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곰이 떠나고 날아든 새

'나물 먹는 곰' 이 밥집을 꽤 좋아했다. 정갈하면서 대접받는 듯한 한 끼를 먹는 것 같아서. 그래서 홍대에서 누군가와 저녁 약속이 있으면 이곳에 갔다. 나물 먹는 곰은 친구보다 아직 서먹한 사이가 한 끼를 어색하지 않게 먹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그래서 주로 소개팅을 하면 이 집에 갔다. 메뉴는 즐겨 먹는 뚝배기 불고기. 그랬던 나물 먹는 곰이 사라졌다. 물론 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곰이 밥을 팔던 그 자리엔 새가 날아들어 수제 케이크를 판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 널찍하게 배치한 간판에 필기체로 쓰인 '허밍벨라'.

  • 노유청
  • 입력 2015.04.15 08:09
  • 수정 2015.06.15 14:12

[흥망성쇠 프로젝트 2]

곰이 떠나고 날아든 새

곰이 떠나고 그 자리엔 새가 날아들었다. 묘한 자리바꿈. 곰은 밥이었고, 새는 케이크다. 밥이 떠나고 후식이 자리를 차지한 셈. 희한하지만 뭔가 자연스러운 흐름 같기도 한 상권의 이동. '나물 먹는 곰' 이 밥집을 꽤 좋아했다. 정갈하면서 대접받는 듯한 한 끼를 먹는 것 같아서. 그래서 홍대에서 누군가와 저녁 약속이 있으면 이곳에 갔다.

나물 먹는 곰은 친구보다 아직 서먹한 사이가 한 끼를 어색하지 않게 먹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그래서 주로 소개팅을 하면 이 집에 갔다. 메뉴는 즐겨 먹는 뚝배기 불고기. 한 번도 싫어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파스타처럼 마치 정형시 같은 첫 만남 메뉴를 선택하지 않아도 유쾌하게 한 끼 먹을 수 있던 밥집. 밥을 먹은 이후에는 담배를 피우던 여자라면 '몽마르뜨 다방'으로 아니라면 '100% 오리지널' 커피로. 나물 먹는 곰이 아니라면 소개팅 스케줄을 뽑기 힘들 정도로 편애했던 밥집.

그랬던 나물 먹는 곰이 어는 순간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다. 출입구에 앙증맞게 달려 있던 아크릴 재질 간판도 함께. 작았지만 한눈에 들어오던 그 간판. 솔직히 처음 이 집을 발견한 건 취잿거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몇 년 전 잡지에 연재되던 코너 '조각사인'의 취잿거리를 찾기 위해. 철재, 아크릴, 폼보드, 목재 등등을 따내서 만든 입체문자사인. 업계 은어로는 '스카시' 간판이라 하고 잡지에선 '입체문자사인'이란 명칭으로 썼다. 암튼 괜찮은 입체문자사인을 찾아내 다루던 섹션 조각사인. 그 소재를 찾으려 홍대를 돌다가 점찍어둔 집이 나물 먹는 곰이었다.

나물 먹는 곰의 간판. 아크릴 조각을 무심한 듯 배치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보면 꽤 용의주도하게 구성했다. 흰색배경을 활용해 빵빵한 배를 표현한 것 까지. 사진 출처 : 월간 <사인문화> DB

배부르게 밥 한 끼 먹고 배를 탕탕 두드리며 앉아 있는 곰의 모습과 '나물먹는 곰'이란 상호가 이질적인 듯하지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아크릴 조각을 투박하게 붙여 놓은 듯하지만, 바탕색인 희색을 활용해 풍만한 곰의 배를 표현한 것이 꽤 용의주도하다. 작지만 자꾸 눈이 가는 간판.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에는 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막연하게 큰 간판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듯한 통쾌함도 있었다.

그랬던 나물 먹는 곰이 사라졌다. 물론 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멀지도 않은 곳 마포구 서교동, 상상마당 뒤편으로. 곰이 밥을 팔던 그 자리엔 새가 날아들어 수제 케이크를 판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 널찍하게 배치한 간판에 필기체로 쓰인 '허밍벨라'. 솔직히 상호인 허밍벨라는 최근 블로그를 검색해서 알았다. 친구들에게 말할 땐 '샵 일구구'라고 말했다.

알고보니 샵 일구구는 옆집 옷가게의 간판이었고 이곳의 명칭은 허밍벨라였다. 그런데 묘한 건 허밍벨라의 간판과 샵 일구구의 간판 형태가 기가 막히게 똑같다는 점. 흰색 바탕에 테두리 패턴이 똑같다. 영락없는 형제이자 같은 집 간판. 같은 사장이 운영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 좋은 조합이다. 큰집과 작은집의 간판이 닮아있다는 건.

그리고 간판 보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형태는 잃어버린 공간에 대한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치유해주기도 한다. 좋아하던 가게를 잃었지만 새로운 주인장이 그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아서. 물론 건물주와 세입자 등등 다른 시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간판만 두고 본다면 그렇다. 곰을 잃고 실망하는 자들을 다독여주는 새처럼.

포털사이트에 허밍벨라를 검색해 블로그 게시글을 몇 개 찾아보니 꽤 괜찮은 케이크를 파는 집이다. 커피와 달달한 케이크를 즐길 수 있는 집. 바로 길 건너에 나물 먹는 곰이 있으니 다음 소개팅은 그곳에서 밥을 먹은 후 허밍벨라에서 차와 케이크를 먹는 코스로... 한옥에 '차웅가'라는 나무간판을 달고 성업 중인 나물 먹는 곰에서 밥을 먹고 허밍벨라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는 하루. 물론 당장 소개팅이 없을 것 같으니 벚꽃이 지기 전에 친구의 손을 잡고 달려가야지. 곰과 새가 공존하는 곳으로.

회색 콘트리트 벽에 시원시원하게 배치한 허밍벨라 간판. 흰색 바탕에 마치 액자 느낌의 테두리를 활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옆집 샵 일구구 간판과 마치 한 집 같은 묘한 조합.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문화 #간판 #노유청 #나물 먹는 곰 #홍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