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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문학의 대가' 허먼 멜빌

많은 독자들이 「백경」의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는 허만 멜빌은 미국문학의 거성인 동시에 법률문학의 대가였다. 멜빌의 많은 중, 단편 중에 흔히들 '법률 삼부작'으로 불리는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 「수병, 빌리 버드」는 흔들리지 않는 명성을 누린다. 법률 삼부작 중에 「바틀비」가 가장 먼저 발표되었다. 멜빌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활발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 바틀비의 정체와 성격을 두고 최소한 그가 일하는 법률사무소의 열쇠 수(4개)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어 왔고 속속 새로운 열쇠가 복제되고 있다.

  • 안경환
  • 입력 2015.04.13 11:15
  • 수정 2015.06.13 14:12

허먼 멜빌은 1819년, 뉴욕시에서 아버지 알란(Allan) 멜빌과 어머니 마리아 갠스보트(Gansvoort) 사이의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소년 허먼은 아버지를 우상시했다. 그러나 독실한 캘빈교도였던 어머니의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모자간에 불화가 심했고 평생 동안 불편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2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재기하지 못한 채 죽자 남은 가족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린다. 20세에가 된 허먼은 돌파구를 찾아 선원의 길에 나선다. 1839년, 영국 국적의 선박, 세인트 로렌스(St. Lawrence)호에 수습선원(boy)으로 채용되어 리버풀을 왕복하는 대서양 항해를 경험한다. 이어서 포경선 애쿠시넷(Acushnet) 호의 수부로 남아메리카와 태평양의 장기 항해에 나선다. 배가 남태평양 마르케사스 (Marquesas) 섬에 정박했을 때 멜빌은 동료 선원과 함께 탈주한다. 극도로 비위생적인 배의 상태, 저질인 동료선원, 상급자의 가혹행위가 탈주를 결심한 원인이었다. 내륙 식인종과 조우하자 이들은 두 백인청년을 '입양'하여 보살피면서 항구로 귀환하겠다는 요청을 거부한다. 동료선원 토비 그린은 즉시 탈주에 성공하나 멜빌은 한동안 머물면서 단순하고 평화로운 삶을 즐긴다. 그러나 평화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던 멜빌은 마침 정박한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 루시 앤(Lucy Ann) 호로 도주한다. 그러나 이 배의 상황 또한 애쿠시넷 호보다 별반 낳지 않았다. 그래서 배가 타이티 섬에 정박하자 청년 멜빌은 또다시 탈주한다. 이번에는 롱 고스트(Long Ghost)라는 이름의 '의사'가 탈주에 동반한다. 이곳에서 한동안 목가적인 생활을 즐기던 멜빌은 포경선 찰스 앤드 헨리(Charles and Henry) 호에 승선하여 하와이로 향한다. 하와이에서 잡역부 생활을 하던 중 미 해군에 입대하여 전함, 미합중국(United States) 호의 수병이 된다. 수병생활 중 사병에게 채찍형이 가해지는 데 분노한 그는 1844년 함정이 보스턴에 정박하자 제대 신청을 하고 선원생활을 영원히 청산하고 작가의 길을 걷는다.1) 1846년, 식인종과 함께 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최초의 소설, 『타이피』 (Typee)를 출간하여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장 르무엘 쇼(Remuel Shaw)에게 헌정한다. 이어서 「오무(Omoo, 1847), 「레드번」 (Redburn, 1848), 「마디」 (Mard, 1849), 「화이트 재킷 (White-Jacket, 1850)를 연달아 발표한다.

