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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염 없는 사랑

임권택의 "화장"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딸이 아버지인 오상무에게 죽은 엄마를 사랑한 적이 있냐고 묻는 씬이다. 오상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지도 않은 아내를 연민과 책임감으로 견디고 섬긴 것일까? 사랑 없이도 배우자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으로 혼인생활을 건너는 게 옳을까? 그러나 사랑은 금방 휘발하는 법이니 연민과 책임감만이 우릴 구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 이태경
  • 입력 2015.04.15 14:01
  • 수정 2015.06.15 14:12
ⓒ리틀빅픽처스

김훈의 "화장"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문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병하며 젊고 아름다운 육체에 끌리는 중년 사내의 숭고함 혹은 비루함은 김훈의 단정하고 탐미적인 문장을 통해 깊디 깊은 울림을 준다. 김훈의 문장이 힘이 지닌 힘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김훈의 문장들로 구성된 소설을 영화로 만들 엄두를 내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다. 예컨대 "화장"의 주인공인 오상무가 마음 속에 품은 추은주에게 하는 아래와 같은 독백을 영상으로 만든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김제 들판이 끝나는 만경장 어귀의 포구마을에 전주 지사장이 저의 여관을 잡아놓았습니다. 저는 대리운전자를 불러서 여관으로 갔습니다. 당신이 결혼하던 날, 저의 하루 일과는 그렇게 끝났지요. 여관 창문 밖으로 썰물의 개펄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고 흰 달빛이 개펄 위에서 질척거리면서 부서졌습니다. 바다는 개펄 밖으로 밀려 나가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승에 뜬 달처럼 창백한 달빛이 가득한 그 공간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높은 소리로 울면서 저문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제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관방에서 당신의 몸을 생각하는 일은 불우했습니다. 당신의 몸속에서, 강이 흐르고 노을이 지고 바람이 불어서 안개가 걷히고 새벽이 밝아오고 새 떼들이 내려와 앉는 환영이 밤새 내 마음속에 어른거렸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임권택이 그 불가능에 도전했다. 임권택의 "화장"은 김훈의 "화장"과는 다르다. 소설의 문법과 영화의 문법이 다르며 영화의 문법 안으로 소설의 문법을 그대로 끌어올 경우, 더구나 원작소설의 문장이 유독 우뚝할 경우, 영화는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임권택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임권택의 "화장"은 항거하기 힘든 욕망을 한사코 참아내며, 죽어가는 아내에게 헌신하는 윤리적 인간의 이야기이며, 남자에게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남녀 간의 정염과 그 정염에 기반한 사랑이 그리 견고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 영화에서 오상무(안성기 분)가 걸어가는 뒷 모습을 두 번 볼 수 있었다. 한번은 회식 자리에서 추은주(김규리 분)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추은주의 젊은 육체에, 끌린 오상무가 추은주를 찾아 유흥가 골목을 휘청대는 걸음으로 걷는 모습이다. 이 대목에서 오상무가 흘리는 눈물을 언뜻 본 것도 같다. 오상무가 눈물을 흘렸다면 병상에 누운 아내(김호정 분)에 대한 윤리의식과 걷잡을 수 없이 젊은 육체에 매혹되는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이거나 회한이 아니었을지. 다음에 내가 본 오상무의 뒷 모습은 아내를 화장한 후 별장에 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오상무에게 추은주가 찾아오고, 추은주를 피해 떨리는 걸음으로 길을 걸어가던 오상무의 뒷모습이다. 아내에 대한 마지막 의리와 추은주에게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마음 사이에서 아내에 대한 의리를 선택한 오상무의 마음이 너무나 잘 표현된 씬이었다.

임권택의 "화장"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딸이 아버지인 오상무에게 죽은 엄마를 사랑한 적이 있냐고 묻는 씬이다. 오상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지도 않은 아내(병든 아내와의 정사는 마치 노동을 연상시킨다, 이 정사에는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요소가 전혀 없다)를 연민과 책임감으로 견디고 섬긴(배설조절도 못하는 아내를 끝까지 거두는 건 배우자인 오상무다. 딸은 비참하기 그지 없는 모친의 처지를 슬퍼하며 통곡을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것일까? 사랑 없이도 배우자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으로 혼인생활을 건너는 게 옳을까? 그러나 사랑은 금방 휘발하는 법이니 연민과 책임감만이 우릴 구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내가 틀렸다. 오상무가 아내와의 관계에서 결여돼 있었던 건 격정이나 정염이었을 뿐이다. 격정과 정염은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어쩌면 오상무가 추은주에게 향하던 마음을 끊어낼 수 있었던 힘이 윤리의식이나 아내에 대한 의리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려 깊은 오상무는 추은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원작과 영화 모두 오상무는 노쇠로 인한 전립선 비대로 인해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에 대한 외면이거나 부정임을 알았고, 노쇠와 노쇠의 결과인 죽음을 외면하거나 부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부질 없고 허망하기만 한 젊은 여자와의 불륜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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