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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음식

"닭발집이 제일 잘되는 데가 어딘 줄 알아? 여기 같은 유흥가야. 이 동네서 일하는 여자들이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잖아." 그녀들은 피곤하고 속상한 마음을 쥐어뜯듯이, 매운 닭발을 물어뜯으며 해장의 새벽을 맞이하는가보다. 자학은 상처의 딱지를 뜯어내듯이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것이다. 유흥가에 손님이 제일 많은 금요일이 저물면 닭발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리하여, 차가운 소주 병마개를 비틀어 식도에 붓고 매운 닭발을 연골까지 아득아득 씹는다.

  • 박찬일
  • 입력 2015.04.22 11:13
  • 수정 2015.06.22 14:12
ⓒ한겨레

아마도 내 최초의 요리는 마늘 까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통마늘을 물에 넣고 조각으로 나눈 후 하나씩 무딘 과도로 껍질을 벗겨내면서 요리에 참여했다. 마늘 속껍질이 애를 먹여서 손톱으로 벗기다보면 다음 날까지도 손톱 밑에 알싸한 마늘향이 남았다. 요즘은 블렌더로 손쉽게 갈아버리지만, 옛날에 김장이라도 할라치면 마늘을 절구에 넣고 빻는 건 남자들 일이었다. 매운 기운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청량한 초겨울 하늘이 스크린처럼 걸려 있었던 마당의 기억들.

이딸리아에서 요리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의 시연 시간은 자못 기대되는 순간이었는데, 학구열이랑은 담을 쌓은 내가 개과천선해서는 아니었다. 오직 요리에 넣는 마늘을 챙겨 먹을 속셈이었으니, 무슨 소리냐면 이딸리아 요리에 마늘을 쓰는 법이 생각과 달라서 생기는 일이었다. 우리는 빠스따를 할 때 마늘을 저미거나 으깨 넣고 그대로 접시에 담는다. 그러나 이딸리아에선 향만 우려낸 후 여지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던 것이었다. 올리브유에 고소하게 지진 향기로운 마늘! 그걸 버린다는 게 죄악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마늘에 굶주린 나의 허기를 채워주었던 것이다. 아니, 어떤 인간이 이딸리아는 마늘 많이 쓴다고 뻥을 친 거야, 뭐 이러면서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딸리아는 마늘을 요리에 많이 쓰기는 하지만 슬쩍 향만 날까 말까 할 정도만 쓴다. 내가 일하던 이딸리아 식당에서도 마늘 한상자를 사면 한달이나 두달을 좋이 버티곤 했다.

또스까나에 가면 간혹 마늘절임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식초와 소금물에 오래 담가 매운맛이 거의 완벽하게 빠지고 마늘의 향만 남아 있다. 그것 말고 마늘요리라고 부를 무엇은 참 드물다. 마늘은 요리의 맛을 돋워주고 나쁜 냄새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주재료의 맛을 반감시킨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마늘 신봉자인 한국인이 보기에는 쓰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몇몇 이딸리아식 식당에서 마늘 잔뜩 들어간 요리를 드시고 현지에서 비슷한 걸 찾으신다면, 장담컨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련다. 생마늘을 달라고 해서 가져간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면, 그들은 왕방울만 하게 눈을 뜨고 몬도가네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을 게 틀림없다.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서양에서 요리에 마늘을 좀 쓰는 나라는 오히려 스페인이다. 특히나 생마늘은 이딸리아에선 절대 먹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혹시 어느 마늘광이 토마토쏘스에 생마늘을 찍어 하루에 열통씩 우적우적 먹을지도 모르긴 하지만.스페인에선 빵에 으깨어 바르는 식으로 즐긴다. 빤 꼰 또마떼(pan con tomate)라는 요리는 태우듯 잘 구운 빵에 마늘을 으깨 바르고 역시 잘 익은 생토마토를 처바르는 것으로 맛을 낸다. 이거,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데, 이딸리아에선 이런 식으로 생마늘 자학극을 벌이지는 않는다.