1847년, 허먼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르무엘 쇼의 딸인 엘리자베스 (Elisabeth "Lizzie' Shaw)와 결혼한다. 1851년 7월, 16개월에 걸친 집필 끝에 완성한 「고래 이야기」(The Whale)를 「백경」 (Moby Dick)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한다. 이 기간 동안 아내는 물론 어머니와 형제를 함께 부양해야 했기에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린다. 1852년 「피에르」(Pierre)를 출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안정된 수입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공직을 끊임없이 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심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자 1857년, 「사기꾼」 (Confidence Man)이 출판된 직후에 가족은 그를 유럽과 팔레스타인 성지 여행에 보낸다. 1863년, 아끼던 애로우헤드(Arrowhead)저택을 팔고 뉴욕 시로 되돌아온다. 1866년에야 비로소 뉴욕세관의 하급관리 자리를 얻는다. 팔레스타인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 작가 생활을 포기하겠다고 주위에 말했다. 그러나 1874년, 주목받는 장시, 「클레어렐」(Clarel: A Poem and Pilgrimage in the Holy Land.)을 발표했고 죽기 몇 달 전인 1891년 봄에는 후일 미국문학의 명작 반열에 오르게 된 「수병, 빌리 버드」의 초고를 완성했다. 만년에 응분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대도시 뉴욕의 은둔자로 지내다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아내는 남편의 사망확인서 직업난에 세관원 대신 '작가'(writer)라고 기입하여 자부심을 지킨다.

멜빌의 생애 동안 미국은 지리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 동부의 변경, 오하이오 계곡에서 출발한 서행(西行) 장정 끝에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대지를 '개척'했다. 동부 해안의 작은 식민지 연합체가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전체를 지배하는 초강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건국의 이상과 현실적 이해가 충돌하는 내전을 겪기도 했다. 엄청난 물질적 번영이 따랐다. 철도, 전화, 전보, 재봉틀 등 수많은 산업 발명품이 국민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고, 새로운 상업 세력이 사회 발전을 이끌게 되었다. 후일 금융자본산업의 본산이 된 뉴욕 월스트리트가 새로운 미국의 상징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 새로운 문예사조가 태동했다. 멜빌이 초기 작품을 생산할 즈음 미국 작가들은 혁명과 건국의 이념을 뒤로 하고 낭만주의, 민주주의, 남북전쟁의 이념과 사조를 작품의 자양분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거장으로는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헨리 소로(Henry Thoreau), 나타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월트 휘트맨(Walt Whitman),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an Poe)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혁명을 통해 성취한 자유와 민주의 이상 아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지적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아메리카의 작가들은 유럽의 문학적 전통과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문성(文聖)의 지위에 오른 셰익스피어에 이어, 당대 작가인 디킨스도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셰익스피어, 디킨스에 더하여 톨스토이, 뒤마, 위고, 입센, 새커리 등 유럽 문호들은 미국의 문학지도에 중요한 방점을 남기고 있었다. 멜빌 또한 유럽문학 전통을 경배했고 당대 미국 작가들 중에 오로지 호손, 한 사람에게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세계문학에 불멸의 고전이 된 「백경」을 호손에게 바쳤고, 호손은 이 작품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거의 유일한 당대의 거물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백경」의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는 허먼 멜빌은 미국문학의 거성인 동시에 법률문학의 대가였다. 「백경」을 제대로 읽은 독자는 우선 책머리에 제시된 「문헌부」에 압도된다. 구약성서를 위시한 서양 고전에 나타난 고래에 관한 언급이 망라되었다. "이제 하느님은 거대한 고래를 창조하셨나니."(「창세기」1.21) "이제 하느님이 거대한 물고기를 마련하시어 요나를 삼켜버리게 하셨도다." (「요나」1.17) "햄릿, 참으로 고래 같구나." (셰익스피어, 「햄릿」3.2.17)

역사적 사실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능하면 북양을 통해 인도로 가는 뱃길을 열려고 했던 네덜란드와 영국 사람들의 항해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뜻밖에도 고래 떼들의 서식지를 세상에 밝혔다."2) "아마도 입법부가 제정한 최초의 포경법은 1695년에 네덜란드 의회가 제정한 법률일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성문화된 포경법은 없지만 미국의 어부들은 스스로 입법자가 되었다. 그들은 간단명료함에 있어서 유스티아누스 법전이나 중국의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는 협회의 정관보다도 우수하다. 분명히 그 법규는 앤(Anne) 여왕의 동전이나 작살 칼날에 새겨 목걸이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간결한 것이다."

