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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었소' 제3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1% 조롱하는 한옥 누마루

  • 강병진
  • 입력 2015.04.27 09:25
  • 수정 2015.04.27 09:28

“대대손손 부자로 살아온 거야. 일제 강점기 때는 친일하고 미군정 때는 부역하고 지금은 극보수로 사는, 뭐 그런 기득권층. 난 졸부들과는 격이 달라, 그런 자만심이 있는 거지.”

<에스비에스>의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화제를 모으는 한정호(유준상)의 집은 안판석 피디의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안판석 피디는 시놉시스와 대본 초반부가 나온 뒤 <밀회>(제이티비시·2014)에서 함께 작업한 이철호 미술감독을 찾아가 구상한 남자 주인공의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세트로 표현이 가능할까?” 한옥을 양옥이 품은 독특한 구조는 이철호 미술감독이 장고 끝에 내놓은 ‘명품 해답’이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한옥을 현대 건축물로 감싼 독특한 구조의 한정호 집 세트가 화제를 모은다. 아래를 내려다보게 만든 한옥의 누마루는 한정호 부부의 권위의식과 속물근성이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공간.

한정호는 풍문으로 들었으려나…저 누마루가 조롱 무대라는 걸

대한민국 1% 상류층의 속물의식을 풍자하는 <풍문으로 들었소>는 세트만 봐도 드라마의 주제와 색깔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한정호 부부가 거주하는 한옥 공간에서 양옥풍 다른 공간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는 구조는 선대부터 기득권층으로 살아온 이 부부의 권위의식을 드러낸다. 한옥 공간은 또한 집안 가운데 무대처럼 솟아 있어, 이 집의 고용인들이 주인의 사생활을 수시로 지켜보며 숙덕대는 해학적 풍자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21일 서울 서교동의 작업실에서 만난 이철호 미술감독은 “한정호 가문이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면, 가족이 살던 한옥 집을 옮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통해 계급차이를 보여주고, 공간을 통해 풍자와 해학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관부터 길게 뻗은 복도는 서봄네 집의 좁은 복도와 대비된다.

■ 누마루부터 복도까지…공간의 계급화

<풍문으로 들었소> 세트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800평에 이르는 터에 200~300평의 컨테이너 세 동 안에 한정호의 집과 지영라(백지연)의 집, 로펌 등의 내부를 지었다. 한옥의 마당 자리가 거실과 식당이 되고 기와지붕을 현대식 천장으로 덮은 한정호의 집은 180평으로 세트 공사 기간만 한달 걸렸다. 기획까지 더하면 두달이다. 소품비까지 전체 미술비만 7억5000만원이 들었다. 보통 미니시리즈의 미술비는 5억~6억원 정도다.

서봄(고아성)의 집은 영등포 지역의 실제 집을 참고했는데, 한정호 집은 미술감독의 독창적 아이디어라고 한다. 180평이지만, 여느 드라마의 재벌집처럼 탁 트여 있지 않고 10여개의 공간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마치 조선시대 정승집처럼 ‘하인’들을 거느리고 사는 부부의 공간인 한옥이 보모, 집사의 방 등과 대조·대비되면서 공간만으로도 계층 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한정호가 양쪽 문을 와락 열고 들어가는 현관부터 권위를 물씬 풍긴다. 한옥의 누마루는 한정호 부부의 속물근성이자 권위의식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다. 이철호 감독은 “한정호가 인사를 하러 온 사돈을 거실이 아닌 누각에서 대접한 것도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계급 간 차이를 보여주려고 특히 신경을 쓴 공간이 복도다. 복도는 가난한 서봄의 집에도, 한정호의 집에도 있다. 한정호 집 복도는 현관부터 한옥의 내부까지 이어진다. 한정호가 집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긴 복도를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에서 가슴 가득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반대로 봄의 집은 발만 뻗으면 방과 부엌이 닿을 듯한 좁은 공간을 복도가 칸칸이 나눠놓으면서 쪽방촌을 연상시킨다. 이철호 감독은 “복도를 대비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드러내는 효과를 기대했다”고 한다. 봄의 아빠가 한정호의 집 복도에서 길을 잃는 장면은 두 집의 공간감을 극명히 대비시킨다. 현관처럼 높은 문이 특징인 이 집에서 주방으로 통하는 쪽문만 낮고 좁게 만든 이유도 어차피 일하는 사람들만 다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상류층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이 결국은 그들을 조롱하는 무대가 된다는 것이다. 한정호 부부는 양옥이 한옥을 감싼 이 특별한 집이 자신들의 지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하지만, 방음이라고는 전혀 되지 않을 것 같은 한옥의 생활은 오히려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듯 까발려지게 하는 구실을 한다.