이딸리아 도시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서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하는 법이 있다. 입성도 다르지만, 무엇보다 냄새가 완연히 다르다. 서양인들은 구별하지 못하겠지만 우리 코는 분명히 구별해내고 만다. 한국인은 마늘 냄새, 중국인은 파 냄새다. 일본인은 무슨 냄새가 날까. 글쎄, 아마도 구찌와 프라다 냄새가 나겠지. 물론 요즘 중국인들이 파 대신 황금을 먹고, 면세점의 명품을 쓸어대는 것을 보면 이제 이런 말도 틀린 듯하다.

요새 마늘은 내가 어려서 깠던 것처럼 힘들여 물에 담가 불리고 손톱을 쓸 필요가 없다. 알뜰하고 깨끗하게 벗겨져 비닐 포장으로 팔리기 때문이다. 다지는 수고도 귀찮으니 아예 다진 마늘도 나온다. 언제부터인가 깐 마늘의 덩치가 유별나게 통통하고 커진 것도 큰 변화다. 버선코처럼 날렵하고 초승달처럼 예쁜 그 육쪽마늘이 아닌 것이다. 마늘 서너쪽으로 4인 가족 된장찌개와 겉절이를 하고도 남을 만큼 크다. 알싸하고 매우면서 톡 쏘는 향 대신 마치 양파향을 넣은 감자를 씹는 것 같다. 감자와 교배를 한 걸까, 아니면 근육강화제라도 맞힌 걸까. 벤 존슨과 배리 본즈에게 물어봐야 할까. 작고 예쁜 마늘이 어떤 종자인가 싶어 채소상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그냥 대중소예요. 크기로 분류할 뿐이죠"였다.

마늘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민족의 어떤 영적 기운에 기여하는 향신료라고들 믿는다. 고추장과 마늘 먹고 금메달 땄다, 뭐 이런 제목의 기사도 심심찮게 나온다. 마늘환이며 마늘 '엑기스'와 마늘 농축액이 건강식품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에 취재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린츠라는 도시에 한국의 축구 국가대표 강철, 최성용 선수가 뛰고 있었다. 최 선수 댁에서 밥을 한끼 얻어먹었다(감사합니다!). 그때 김치가 맛있다고 하자, 최 선수 아버님이 부엌에서 마늘을 가져와서 내게 보여주셨다.

"이게 터키산인데 독일까지 가서 힘들게 구한 거라오. 마늘이 좋아야 김치가 맛있고, 애들도 힘차게 뛰지."

과연 골이 깊고 묵직하여 썩 맛 좋은 육쪽마늘처럼 보였다. 마늘은, 아버님에게는 아들이 90분을 줄기차게 뛸 수 있는 힘을 주는 영약이었던 것이다. 마늘 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최 선수는 그 프로팀에서 주전으로 잘 뛰다가 금의환향했다. 그 아버님은 요즘도 아들을 위해 좋은 마늘을 구하러 다니시는지 모르겠다.

마늘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로서는 고통스러운 경험도 많다. 특히 '을지로 골뱅이'로 통칭되는 저동식 골뱅이 요리 말이다. 매운 고춧가루도 모자라 간 마늘을 서너숟가락 듬뿍 얹어준다. 위에 폭탄을 쏟아붓는 것 같은 격렬한 통증을 유발한다. 그게 맛이 좋은지 어떤지를 떠나서 후후, 입을 불며 속을 쓸어내리느라 연신 차가운 맥주만 들이켜게 된다는 게 문제다. 음, 그러고 보니 맥주 판매를 늘리기 위한 마늘의 대량 투입? 사실이 아니겠지만 혹시 이 글을 읽으신다면 저동식 골뱅이집 사장님들, 마늘 좀 줄여주시길 간곡히 바란다. 그것은 아마도 통증으로 얻는 자학적 쾌감, 엔도르핀이나 도파민 같은 것일 게다. 그렇다면 저동 골뱅이집 사장님은 도시 뒷골목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벼운 우울증은 엔도르핀의 분비를 통해 치유가 가능하다'고 어떤 매운 닭발집에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 우울증이 닭발처럼 흔해졌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프로작, 자낙스, 렉사 같은 약물 이름들이 닭발 메뉴에 겹쳐 보였다. 매운 닭발, 덜 매운 닭발, 폭탄 닭발.주의: 방분방뇨할 위험이 있으니 임산부나 노약자는 섭취를 삼가시오.

