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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찌개, 이빨 자국을 찾으십니까

햄의 기름이 녹으면서 찌개는 단맛을 냈다. 걱정했던 노린내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한 친구녀석이 '부대찌개에서는 미군 노린내가 난대' 하고 말했었던 것이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병장이 우리에게 농담을 던졌다. "찌개를 잘 뒤져봐요. 이빨 자국 있는 햄이나 쏘시지가 나올 거예요. 그게 진짜예요. 부대찌개니까. 미군 부대 찌개니까." 우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충고에 감사를 표하고, 진짜로 숟가락을 들어 일제히 찌개를 뒤졌다. 토미 일병이, 조너선 상병이 씹다 뱉은 햄 조각을 찾으려고 말이다. 나는 그 순간에도 흑인 병사의 어마어마하게 큰 앞니 자국은 어떨까, 상상하고 있었다.

  • 박찬일
  • 입력 2015.04.14 10:23
  • 수정 2015.06.14 14:12
ⓒ한겨레

십수년 전, 장안의 음식재료 값을 올리던 청담동의 한 식당이 있었다. 요새는 허름한 주점에서조차 퓨전요리라고 써붙여 놓는 시절이지만, 당시 퓨전은 전무후무한 새로운 요리 경향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고급차 좀 몬다는 사람들은 예약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 바빴고, 요즘 물가에도 어지간한 식당에서는 이루기 힘든 하루 매출 1천만원을 팍팍 올리던 집이었다. 그 집 요리가 맛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으니 그건 식당의 슬로건에서 비롯한 거였다. 바로 '퓨전'이라는 두 글자다. 누구는 크림쏘스에 간장 두어방울 섞으면 퓨전이냐, 와인 대신 청주를 넣으면 퓨전이냐고 비웃었지만 그게 그 시절 고급 식도락의 한 유행이었다.

퓨전은 동네 식당에도 바람을 일으켰다. 케첩과 마요네즈, 간장과 고추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 퓨전이라고 불렀다. 그때, 강호의 강력한 퓨전 거사께서 일갈하셨다.

"누가 나의 퓨전 아성에 도전하느뇨. 건방지도다."

그의 옆에는 좌 쏘시지, 우 스팸의 건장한 외래 무사가 호위하고 있었고, 열이 받으면 거대한 라면사리 특공대를 투입해 퓨전 동네를 평정하곤 했다. 그는 스스로 퓨전의 전설을 이루려고 했는데, 그 근거는 이랬다.

"라면이란 원래 중국 내륙의 음식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니 이 또한 유서 깊은 퓨전의 원조로다. 김치와 두부에 빛나는 세례를 해주신 쏘시지와 햄, 체더치즈의 카오스적 융합은 또한 퓨전의 신세기일진저."

그가 퓨전 창세기에 버금가는 위세로 그렇게 일갈하였지만 쉽게 풀어보면 부대찌개가 퓨전이란 얘기고, 그게 맞긴 맞다. 묵은 김치와 미군 부대의 짬밥이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지와의 조우, '크로스 인카운터(cross encounter)'가 아니더냐는 말이다. 누구는 그런 음식이야말로 모멸의 극치라고 부끄러워하였고, 그 때문에 작금의 한식 세계화--찌개급도 아닌 간식급 떡볶이가 선두에 서 있는--흐름에도 등재되지 못한 게 아니냐고 따질 만한 일이다. 그러나 동두천과 의정부, 그리고 용산과 송탄의 부대찌개집들은 오히려 그런 모멸을 뒤집고 해학과 전세계 B급 재료의 대동단결을 일개 찌개에 녹여내는 골계미를 창출하고야 말았다.

부대찌개라면, 내가 그 음식과 치른 '크로스 인카운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시계는 3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84년이면 짜장면이 대략 500~600원 했고, 대학등록금이 50만원이었다. 그리고 그해는 내가 아마도 처음으로 정치적 각성(?)을 시작한 해인 것도 같다. 그래 봐야 신문의 정치면을 유심히 보던 정도였지만. 내 또래 이상이라면 신민당의 총선 압승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민주화 열망은 군사정권의 폭압에도 도도한 흐름으로 커져갔고, 결국 그 흐름이 나중에 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기억나는 건 '학생 사형수'였던 이철이 성북구에 출마, 상복을 입고 유세까지 펼치며 시민들의 환호를 얻어내던 장면이다. 내게 정치란 그렇게 극적이고, 약간은 희화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재미난 마당굿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어정쩡한 그해 초봄, 나와 친구들은 군대 간 친구를 면회했다. 또래보다 한살 더 많아 일찍 군대에 간 녀석은 갓 이등병이었다. 그때까지도 교련복 바지를 입고 다닐 만큼 주변머리 없고 가난했던 우리는 잔뜩 주눅이 들어 의정부행 터미널로 갔다. 어쩌면 험난한 군대생활의 현장을 미리 체험해보겠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는 시외버스에서 언제든 흡연이 가능했다. 심지어 시내버스에서조차 담배를 피우는 할아버지가 적지 않던 때였으니까. 담배를 한 대씩 꼬나물고, 덜컹거리며 돌고 돌던 완행버스 속에서 황량한 병영 지역을 수없이 통과했다. 잔뜩 주눅이 든 채 아무도 오가지 않는 부대 정문을 지키는 얼뜨기 이등병은 우리의 미래였다. 우리는 이내 의정부 외곽의 군부대에 당도했다.

