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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체제의 차원에서 본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문제

대법원장이 주도해서 대법관을 제청하는 현재의 방식은 실패했다. 공석이 된 자리는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재판 배당에 관여한 신영철 전 대법관의 후임이다. 연속해서 대법관 후보자를 제대로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이 없음을 자인한 꼴이다. 사법권 독립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고문치사 사건에 연루되었던 검사가 법원의 최종심판권자가 되는 체제라면 그 헌법체제는 아직은 민주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 오동석
  • 입력 2015.04.16 10:57
  • 수정 2015.06.16 14:12
ⓒ한겨레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최근의 대법원 판결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3월 26일 대법원 제3부[박보영(재판장), 민일영, 김신, 권순일(주심)]의 판결이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제9호로 불법구금 당했던 원고의 국가배상청구를 기각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의 국가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기는커녕 그것을 정당화했다. 사법부의 민주화는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반성함으로써 거듭나야 가능하다. 그런데도 사법부는 시대착오적이다. 긴급조치는 여전히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이다. 지난 일은 잊으라며 국가폭력에 대해 소멸시효를 끌어댄다. 그러나 국가폭력은 국가권력이 아니며 불법체제에서의 국가폭력행위는 소멸시효가 있을 수 없다.

헌법적 책무를 도외시한 법원의 역사

헌법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라고 법관에게 명령하고 있다. 그 책무에 대응하여 헌법은 법관에 대해 징계로써 파면하지 못하도록 신분을 보장하고 있다. 반면 유신헌법 아래에서 법관은 징계처분으로도 파면당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일반 법관을 임명하기까지 했다. 유신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했기에 현행 헌법은 법관의 신분을 보장한 것이다.

법관이 그 직을 걸고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헌법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책무는 없고 특권만 남는다. 유신헌법 또는 긴급조치와 같은 '헌법적 불법'에 대해 단호히 맞서야 할 헌법적 책무가 매우 중요한 까닭이다. 법관이라면 긴급조치와 같은 불법 규정에 맞서서 최소한 법관의 직을 걸고 싸웠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면 민주화 과정에서 생명과 신체 그리고 자유와 권리를 침해당했던 사람들에게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의 판결을 통하여 나중에라도 사죄해야 했다. 과거의 불법판결을 바로잡아 불법체제와 단절하고 민주헌법의 맥을 이어나가는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한 쿠데타' 폭력이 오히려 민주화의 과실(果實)을 따먹음으로써 다시 민주주의는 위험에 빠진다. 그것은 곧 불법의 연장이다.

왜 대법원은 과거의 권력에 대해서조차 단호하지 못한가? 아직도 악법도 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법을 권력자의 명령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법을 법관의 권력으로 활용했던 것은 아닐까. 권력을 잘못 사용하면 반드시 책임을 추궁당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직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사법부의 민주화와 독립성을 판단할 시금석

박상옥 대법관 후보의 문제는 사법권의 민주화와 독립성을 판단하는 시금석이다. 불행하게도 답은 부정적이다. 그가 대법관 후보가 되는 순간 사법부는 헌법적 유죄의 선고를 받았다. 4월 7일 청문회에서 박후보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외압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변명했다.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부끄럽지 않다며 축소·은폐 수사의 책임을 부인했다. 이미 밝혀진 관계기관대책회의 수사 관여와 이에 따른 검찰의 부실 수사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다 받아준다고 해도 수사검사로서의 결과책임은 남는다. 법적 책임은 아닐지언정 공직자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대법관이 되어서는 안되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말단이든 막내든 검사는 검사다. 인권과 공익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안상수 창원시장이 청문회 증인으로 발언한 내용이다. 그는 당시 박 후보자의 '선배 검사'로서 함께 수사팀에 참여했었다. "박 후보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의 은폐, 축소에 관련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 면죄부의 카르텔을 드러낸 자기사면인 셈이다.

박 후보자는 과거의 대법관들을 들이대면서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문제는 헌정사를 바로세우는 문제이다. 유신헌법과 1980년헌법 체제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들에게 적정한 책임을 묻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계기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법관은 박종철을 비롯하여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그 억울함을 법의 이름으로 풀어낼 역량이 있어야 한다. 법관을 비롯한 공직자들에게 권력의 품을 박차고 나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헌법체제에 대한 성찰로

그런 점에서 보면 대법원장이 주도해서 대법관을 제청하는 현재의 방식은 실패했다. 공석이 된 자리는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재판 배당에 관여한 신영철 전 대법관의 후임이다. 연속해서 대법관 후보자를 제대로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이 없음을 자인한 꼴이다. 사법권 독립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고문치사 사건에 연루되었던 검사가 법원의 최종심판권자가 되는 체제라면 그 헌법체제는 아직은 민주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불법체제의 권력에 대한 반성 없이, 권력 행사에 대한 적정한 책임 부담 없이 인권과 민주주의는 한 걸음도 발전할 수 없다. 가장 훌륭한 헌법교육은 권력의 남용에 대해 가혹할 정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권력자에 대한 훈육인 동시에 주권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다. 대한민국 헌법체제가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 헌법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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