친구는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입가에 붉은 쏘스를 묻히며 닭발을 뜯었다. 유명한 논현동의 뒷골목이었다.

"닭발집이 제일 잘되는 데가 어딘 줄 알아? 여기 같은 유흥가야. 이 동네서 일하는 여자들이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잖아."

그녀들은 피곤하고 속상한 마음을 쥐어뜯듯이, 매운 닭발을 물어뜯으며 해장의 새벽을 맞이하는가보다. 자학은 상처의 딱지를 뜯어내듯이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것이다. 유흥가에 손님이 제일 많은 금요일이 저물면 닭발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리하여, 차가운 소주 병마개를 비틀어 식도에 붓고 매운 닭발을 연골까지 아득아득 씹는다.

메아 꿀빠, 메아 꿀빠, 메아 막시마 꿀빠(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죄 탓이오...... 이 경건하고 소박한 종교적 통회(痛悔)는 모든 인간의 번민과 세속의 욕망에 대못을 박는다. 가슴을 치며 이 구절이 들어간 기도문을 외웠던 이라면 가시면류관의 자기희생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여 종교적 성취를 간구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가죽 채찍으로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며 원죄의 속죄를 소원하였다. 소박한 종교적 반성에서 시작한 이 채찍질 고행단은 이내 피학증의 이상 현상에 휘말려 미친 듯 인기를 끌게 된다. 그리하여 교회의 권위가 통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교회의 말씀보다 '순회공연'을 온 채찍질 고행단을 뒤따르는 이들이 크게 늘었고, 교회는 고행단의 활동을 금지했다.

"지금 서울은 마치 모두들 고행단이 된 것 같아."

친구가 닭발을 다 뜯고, 차가운 소주로 입을 헹궜다. 그의 입술이 자극을 받아 붉게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잔뜩 흘린 땀으로 셔츠 안쪽의 내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하아' 하고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신음 소리를 짧게 냈다. 용광로로 천천히 잠겨 들어가던 터미네이터의 기계손을 닮은 닭발이 숯불에 익으면서 탁탁, 소리를 냈다. 누군가는 저런 손으로 어린 인턴의 엉덩이를 쥐었을 것이다. 닭 발바닥의 폭신한 부분을 잘근잘근 씹었다. 미뢰를 마비시키는 엄청난 자극이 혀에 마구 퍼졌다. 소주를 털어넣고 한참이 지나자,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엔도르핀인지 도파민인지 하여간 무엇이 나오는 중이군,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하하, 내일 아침 화장실에서 기막힌 2차 자극을 느껴보라구."

사람들은 마치 채찍질을 하듯 매운맛을 갈구한다. 누구는 매운맛이야말로 저강도의 마약이라고까지 말한다. 맵기로 말하자면 인도나 멕시코의 고추를 빼놓을 수 없겠다. 매운맛을 재는 단위로 보아 한국 청양고추의 수십배 수백배의 고추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 동네 고추가 팔자에 없게 한국의 김장용으로 쓰인 일도 있었다. 내 '국민학교' 시절, 이 나라는 이른바 '고추 파동'을 겪었다. 돌림병으로 고추 작황이 바닥을 기록했고, 김장 외에 별다른 반찬거리가 없던 그 시절 서민들의 민심은 최악이었다.

흑백텔레비전 뉴스 속의 이득렬 앵커가.이득렬이 아닐 수도 있다. 수입 고추가 배급된다는 소식을 알렸다. 뉴스는 연이어 '배급딱지' 뒷거래 같은 추문을 보도했지만, 그 고추로 김장을 담근 사람들의 분노까지는 전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로 '김치가 써서 먹을 수가 없다'고 울상을 지으셨다. 한국 고추는 단맛을 같이 품고 있어서 김치를 담그면 달큼하고 기분 좋은 매운맛을 낸다. 그러나 오직 매운 성분 - 그걸 캡사이신이라고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 뿐인 수입 고추로 담근 김치는 고통스러운 자극만 남겼다. 고추라고 다 같은 고추가 아니었다. 짧고 통통하며 검정색에 가까운 그 고추들은 마치 정체불명의 외래종처럼 공포감까지 불러왔다. 봄이 되기도 전, 그해의 도시 변두리 마을의 더러운 개천에는 검붉은색의 김장 김치 포기들이 굴러다녔다. 먹을 수 없으니 사람들은 버렸다.