아아, 차라리 보지 말 것을. 칼바람 부는 야외 면회소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던 우리는 녀석이 연병장 저쪽에서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다 해진 오렌지색 '추리닝'은 무릎이 튀어나와 있었고, 손등은 거북 등딱지처럼 붓고 갈라져서 자줏빛을 띠었다. 미구에 닥칠 이등병의 운명을 너무도 생생하게 본 우리는 기가 죽어 담배만 빨아댔다. 그의 표정은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눈빛은 친구들과 만나고서도 부드럽게 풀리지 않고 깊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이등병의 면회 외출은 금지였지만, 그때까지 가족조차 면회 한번 오지 않은 녀석에게 일직사관은 아량을 베풀었다.

녀석에게 쥐여줄 용돈 약간을 빼면 우리가 회포를 풀 자금이 턱없이 적었다. 값싼 식당을 찾아야 했다. 녀석이 부대 선임에게 주워들은 정보로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지금으로 말하면 의정부 명물거리, 그러니까 부대찌개를 파는 동네였다. 지금처럼 그럴듯한 이름은 없었고 기억에는 그냥 부대찌개 골목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러나 뭔가 비슷한 업소가 북적이면서 몰려 있는 '○○골목'이라고 하기엔 당치도 않게 허름한 식당 몇개만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등병을 앞세우고 우리는 부대찌개를 시켰다. 분별력이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이등병에게 '부대'찌개라니. 기왕이면 '사제' 냄새 팍팍 나는 음식을 시켜주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와중에도 나는 왜 그게 부대찌개라고 불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도시락 반찬으로 쓰는 쏘시지와 싸구려 햄 조각이 든 김치찌개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그 햄은 밀가루 맛이 나는 '진주햄'과는 다른 녹진하고 기름진 맛을 지닌 특별한 녀석이었다. 햄의 기름이 녹으면서 찌개는 단맛을 냈다. 걱정했던 노린내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한 친구녀석이 '부대찌개에서는 미군 노린내가 난대' 하고 말했었던 것이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병장이 우리에게 농담을 던졌다. 우린 생전 처음 경양식집에서 '비후까스'를 받아든 것 같은 영락없는 촌뜨기들이었으니까.

"찌개를 잘 뒤져봐요. 이빨 자국 있는 햄이나 쏘시지가 나올 거예요. 그게 진짜예요. 부대찌개니까. 미군 부대 찌개니까."

우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충고에 감사를 표하고, 진짜로 숟가락을 들어 일제히 찌개를 뒤졌다. 토미 일병이, 조너선 상병이 씹다 뱉은 햄 조각을 찾으려고 말이다. 나는 그 순간에도 흑인 병사의 어마어마하게 큰 앞니 자국은 어떨까, 상상하고 있었다. 삼촌이 씹은 총각무의 이빨 자국 같을까. 아니, 그보다 훨씬 크겠지.

ⓒ박경연

병장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농담이라는 걸 알았고, 우리는 어설픈 소주 몇잔에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긴장이 풀린 이등병 녀석도 얼굴이 붉어져서 빙그레 웃었다.

제대하고 오랜만에 모인 우리들은 옛 추억을 씹으며 부대찌개에 소주를 나눴다. 누군가 앞으로 먹고살 걱정을 시작했고, 모두들 자못 심각해져서 소주잔만 뒤집었다. 그때 의정부 출신 녀석이 한마디 던졌다.

"부대찌개집을 하면 어떨까. 으흠, 이름은 말야, '이빨 자국 부대찌개'로 하고 말이지. 밑에 카피를 하나 쓰자구. 진짜 미군 부대에서 이빨 자국 쏘시지가 직송됩니다, 어때?"

녀석은 진짜로 부대찌개를 좋아했다. 그래서 부대찌개에 관한 논문 한편을 쓸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문산식, 용산식, 의정부식...... 맛과 스타일이 다 달라. 용산식은 존슨탕이라고 부르지? 60년대에 당시 미국 대통령 존슨이 용산 미8군을 방문한 기념으로 치즈와 쏘시지, 햄을 넣은 한국식 부대찌개를 먹고는 '존슨탕'이라고 명명했다더군. 솔직히 말도 안되지? 그래서 용산식은 김치를 넣지 않아 매운맛이 없고 치즈를 넣어 느끼하게 요리한다는 거야. 내 입맛에는 문산식이 최고야. 대파를 넣고 시원하게 끓이는 스타일이지."

이 땅에 미군이 들어오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새로운 음식이 한 시대를 풍미한다. 역사는 흘러가고 우리에게는 이제 부대찌개만 남았다. 나는 부대찌개가 부글부글 끓으면 다이알비누와 땅콩버터를 팔던 미제장수 아줌마와 남대문 도깨비시장의 블루리본 캔맥주, 말보로와 켄트 담배 같은 전설이 냄비 가득 피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 겨울의 의정부 부대찌개가 마음 한켠에 서서히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뜨거운 한 입>(창비, 2014)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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