이철호 미술감독

■ 공간 효과 극대화하려고 피피엘도 거부

“세트는 이야기를 짓는 것”이라는 이철호 미술감독은 드라마에서 공간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썼다. 한옥의 지붕도 무게감을 주고 싶어 진짜 기와를 올리고 서까래도 진짜 나무로 만들었다. 보통의 드라마에서는 플라스틱을 사용한다. 주방으로 통하는 쪽문 가는 길에 장독대를 배치한 것도 “문을 테이블로 사용하는 과감한 발상을 외국 잡지에서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세트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무리한 피피엘도 하지 않았다. 찬찬히 뜯어보면 액자나 소품들도 고가가 아니다. 한정호의 집에 있는 고미술품은 인사동 등에서 구입하거나 대여해 조명 등의 효과로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했다. 소파 등 가구를 제외하면 협찬을 위해 끼워 맞춘 소품은 없다. 누마루 아래 있는 오디오세트도 “제작진이 가져온 억단위의 협찬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소품팀이 발품을 판 끝에 고급 한옥에 어울리는 고풍스런 오디오를 찾아냈다. 이철호 감독은 “세트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며 “세트가 드라마 완성도를 높이려면 피피엘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소품을 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렇게 공들인 공간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세트 디자인이 완성된 뒤 안판석 피디와 정성주 작가, 미술감독이 모여 공간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고, 어떤 삶이 있을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공간을 눈에 담아 간 작가는 공간마다 적절한 대사와 상황을 설정하며 풍자와 해학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봄이 아빠의 화장실 수리 장면은 이철호 감독과 안판석 피디의 절묘한 호흡을 보여준다. 이철호 감독은 봄의 가난한 형편에 맞게 화장실을 좁게 만들었다. “연출자 중에는 촬영이 편하도록 한쪽 벽면을 뜯어내거나 화장실을 넓히라고 하는데, 안판석 감독은 변기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촬영해 리얼리티를 살렸다”고 한다.

봄이 집의 가난한 형편을 드러낸 화장실

■ ‘풍문…’을 통한 미술감독의 관심 증가

<풍문으로 들었소>를 계기로 미술감독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1990년 <한국방송>에 입사해 처음 드라마 미술에 발을 디딘 이철호 감독은 경력만 25년이다. 지금껏 드라마와 영화 제작에 100편 가까이 참여하며 앞선 시도로 한국 드라마의 세트 변천사를 이끌었다. 드라마 세트는 보통 천장을 뚫어놓았는데, 그는 1995년 드라마 <재즈>(에스비에스)에서 분수대를 설치하느라 처음으로 천장을 덮었다. 1996년 <8월의 신부>(에스비에스)에서는 400평 스튜디오에 큼지막한 연못까지 들였다. 미술감독이 의상이나 외부촬영장소까지 책임지는 미국 등과 달리 우리는 주로 세트와 소품에 국한되어 있는 편이다. 드라마 편당 5000만원 남짓으로 대가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세트를 상품화하지 못하고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것”도 그는 아쉽다. “드라마 세트가 디즈니랜드처럼 테마파크화되는 게 꿈”이라는 그는 지금은 <후아유>(한국방송2)의 이야기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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