작품에 동원된 법률문헌도 상당하다. "국왕의 통상 세입의 제 10번 째 항목은 해적과 강도행위로부터 해양을 방어하기 위해 고래, 철갑상어 등 '국왕의 어류' (royal fish)를 지정한다. 이들은 해안에 떠밀려오건 해상에서 포획하건 불문하고 국왕의 재산이 된다." (블랙스톤Blackstone)

본문 제 89장과 90장은 그 자체가 일급의 법률 리포트이다. 89장에서는 '잡은 고래'(fast-fish)와 '추적 중인 고래'(loose fish)에 관한 영국의 판결과 학설이 총동원되어 있다.

제 1조. 잡은 고래는 맨 먼저 찌른 자에게 귀속된다. 제 2조. 추적 중인 고래는 누구라도 맨 먼저 잡는 자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이 훌륭한 법전도 찬탄할 만큼 간결한 연유로 인해 발생하는 간극을 보충하는 방대한 주석을 필요로 한다. 첫째, '잡힌 고래'의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간에 고래가 사람이 탄 선박이나 보트, 돛대, 노, 9인치 밧줄, 전선, 거미줄 등, 종류를 불문하고 혼자 또는 그 이상의 선원에 의해 통제되는 특정 수단에 의해 붙들어 매어져 있을 때는 기술적으로 잡힌 고래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물고기의 '표지' 또는 기타의 공인된 소유권의 표식이 부착되어 있을 때는.... 어부들 용어로 '잡힌 고래'다.

"머리냐, 꼬리냐"(Heads or Tails)로 제목 단 90장에서는 다소 유머러스한 전래의 법리들이 옮겨져 있다. "고래는 왕이 그 머리를, 왕비가 그 꼬리를 가지기에 매우 적절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3) "누구나 그 나라의 해안에서 고래를 잡은 경우에 국왕이 명예 작살 잡이의 지위에서 머리를 차지하고, 왕비에게는 공손하게 꼬리를 갖다 바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 분할법은 고래는 사과와 마찬가지로 중간에 남는 부분이 없다는 의미다. ... 영국의 철도가 항상 왕가의 편의를 위해 특별열차를 만드는 의례를 존중한 것이다."

만약 멜빌이『백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중, 단편으로 세계문학의 중심에 섰을 것이라고들 한다. 멜빌의 많은 중, 단편 중에 흔히들 '법률 삼부작'으로 불리는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 「수병, 빌리 버드」는 흔들리지 않는 명성을 누린다. 이 작품들은 법적소양을 갖추면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멜빌은 최초의 작품, 「타이피」를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장 르무엘 쇼(Lemuel Shaw, 1781 - 1861)에게 헌정한다.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쇼라는 인물은 단순한 판사가 아니었다. 그는 연방대법원의 조셉 스토리 대법관(Joseph Story, 1779-1845), 뉴욕 주 형평법원장, 제임스 켄트(James Kent, 1763-1847) 등과 함께 당대의 최고지성인 법률가의 한 사람이었다. 매사추세츠 주는 모든 면에서 미국 동부의 정치, 행정, 사법의 중심이었고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의 판결은 인접 주는 물론 미국 전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쇼는 30년(1830-1860) 동안 이 법원에 재직했다. 그는 멜빌의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때 그 여동생의 연인이었다. 금맥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난 친구가 빈털터리로 죽자 그가 남긴 열 세 살짜리 아들의 후견인이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딸과 혼인 시켰다. 허먼은 결혼에 앞서 첫 작품을 결혼예물에 바치듯 장인에게 바쳤다.

멜빌이 「백경」을 쓰기 위해 공공도서관을 출입하면서 치밀한 문헌조사를 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작품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멜빌은 정평 있는 독서가였다. 멜빌의 독서습관은 쇼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다. 쇼는 공적으로 가부장적 판사였듯이 멜빌에게도 온정적인 가부장이었다. 경제적 고비 때마다 사위를 도왔으며 여행비용을 대고, 애로우헤드 (Arrowhead)저택의 구입 자금을 지원했다. 1861년 그가 죽으면서 남긴 약간의 유산은 멜빌의 생활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1884년, 쇼의 재산을 대부분 상속한 장자 르무엘 쇼 2세가 죽으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겼고 그 덕에 멜빌은 세관원을 사임하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1885년, 멜빌이 「수병, 빌리 버드」를 구상할 때, 쇼의 다른 아들들은 곧 설립될 아버지의 기념관에 일체의 소장 자료를 기증했고 멜빌이 이 자료들을 접근했다는 정황이 확인된다.

