 남자는 부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허핑턴포스트에 이야기 했다. 시리아를 향해 사막을 가로질러 끌려가던 할아버지가 너무나 지쳐서 더 못 걷겠다고 했다. 익사를 하는 것이 더 걷다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오스만 군인에게 호소하자 오스만 군인은 그가 죽을 때까지 머리를 물에 쳐넣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가족들은 모두가 그런 비극의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250

1915년 4월 24일에 오스만 정부가 이스탄불에서 체포한 당대 아르메니아 엘리트의 숫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체포와, 추방, 학살이 시작됐고, 대다수는 나중에 추방 또는 살해됐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매년 4월 24일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기념한다.

이스탄불의 어느 서점 주인은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빵점을 하던 자신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지성인들, 즉 최고 엘리트들을 끌고 갔다. 몸은 남기고 머리만 회수해 갔다.”

오스만 제국군에서 집단 살해당한 아르메니아인들

60,000

당시 알레포에 파견됐던 미국 영사 제시 B. 잭슨에 의하면 1916년에 시리아 북방에 위치한 마스카나에서 6만 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는 당시 워싱턴에 "2백-3백 명씩 파묻힌 무덤이 끝도 없이 널려있다."는 전보를 보냈다.

300,000

1,500,000이라는 희생자의 숫자를 맹렬하게 부인하는 터키가 당시 전쟁과 질병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아르메니아인 숫자.

터키 정부가 검열한 터기 고등학교 역사책에는 "분석 결과 약 300,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전쟁과 질병으로 인해 죽었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아르메니아인들은 600,000명의 터키인을 죽였고 500,000명을 보금자리에서 밀어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1주년을 추도하는 아르메니아인들

2,133,190

미네소타 대학 대학살 센터에 의하면 1914년도 이전에는 모두 2,133,190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제국에 거주했다.

387,800

오스만 제국에 1922년까지 남아있던 아르메니아인 숫자.

20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국가 숫자. 그러나 이 목록에 미국과 이스라엘은 없으며, 대학살 백 주년을 맞은 현재, 당시 오스만 제국의 행위를 대학살로 지명할 것인가 고민하는 국가도 많다. 독일은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살 지명을 공식화했다.

당시 뉴욕 타임즈에 실린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사

오스만 제국을 열렬하게 옹호하는 터키에게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특히 매우 격한 논란의 소재다.

만약 오바마 대통령이 당시 사건을 대학살로 지명할 경우,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미국-터키 관계가 더 악화될 수 있다. 미국은 시리아와 가까운 터키 요지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 터키 정부는 시리아 분쟁 문제로 여러 차례 충돌했다. 미국은 IS 극단주의자만 겨냥하고 있는 반면 터키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1,700,000이 넘는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터키가 극단주의자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시리아를 왕래하는 것을 차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힐책했다.

"백악관은 잘못된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g(대학살- genocide 의 g)’ 단어를 사용하길 원치 않습니다."

위 문장은 당시의 살해를 대학살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압력에 대한 백악관의 입장이다. 대학살이라는 단어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를 “해당 지역의 보다 중요한 사안들” 때문이라며, 미국 정부는 “솔직하고 전폭적인 사실 인정”을 권고하겠다고 성명으로 밝혔다.

학살 100 주년 기념일을 맞아 오바마 대통령이 역사를 올바로 지적할 거라 기대했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을 비롯한 전 세계의 아르메니아인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는 대통령 당선 전에는 아르메니아 사건을 대학살이라고 불렀었다.

터키 국기를 불태우는 아르메니아인들

터키 정부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1915년 사건을 ‘대학살’이라고 공식적으로 지목하는 순간 발생할 배상금의 지불이다.

친정부적인 터키 일간지 데일리 사바(Daily Sabah)에 어느 기고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대학살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와 현재 터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후손들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터키의 땅을 정복하려는 의도에서 고안한 속임수"라고 말이다.

작년, 터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살해된 아르메니아인 후손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중재적 자세를 취해서 환영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다시 터키와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의 나쁜 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아르메니아를 방문해 대학살을 추도한 아르메니아계 킴 카다시안

현재 터키는 대학살을 또다시 거세게 부인하고 나섰는데, 특히 당시의 사태를 체계적인 대학살이라고 간주하는 교황과 유럽 국가들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초 “악을 계속 숨기거나 부인하는 것은 피가 나도 붕대를 안 감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며, 당시의 살해 사건이 20세기 첫 번째 대학살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터키 정부는 교황청에 파견된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1915년 사건을 대학살이라고 지정하겠다는 EU의 4월 15일 결정에도 불구하고 대학살에 관한 논쟁을 아예 묵살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그는 오스트리아 파견 대사를 소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터키 정부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전쟁과 질병과 당대의 혼돈으로 인해 일부 아르메니아인이 죽은 것은 인정하지만, 아르메니아인만 체계적으로 제거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므로 대학살이라는 용어를 쓰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에 그런 얼룩, 즉, ‘대학살’이라는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의 100 Years Ago, 1.5 Million Christian Armenians Were Systematically Killed. Today, It's Still Not A 'Genocide'를 번역, 가공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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