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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언론은 북한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는가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북한의 경제와 사회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변화입니다. 사실 지난 20년 동안 이러한 변화의 규모와 범위는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스탈린주의적인 구식 중앙집중식 경제체제는 꽤나 응집력을 잃었고 이는 다수의 민영기업과 반(半) 민영 기업에 의해 부분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자발적 고립의 지속성은 떨어졌고 외부세계의 정보가 스며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성장한 초기 상인 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조금씩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통설과는 달리 이들의 이익이 북한의 정부와 오래된 특권계급의 권력과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북한의 미래를 결정할 미세한 사회 문화적 변화의 산물이지만 이러한 주제들은 대중 언론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습니다.

  • NK News
  • 입력 2015.04.15 05:52
  • 수정 2015.06.15 14:12

단편적인 사건과 잠깐의 유행을 좇는 언론은 북한의 장기적인 변화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필자는 수년간 기고해오던 언론사의 사무실에서 회의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편집자는 제 최근 칼럼에 "화제성이 부족하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북한의 장마당이나 북한 사람들이 외부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글보다는 핵 협상이나 북한 고위 관료들의 파벌 싸움에 대한 소식을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편집자나 출판사 관계자와 논쟁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에 저는 곧바로 백기를 들고 제 논조를 바꾸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뒤로 발행되는 제 글의 대부분은 6자회담의 재개와 관련된 예비 회담이나 미 국방부 비밀 보고서에서 흘러나온 북한 미사일 기술의 소소한 발전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소식들은 이야기 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북한을 정말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화제성'을 중시하는 접근법은 언론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위험한 접근법이며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일입니다.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날 일들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 북한 사회 깊은 곳의 변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언론매체들의 이러한 태도는 은연 중에 연구자들이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이를 언론을 통해 소개하기를 어렵게 만듭니다.

단편적인 사건들에 얽매이는 접근법은 현실을 호도할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초반의 중국에 대한 언론 보도를 살펴봅시다. 당시 언론매체의 편집자들도 화제가 될 만한 기사거리를 찾아다녔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죠. 그리하여 서로 앙숙인 군벌들끼리의 전투와 유럽 열강들의 새로운 요구조건들, 그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저장성의 철도 부설권을 둘러싼 복잡한 협상들에 대한 수많은 기사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이런 편집부의 압력을 심각하게 여긴 기자는, 농촌의 농민들부터 도시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까지 매료시키고 있던 공산주의 사상이나 일본군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던 군국주의, 또는 조금씩 지지를 확보해 나가고 있던 쑨원의 민족주의와 같이 별로 화제거리가 안 되는 주제에 대해 기사를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당시에는 눈길을 끌지 않았던 장기적인 추세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중국,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바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1920년 당시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군벌들의 영역 투쟁에 대한 것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소수의 역사학자들 뿐입니다.

장기적인 추세

1970년대의 소련도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겠군요. 당시 서구 언론들은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하는 중거리 폭격기와 같은 자극적인 소재들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소련의 아프리카 진출과 소련의 모험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썼습니다. 이들은 소련 정치국 내부의 인사 이동을 논했고 그리신(Grishin)과 로마노프(Romanov) 같은 잘 나가는 인사들의 앞날에 대해 예측을 던졌습니다.