「바틀비」

법률 삼부작 중에 「바틀비」가 가장 먼저 발표되었다. 멜빌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활발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근래 들어와서 문학의 영역 밖에서도 바틀비는 인간의 소외와 사회적 책임을 토론하는 소재로 널리 활용된다.

스토리는 일인칭 법률가 화자의 절대적 지배 아래 전개된다. 그의 입을 통해 '가장 이상한 필경사' 바틀비가 출현했다 사라지는 줄거리가 전해진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직업인이다. 자신의 직업적 성취와 평판에 상응하는 양식에 더하여,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수준의 인간애를 보유한 것으로 자부한다. 그러나 안정된 삶을 영위하면서 능숙한 처세술의 소유자인 그도 타인의 내면적 고통에는 무력하다. 피고용자에게는 합리적인 사용자인 그도 사무실을 찾는 고객과 동료법률가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기이한 필경사'를 끝내 축출한다.

외형적으로는 시종일관 화자의 시간적 공간적 지배가 유지된다. 그러나 플롯이 진행될수록 독자는 화자가 지닌 정보가 지극히 제한되고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깨닫는다. 화자에게 성공과 행복의 척도는 물질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젊어서부터 평탄하게 사는 게 제일이라는 확고한 신조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흔히들 열정적이고 역동적이고 때때로 논란에 휘말리기 십상이라는 평판이 있는 직종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일로 일상의 평화가 깨진 적은 전혀 없었다. ... 대신에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또는 등기권리증이나 다루면서 안온한 은신처에 마련된 유유자적한 평화를 즐기며 산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일러 더없이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화자에게는 안정된 물질적 부를 축적, 유지하기 위한 일상적 질서, 인내와 신중함이 좌우명이자 생활수칙이다. 그러나 부가 늘어날수록 비례하여 일상이 불안정해진다.

작품의 주인공, 바틀비의 정체와 성격을 두고 최소한 그가 일하는 법률사무소의 열쇠 수(4개)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어 왔고 속속 새로운 열쇠가 복제되고 있다. 소설이 발표된 직후에 바틀비의 실제 모델을 찾기도 했다. 그리하여 헨리 소로(Henry Thoreau)의 우화로 보기도 했다. 소로의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과 「월든 숲속이야기」(Walden)에 잘 나타난 대로 인간사회를 외면하고 은거생활을 고집하면서 국가가 부과한 세금조차 거부한 극도의 개인주의적 비타협적 태도를 비판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런 입장에서는 바틀비가 마지막에 눈을 부릅뜨고 죽는 것도 그가 집요하게 추구하던 '수동적 저항'을 완성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처절한 운명을 다룬 우화로 보아 필경사를 작가의 분신으로 보는 평자도 있다. '수취인 없는 편지'(dead letter)가 무의미하듯이 독자 없는 작품도 무의미하다. 그러기에 절대 자아를 추구하는 작가는 세상이 요구하는 글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직업적 비애를 호소한 작품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런가하면 법률가와 바틀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심리학적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작품의 부제는 「월스트리트 이야기」(A Story of Wall Street)이다. 월스트리트는 물론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뉴욕의 중심거리다. 금융과 법률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핵심 기재가 결합하여 인간성을 유린하는 사회다. 또한 월스트리트는 어원 자체가 상징하듯 '벽'으로 차단된 사회를 의미한다. 인간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각종 벽과 담이 쌓여 있는 숨통 막히는 사회다. 바틀비의 책상이 놓여 있는 창문 쪽에는 높은 벽만 보일뿐이다. 일을 하다말고 그는 종종 면벽 공상(dead-wall revery)에 잠기곤 한다. 자신을 바깥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한 벽을 항해 묵묵히 저항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의 책상 앞에 우뚝 서 있는 담, 그가 죽은 교도소의 두터운 담은 바로 인간 사회 자체를 상징한다. 주인공이 필경사라는 것, 그리고 그가 변호사의 고용인이라는 점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대에 필사는 주로 교육받은 노예들이 담당했다. 필사란 지루할 뿐만 아니라 굴욕적인 작업이기도 했다.4)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영혼을 규율하는 금욕이라는 측면에서 효용이 컸다. 중세의 필경사는 수도원에 소속된 하급 성직자 계급에 속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회칙은 기도와 독서는 물론 육체노동도 요구했다. 육체노동에는 필사도 포함되었다. 수도원 회칙을 정한 초기 설립자들은 필사를 그다지 고귀한 행위로 여기지 않았으나 드물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독서를 명하는 수도원의 회칙을 지키기 위해 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가르쳐 준다.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얼마간의 책이라도 모을 수 있게 된 것은 '스크립토움' (scriptorium)이라는 시설 덕분이었다. 스크립토움이란 수도사들이 오랜 시간 앉아서 필사작업을 하던 공간을 의미한다. 바틀비의 작업 공간의 원조라고 할까?

