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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과 특수의 이분법을 넘어, 여성과 기본소득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을 통해 경제적 자원에 도달해야 한다는 신화가 깨진다면?(여성의 임금이 낮은 이유는 이런 신화에 근거한다) 직접 돈을 소유하고 그 돈으로 삶을 설계하는 일이 가로막혔던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이 가정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서의 기본소득을 기대한다. 기본소득을 통해, 돈을 매개로 여성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일련의 고리들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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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소득의 핵심 원칙은 '모두에게' '조건없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당사자로서 기본소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칼럼 시리즈에서는 각자가 가진 고민들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를 짚어보고, 이로써 기본소득 논의를 재구성해보려고 합니다. - BIYN 사무국

'여성적 글쓰기'라는 개념이 있다. 1970년 대에 엘렌 식수를 비롯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개념의 등장 배경에는 글쓰기에서 자신의 개성을 문체라는 구조를 통해 표현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자신의 고유한 문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여성 작가들은 기존 언어가 접근하지 않았던 여성의 세계와 경험을 적극적으로 드러냈고, 이런 흐름이 '여성적 글쓰기'라는 개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내가 매력을 느낀 지점은 여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방식이 최선의 글쓰기로 연결된다는 점이었다. 여성성이라는 특수함이 보편성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성으로서, 여성주의자로서 글을 쓰고 말하는 일이 어떻게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여성주의가 불러일으키는 갈등과 균열이 특수한 것으로 배제되지 않고 어떻게 시대, 담론의 보편성을 향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는 나만의 관심사는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던 서구의 여권론자들은 동등한 시민권을 마련함으로써 보편적 평등을 성취한 바 있다. 서구 여권론자들의 주장은 모든 개인의 평등을 향한 근대적 기획에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여성은 남성과 달리 '개인'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은 진보진영에서 성폭력이나 여성노동의 문제가 은폐되거나 부차적인 일로 다뤄지는 것을 비판한 바 있다. 이런 역사들은 여성의 존재나 그들의 현실적 문제가 보편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전선에서조차 어떻게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다뤄지는지 보여준다.

늘 보편과 특수의 긴장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또 여성주의자들에게 기본소득은 새로운 기회다. '모든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일정 정도의 소득'이라는 기본소득의 짧은 정의에 그러한 긴장에 대한 답이 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수준 이상의 경제적인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기본소득을 받는 개인이 어떤 젠더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가졌든 배제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지원하고 지지한다. 이렇게 기본소득의 지급 대상으로 단일한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 개별에 대한 존중 없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이 기본소득의 세계관이 지닌 힘이 아닐까. 또한 이 개별성들이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필연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관계'의 문제에 천착해 온 여성주의자들에게 기본소득은 새로운 실험장이 될 수 있다.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을 통해 경제적 자원에 도달해야 한다는 신화가 깨진다면?(여성의 임금이 낮은 이유는 이런 신화에 근거한다) 직접 돈을 소유하고 그 돈으로 삶을 설계하는 일이 가로막혔던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이 가정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주고 후회했던 나의 할머니에게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욕심이 많았던 할머니는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마음껏 했을지 모른다. 엄마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엄마는 노동 시간을 줄이고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언젠가 여성학 공부를 그만 두어야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견디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서의 기본소득을 기대한다. 기본소득을 통해, 돈을 매개로 여성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일련의 고리들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각본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삶이 인정받고 다양한 성적 주체들이 존중받는 세상을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본소득 위에서 상상해본다.

글. 김신아 (여성학과 대학원생, shina61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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