이제는 그 무슨 폭격기(Tu-22라는 폭격기 기억이나 하시나요?)에 대한 협정이라든지 앙골라에서의 대리전이 낳은 결과(오늘날 UNITA와 MPLA의 차이가 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같은 것들이 소련의 운명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리신과 로마노프 모두 무사히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공산주의 대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서서히 무너져간 소련의 경제와 그에 따른 인민들의 체제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세들은 언론에서 다뤄지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언론들은 그저 겉보기에 뉴스 가치가 있어 보이던 정책이나 외교 문제에 대해서만 떠들 뿐이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오늘날의 언론보도들 속에도 비슷한 추세가 계속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핵 협상이나 6자회담은 매번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닮았습니다. 외교적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북한과 그 인접 지역의 미래는 뭔가 화려한 외교적 업적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요인들이 작용할 테지요.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북한의 경제와 사회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변화입니다. 사실 지난 20년 동안 이러한 변화의 규모와 범위는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스탈린주의적인 구식 중앙집중식 경제체제는 꽤나 응집력을 잃었고 이는 다수의 민영기업과 반(半) 민영 기업에 의해 부분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자발적 고립의 지속성은 떨어졌고 외부세계의 정보가 스며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성장한 초기 상인 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조금씩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통설과는 달리 이들의 이익이 북한의 정부와 오래된 특권계급의 권력과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북한의 미래를 결정할 미세한 사회 문화적 변화의 산물이지만 이러한 주제들은 대중 언론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습니다.

사실 개인 소유의 텃밭의 성장이나 사설 도서관의 등장, 휴대폰 문화들은 그리 매력적인 소재가 아닙니다. 이는 최근에 발생한 사건과 관련 있는 소재가 아니기에 화제성이 높은 것도 아닙니다. 이로 인해 많은 간행물들은 북한의 사회와 경제에 대해 이미 시효가 지났으며 사실을 오도하는 뻔한 표현들을 반복하는 데 그칩니다. 북한은 여전히 '스탈린주의 국가'이며, 돈을 가진 이들은 '고위급 정부 관료'에 국한되는 '아사 직전의 위기에 처한 나라'로 그려집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것

언론인들은 비록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더라도 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고정관념의 재생산을 낳으며, 극도로 단순화되거나 심지어 기괴하게 왜곡된 세계관을 초래합니다. 1990년대 이래 북한이 겪어온 커다란 변화는 언론과 일반 대중들에게 상당 부분 간과되어 왔습니다. 통상적인 신문의 포맷은 단편적인 사건들을 다루기에 알맞게 되어 있어 이러한 장기적 추세에 대한 정보들을 다루기에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현실주의자입니다. 필자가 너무 과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북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사회 현안이나 문화적 추세 역시 보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잦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러시아 국적의 필자는 국제 언론들이 필자의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움직임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묘사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크림반도의 병합 등을 비롯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책들이 러시아 대중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에 대해 다루는 기사가 얼마나 부실한지에 대해 종종 놀라곤 합니다. 오늘날 러시아 대중의 사고방식 또한 간과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근본적으로 위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 러시아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보도해야 합니다.

게다가 러시아 대중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가정에 근거했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닙니다. 서구 언론들은 러시아의 외교적 협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가끔씩 러시아 야당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의 재판과 고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최근에는 러시아 대중조차 이들에게 놀라우리만큼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이 사람들을 혐오하는데도 말이죠.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에 의해 상처 입은 자존감과 굴욕에서 비롯되어 천천히 부흥하고 있는 러시아의 국가민족주의에 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추세가 푸틴의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힘이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편견입니다. 많은 서구 언론인들에게 일반적인 러시아 사람들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추세가 극적인 사건들과 곧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보도 가치를 인정받기란 어렵습니다.

신문과 웹사이트, 그리고 TV 채널들은 특정 독자나 시청자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특정 독자층이 가지고 있는 국내 사안과 외교정책에 대한 우선순위는 PD나 편집자들이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결정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그 운신의 폭은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뉴아크에 거주하는 일반적인 CNN 시청자들이나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워싱턴포스트> 독자들은 북한의 청진 주민들의 패션과 유행이 뉴스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북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패션과 취향의 변화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핵문제에 대한 고위급 회담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글쓴이 안드레이 란코프(Andrei Nikolaevich Lankov)는 1980년대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수학한 세계적인 북한 전문가입니다. 이 글은 최하영이 번역하고 김수빈이 편집하였으며, 메인 사진은 Matt Paish가 찍은 것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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