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정권을 무너뜨린 어느 고등학생의 죽음

실종 27일째 되던 날 마산 앞 바다에서 김주열 열사는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의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어른들은 그저 다 그런거지 하고 체념하였던 부정선거에 순수한 한 고등학생이 항의하다가 경찰에 의해 그렇게 참혹하게 죽은 다음 차가운 물속에서 오랫동안 수장되어 있다가 이렇게 인양되자 12년간 이승만 독재에 눌렸던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그로부터 열흘도 안 되어 4.19가 터졌고 이승만은 보름 남짓 후인 4월 26일에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다. '실종'된 한 고등학생과 그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애타게 바라던 어머니의 심정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참히 짓밟았던 정권의 업보였을까? 잔인한 계절 4월에 이 땅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청춘들의 명복을 빈다.

  • 바베르크
  • 입력 2015.04.19 08:14
  • 수정 2015.06.19 14:12

영국시인 T.S. 엘리엇(T.S. Eliot)은 그의 장시(長詩) "황무지(The Wasste Land)"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했었다. 아마도 그는 1922년에 발표된 이 시에서 그 보다 세 해 전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희생된 숱한 젊은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 현대사 속에서도 작년의 끔찍한 사고가 있기도 전에 이미 4월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과 시민들의 선혈의 기억이 있는 미완의 4.19 혁명 때문에 잔인한 계절이었다. 4.19 혁명 55주년을 맞아 그 도화선이 된 사건을 살펴 보기로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은 1960년 3월 15일에서 치러진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어처구니없는 부정(不正)을 저질렀다(3.15 부정선거). 선거부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당시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내무부(나중에 안전;행정부라는 이름도 한 때 지녔던 부서)장관 최인규는 유권자들이 투표도 하기 전에 이미 투표함에 여당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을 찍은 '표'를 가득 넣어 두었으며 어떤 투표구에서는 그 투표구의 유권자수보다도 더 많은 '표'가 나오기도 했다. 자유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짝을 짓게 하여 단체로 투표를 하게도 하였다.

이런 가공할 부정선거는 당연히 당시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북한이 남침한 6.25 때 안심하라는 녹음방송을 틀어놓고서는 이승만 본인은 먼저 내빼고, 당시 한강에서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 인도교까지 폭파시키고는, 나중에는 자신의 녹음방송을 믿고 탈출 못한 서울시민들을 적에 동조했다며 처벌한, 뻔뻔한 독재자 이승만이 그런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있다고 한들 눈 하나 깜짝할 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당초에는 선거 전에는 대구의 고등학생들, 선거 후에는 마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는 점차 잦아 들었던 것이 이승만에 대항하는 대안세력이 되어야 할 당시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조병옥(현 조선일보 독자권익위원장 조순형님의 부친)님이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투병 중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 4년 전 민주당 대선후보인 신익희님도 선거유세 중에 급서했음-_-;) 어차피 부정이 없어도 이승만이 당선될 것이라는 체념이 당시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여당인 자유당은 이승만의 경쟁자인 조병옥님의 사망으로 일종의 부전승 내지는 사실상의 무투표 당선이 가능한 대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부정선거를 저지른 셈이다. 이는 제1공화국 당시에 대통령과 따로 뽑았던 부통령에 여당 후보인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부분은 부통령제가 있는 현재의 미국의 상황과 비교해서 조금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는 각당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가 이른바 티켓(ticket)이라고 칭해지듯이 한묶음으로 투표용지에 나와서(민주당 대통령 버락 오바마-부통령 조 바이든, 공화당 밋 롬니-폴 라이언) 유권자들은 정부통령을 한꺼번에 뽑는다. 그러나 우리 헌정사상 유일하게 부통령 제도가 있었던 제1공화국 때에는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따로 뽑고(대통령 후보 자유당 이승만, 민주당 신익희, 진보당 조봉암), 부통령도 따로 뽑는(부통령 후보 자유당 이기붕, 민주당 장면, 진보당 박기출) 방식이었다. 제1공화국 당시 유권자들은 예컨대 1956년과 1960년 대선에서는 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의 이승만을 찍고 부통령 후보로는 민주당의 장면을 찍듯이 다른 정당의 정부통령 후보를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다.

1960년 대선 전의 대선이었던 1956년의 대선에서 이승만은 앞에서 보았듯이 제1야당 후보 신익희님이 유세 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제2야당 진보당의 조봉암님을 상대로 낙승했으나(이 또한 부정이 적지 않았고, 나중에 이승만은 진보당 해산과 조봉암님의 사법살인으로 잠재적 경쟁자를 없애 버린다) 이승만의 비서실장 출신이었던 이기붕은 4년 전인 1956년 대선에도 부통령 후보로 나왔으나, 민주당의 장면에게 졌고 장면은 야당 출신으로 4년 간 부통령을 지냈다. 자유당은 1960년 대선에서 고령(86세)인 이승만이 대통령직 수행 중에 죽을 경우 지난 번처럼 야당 출신인 장면이 계승하게 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 이승만이 4.19로 쫓겨나는 (그 자 입장에선) 큰 충격을 겪고도, 1960년 대통령 선거 결과 취임했으면 임기를 마쳤을 1964년을 넘긴, 1965년까지 살았던 것을 보면 당시 자유당의 부정선거라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어차피 후보도 없는 민주당을 상대로 해 쉽게 당선될 선거에서 저지른 부정으로, 순수한 어린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일부 지역에서 항의하다 끝났을 일이 이승만의 12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로 이어진 것일까?

이제 우리는 김주열이란 당시의 고등학생 한 명을 만날 때가 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주열 열사는 3.15 부정선거 후 촉발된 마산에서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님은 실종된 아들을 찾아 마산 시내 전역을 헤매고 다니셨다. 경찰서나 시청, 구청은 물론이고 거리의 마산 시민들을 붙잡고 김주열님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아들 본 적 없냐고, 연락이 안 되고 실종되었다는데 보면 꼭 알려 달라고 호소하셨다고 한다. 졸지에 마산 시내에서는 김주열 학생과 그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인양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 (4.19혁명기념도서관)

그러다가 실종 27일째 되던 날 마산 앞 바다에서 김주열 열사는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의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어른들은 그저 다 그런거지 하고 체념하였던 부정선거에 순수한 한 고등학생이 항의하다가 경찰에 의해 그렇게 참혹하게 죽은 다음 차가운 물속에서 오랫동안 수장되어 있다가 이렇게 인양되자 12년간 이승만 독재에 눌렸던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그로부터 열흘도 안 되어 4.19가 터졌고 이승만은 보름 남짓 후인 4월 26일에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다. '실종'된 한 고등학생과 그 아들이 살아돌아 오기를 애타게 바라던 어머니의 심정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참히 짓밟았던 정권의 업보였을까?

잔인한 계절 4월에 이 땅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청춘들의 명복을 빈다.

시위에 나선 고등학생들. (4.19혁명기념도서관)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