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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 인터뷰] '세월호 버스킹' 이광석 "내가 광화문에서 선 이유는" (사진, 동영상)

  • 원성윤
  • 입력 2015.04.13 13:35
  • 수정 2015.04.13 14:13

가수 이광석을 아는 이름 석 자를 아는 대중들은 그리 많지 않다. 2000년대 안팎으로 대학교에 다닌 지금의 20~30대라면 노래패 ‘우리나라’의 ‘벗들이 있기에’(1집)‘한결같이’(2집) ‘우리 하나 되어’(3집) 등을 들어봤을 법도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대중가수는 아니다.

그는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각종 집회,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및 국민장,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대학 시절 신학자가 되기를 꿈꿨던 그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또한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테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하고 교회의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해방신학과 그가 부르는 노래는 닮아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부른 ‘다시 광화문에서’

지난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가수 이광석은 다시 노래를 불렀다. 차가운 바다에 잠들어 있는 실종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떠나 보낸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올바르게 되기 위해서라고 그는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 언제부터 거리공연을 시작했나

=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홍대에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난겨울에는 20팀이 모여서 1주일 동안 ‘너를 기다리는 콘서트’를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했다. 이번 같은 경우는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폐기하자는 의미에서 거리공연을 시작했다.

- 왜 거리로 나와야 되겠다고 생각했나.

= '왜'라는 질문이 필요가 없는 문제인 거 같다. 이게 도대체 나라인가.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전혀 구하지 못했고, 어른들은 핑계를 댔다. 대통령은 사라졌고, 선장은 탈출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도망갔다. 모든 게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이 아닌 상황 속에서 뮤지션이기에 앞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억울한 유가족들 그리고 빼앗긴 생명에 대해 한 소리라도 보태는 게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14일에 발매되는 ‘우리나라’ 새 앨범에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나의 천사’와 ‘화인’이라는 곡이 실렸다. ‘나의 천사’라는 곡을 만들 게 된 이유는.

=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글을 모아놓은 언론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들을 하나씩 읽어봤다. 세월호 참사 가족 부모님이 쓴 아이들에 대한 글을 보니 세상의 사랑 중에 이만한 사랑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랑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 이런 생각이 들어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천사

눈물이 또 쏟아진다 같이한 추억이 떠올라

간절해지는 짙어지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아무리 힘들어도 내 곁에 네가 있었으면

속삭여주는 사랑한단 말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잊으려 지우려 애쓰지 않을 거야

생각나면 또 울고 또 웃을 거야

사랑해 사랑해 영원히 생명 다해

내 가슴 속에 천사로 널 남겨 둘 거야

지금의 이 기다림이 끝이 아닌 시작이란 걸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그 날을 위해 살아갈게

글 곡 이광석

거리의 가수 이광석씨가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우리나라의 신곡인 세월호 추모곡 '나의 천사'를 부르고 있다.

- ‘화인’이라는 곡은 도종환 시인 ‘화인’을 가지고 만든 노래라고 알고 있다.

=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라는 시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도종환 시인께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셔서 ‘우리나라’ 백자 씨가 작곡을 해 노래를 만들었다.

화인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 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아 있을 아픔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시 도종환 곡 백자

- 세월호 참사 1년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 유가족들이 뵐 때마다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네는데 어떻게 안녕할 수 있겠나. 손만 내밀게 된다. 수많은 외침과 호소와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진척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부는 거짓말을 하고, 돈으로 가족들을 이간질하는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언론에 세월호 인양비용이 얼마인지, 유가족들의 받는 돈이 얼마인지를 뿌렸다. 국민에게서 철저하게 세월호 가족들을 떼어버리려고 하는 나쁜 짓이다. 세월호 가족들을 외로운 ‘바위섬’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또 600만 국민이 서명한 특별법을 조사위원회가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게 정부의 진심이구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광화문광장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았을 텐데.

= 우리가 유가족들의 마음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매번 거리로 나와서 노래를 하면서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해 노력하지만, 광화문에서 발길을 돌리는 순간에는 허전하고 마음이 아릿하다. 이번 겨울 ‘너를 기다리는 콘서트’를 할 때 영석이 아버님, 민우 아버님이 노래를 마치고 갈 때 노란 리본을 기타 가방에 메어주셨다. 그 기타로는 가족들과 아이들 위해서 진실을 위해서 곡을 쓰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피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 세상의 구조가 피곤한 것이다. 피곤하다고 관심 밖에 두면 분명 자신에게 돌아온다. 조금 힘들더라도 밝혀낼 것은 밝혀내고, 잘못된 것은 잡아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땅인데 우리가 포기할 수 없지 않나.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존중과 가치가 상실되었기에 나타나는 일이라고 본다. 요즘 기업에서도 ‘사람이 먼저다’라고 광고를 하는데 이 땅에 살아갈 큰 가치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을 먼저 구출해야 하고, 돈보다도 사람이 먼저다. ‘세월호 참사’는 사람이 깡그리 없어지고 자본과 돈, 난무하는 시대가 돼버린 표상적인 사건이다.

가수 이광석씨

- 대학 시절 목회자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연유로 진로가 바뀌었나.

= 1991년 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열사 정국, 분신 정국’이 펼쳐졌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노동자들 쓰러져 갔고, 내 인생의 전환기라고 볼 수 있었다. 대학교를 나와서 신학 대학원을 가 목회의 길을 가려고 했었는데 진로가 바뀐 것이다. 건국대 노래패 ‘어울림’에 들어갔고, 그 길로 가수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 1990년대 노래패 ‘꽃다지’ ‘노찾사’ 등이 부른 투쟁가의 시대, 2000년대 ‘우리나라’로 대표되는 보급형 민중가요를 부른 시대, 2010년대에 이광석이 부르는 노래는 많이 달라졌다고 보는데.

= 1990년대를 전후 한 당시는 첨예한 시절이었고, 날카로운 시절이었다. 피 터지는 싸움의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래가 많이 유해진 것은 노래를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디 뮤지션 노래 속에서도 사회 현상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에 민중가요라고 굳이 갈라놓고 역할 규정을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은 굴뚝으로 올라가고, 우리의 삶은 걍팍해지고 있지 않나.

- 이광석은 ‘우리나라’로 데뷔한 지 16년째이다. 당신에게 노래란 어떤 의미인가.

= 내 노래는 밥이고 술이다. 내 노래를 통해서 삶을 풍요롭게 꾸려나가지는 않지만, 사람들 속에서 웃음을 찾고 삶의 의미를 확인한다는 데 의미가 있지 않겠나. 노래는 평생 나하고 같이 갈 동무가 되었고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게 됐다. 거리의 아픔과 이 땅의 눈물들과 함께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내 노랫자락 한 자락에 사람들이 잠시만 쉴 수가 있다면 그걸로 됐다. 나는 그것들을 위해서 노래를 하는 것이고, 힘을 받는 것이다. 서 있지 못한 순간까지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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