매운맛은 자학의 음식이다. 제 상처를 건드려 쾌감을 얻는. 아마도 인간만이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자학의 음식을 즐길 것이다. 오래전, 중국 쓰촨에서도 그랬다. 쓰촨은 중국음식의 매운맛을 전설로 간직하고 있는 땅이다. 척박하고 추운 대륙의 땅 쓰촨은 매운 음식이라도 먹어야 그 매서운 추위와 여름의 혹독한 더위를 견뎌낸다고 한다. 차오라자오(炒辣椒), 그러니까 매운 고추볶음은 쓰촨식 고추요리의 정점이다. 오직 고추를 볶은, 고추를 위한, 고추에 의한 요리다. 고추가 다른 재료를 북돋우는 양념이 아니라 재료의 전부인 이 기막힌 요리를 상상해보시라. 그걸 먹고 치킨집 앞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쓰촨 고추는 자그마하고 야물딱지게 생겨먹었다. 그 고추를 오직 기름에 볶아 내준다. 쓰촨 사람들은 그 고추를 마구 집어 먹는다. 소금을 뒤집어써서 짭짤하지만, 이내 격렬한 통증이 혀를 조인다. 위가 홧홧해지면 다시 열심히 젓가락으로 그 고추를 집어 입에 넣는다. 그리하여, 대책 없는 쓰촨의 기후와 환경에 한판 붙어보는 것이다.

매운 게 꼭 고추만은 아니다. 통각을 일으키는 여러 재료 가운데 산초 같은 것도 있고, 전통적인 마늘도 있다. 마늘의 매운맛은 고추와는 또다르다. 천천히 혀와 위를 조인다. 그리고 그 특유의 휘발성으로 코를 자욱하게 포위한다. 비강을 마비시킨다. 서울 저동의 골뱅이집들은 마늘 매운맛의 절정을 보여준다. 소박한 인쇄골목 사람들은 차가운 병맥주에 마늘 맛 골뱅이를 입에 넣으며 고단한 일상을 정리한다. 기계로 성의 없게 다진 엄청난 양의 마늘이 골뱅이 위에 척 하니 얹히면서 저동식 골뱅이의 형식을 만든다. 곱게 간 고춧가루와 생마늘 다짐이 달짝지근한 통조림 골뱅이 양념국물에 비벼지면서 만들어내는 맛이다. 여기에 이젠 북어포나 대구포 대신 쥐치포를 얹지만, 그래도 저동 골뱅이의 한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 건 저 놀라운 생마늘 폭탄 덕분일지도 모른다. 나도 가끔 들러서 먹는 저동식 골뱅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미 속이 쓰려온다. 그것은 놀랍게도 침을 고이게 만든다. 묘한 일이다. 통각과 미각의 은밀한 내통일지도.

때로 매운맛의 자학극은 가능한 모든 재료를 동원하기도 한다. 매운 풋고추에 고추장을 찍어 먹는 한국인다운 다양한 요리가 모두 등장한다. 김치찌개에 풋고추와 다진 마늘은 물론 고춧가루까지 넣어 먹는 한국인의 매운맛에 대한 무심한 몰두를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외국인은 이 매운 종합선물세트에 한가지를 더 발견하곤 한다. 그 찌개를 상 위에 올려놓고 펄펄 끓여가면서 입천장이 홀랑 벗겨지도록, 잇몸이 화상을 입도록 뜨거울 때 먹는 행위다. 내 일본인 친구가 딱 그랬다. 그이는 고춧가루나 마늘보다 뜨거운 찌개가 더 무서웠노라고 고백한다.

"일본에서도 상 위에 화로를 놓고 찌개를 먹지만, 어디까지나 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한국처럼 찌개를 끓이지는 않죠."

그러면서 그이는 '한국인은 섭씨 100도씨'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You are what you eat(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

언젠가 뉴질랜드의 기념품점에 붙어 있던 돼지 모양 인형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글귀가 생각난 건, 아마도 내 몸은 고추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니, 내 주위의 한국인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당신은?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뜨거운 한 입>(창비, 2014)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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