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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씨도 잘 써요

이들은 파킨슨병 환자들이 '마이크로그라피아'라 불리는 글쓰기 장애를 겪는다는 데 주목했다. 근육이 경직되고 손이 떨려 글씨를 작게 쓰거나 삐뚤빼뚤 쓰는 증세를 일컫는다. 그리고 3개월여의 준비 끝에 올해 초 '아크펜'을 선보였다. 아크펜은 파킨슨병 환자의 글쓰기를 돕는 펜이다. 아크펜 안엔 진동 모터가 들어 있다. 파킨슨병 환자가 펜을 쥐면 모터가 진동을 일으킨다. 진동은 환자의 손 근육을 자극해 종이 위에서 손을 쉽게 움직이게 돕는다. 그 덕분에 파킨슨병 환자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

  • 이희욱
  • 입력 2015.04.19 09:21
  • 수정 2015.06.19 14:12

키스 웰튼 할아버지의 첫인상은 꽤나 무뚝뚝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내가 화난 것처럼 보이죠?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오해 마요. 이 병이 나를 무뚝뚝하게 보이게 만든 거니까."

파킨슨병 환자들은 웰튼 할아버지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몸이 경직되고 근육이 떨리는 증상이다. 잘 걷지 못하고 식사할 때 음식을 흘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메디컬 디자이너는 환자의 기본 욕구를 채워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정수민씨와 전환수씨 생각은 달랐다. "파킨슨병은 아직까지는 완치가 안 되는 질병이잖아요. 사망률도 낮고요. 그러니 환자들은 평생 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에선 기본 욕구도 중요하지만,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디자인 그룹 도파솔루션.

두 사람은 디자이너다. 영국왕립예술학교와 런던임페리얼대학 이중 전공으로 '디자인 앤드 엔지니어링' 과정을 밟고 있다. 이들은 파킨슨병 환자들이 '마이크로그라피아'라 불리는 글쓰기 장애를 겪는다는 데 주목했다. 근육이 경직되고 손이 떨려 글씨를 작게 쓰거나 삐뚤빼뚤 쓰는 증세를 일컫는다. 둘은 학교 동료 2명과 함께 지난해 10월 '도파솔루션'이란 디자인 그룹을 설립했다. 그리고 3개월여의 준비 끝에 올해 초 '아크펜'을 선보였다.

아크펜.

아크펜은 파킨슨병 환자의 글쓰기를 돕는 펜이다. 아크펜 안엔 진동 모터가 들어 있다. 파킨슨병 환자가 펜을 쥐면 모터가 진동을 일으킨다. 진동은 환자의 손 근육을 자극해 종이 위에서 손을 쉽게 움직이게 돕는다. 그 덕분에 파킨슨병 환자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

펜을 두껍고 크게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손이 떨리고 악력이 약한 파킨슨병 환자에겐 두꺼운 펜이 쥐기 더 편하다. 진동이 손 전체에 고루 자극을 주도록 디자인했다. 실험을 거치며 진동을 주는 위치와 강도, 주기도 조절했다. 펜 끝엔 진동 모드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버튼을 달았다.

제작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정수민씨는 말했다. "한국과 달리 영국에선 아크펜을 쓸 환자를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어요. 여기선 병원에서 환자를 중재해주지 않거든요." 가까스로 14명의 파킨슨병 환자 손에 아크펜을 쥐어주었다. "아크펜으로 간단한 문단을 쓰게 하는 실험을 했는데요. 참가자의 93%가 글씨를 더 크고 또렷이 썼어요. 5분을 쉰 뒤 이번엔 진동 없이 글씨를 쓰게 했어요. 86%가 이전보다 글씨를 더 크게 썼습니다."

구글 '스마트스푼'.

구글도 지난해 11월,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스마트스푼'을 공개했다. 스마트스푼은 떨림 때문에 환자 손이 한쪽 방향으로 움직일 때 반대 방향으로 자극을 줘 떨림을 줄인다. 디지털일안반사식(DSLR) 카메라의 손떨림 방지 기능과 같은 원리다. 스마트스푼이 떨림을 상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아크펜은 진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방향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사용한 뒤에도 일정 시간 효과가 지속된다.

정수민씨와 전환수씨는 요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만나는 환자분들마다 얘기해요. 어설픈 희망만 주고 사라지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 때마다 두 배로 상처를 받는다고. 가능성 있는 해결책을 찾아 끝까지 밀고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도파솔루션팀은 더 많은 파킨슨병 환자를 대상으로 효과를 검증할 심산이다. 아크펜 기술을 여성 화장용 브러시나 PC 마우스 등으로 확장할 계획도 있다. 개발 자금을 확보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참, 아크펜 실험이 끝날 무렵 키스 웰튼 할아버지는 말했다. "내 글씨가 정말 커졌어!" 무표정했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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