"나는 새로 개정된 주 헌법에 의해 형평법원 사법관 직이 느닷없이 폐지된 것은 시기상조였다고 믿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종신 수입을 기대했는데 단지 몇 년 치 봉급을 받았을 뿐이다." 화자의 입을 통해 언급된 형평법원의 폐쇄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평은 실정법을 초월하는 정의의 개념이다. 형평법원은 멜빌 시대의 최고의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에 잘 그려져 있듯이 문자 그대로 '형평'을 챙김으로써 구체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설립된 법원이다.5) 엄격한 선례와 배심재판을 요구하는 (전문용어로 '코몬로 (common law)사건'이라고 한다) 왕립법원(royal court)의 판결이 지나치게 경직된 나머지 오히려 정의에 위배되는 결과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국왕의 대리인인 형평법원장이 구체적 사안에 적합한 구제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건국 초기 각 주는 영국의 선례에 따라 형평법(equity)사건을 전담하는 형평법원(Chancery Court)을 설치했다. 그러나 1846년 뉴욕 주가 헌법 개정을 통해 이를 폐지하여 주 대법원에 편입하자 다른 주들도 뒤따랐다. 이제 형평법원은 역사적 유물이 되었다.

형평법은 18세기에는 '자연적 정의'(natural justice)에 호소하는 실체적 법리였으나 19세기 후반에는 단지 절차적 구제의 수단으로 한정되었다. 형평법은 이를테면 온정적 가부장제의 이상을 구현한다. 1863년에 출간된 이 작품의 화자를 폐지된 형평법원의 사법관(master)으로 설정함으로써 낡은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삼는다. 또한 월스트리트가 형평법의 몰락을 주도한 세력으로 그려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형평의 법리는 자선(charity)의 이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형평법원의 사법관이 담당했던 많은 인상사건(personal injury)에서 피해에 대한 구제수단을 결정했다. 화자는 그 대가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고 이에 더하여 정신적 이익을 얻고자 바틀비에게 자비를 베풀려 한다. 그러나 바틀비의 수동적인 저항으로 변호사의 자비는 설 땅을 잃는다. 그는 필경사를 자비롭게 대하고 싶으나, 결과적으로 무자비하게 대하게 되었다.

멜빌의 생애 동안 미국사회의 권력판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권력의 주도권이 남성법률가에게로 이전된다. 멜빌의 개인적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화자의 법률실무는 대중의 시선이 주목되는 배심재판을 피하고 오로지 판사 한 사람을 상대로 한다. 이 법원이 폐지된 것은 화자에게는 유감이지만, 시민의 사법참여를 갈구하는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나 당연한 새 시대의 요구이기도 하다.

화자인 법률가와 대상자인 바틀비 사이에는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과 습성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 법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추정'(assumption)의 원리로 설명한다. 추정은 반증이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유효한 잠정적 사실이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번복될 수 있는 한시적 진리인 셈이다. 그러나 행위자 자신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에 차 있다. 법률가의 생활철학인 추정의 원리는 바틀비의 '우선선택권'(preference)의 원칙과 대비된다. 바틀비는 "하는 (또는 안 하는)"편을 '택'(prefer)한다. 이 차이는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바틀비는 전후좌우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한 끝에 내린 추정을 가차 없이 무력화시킨다. 변호사는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바틀비가 제거될 것으로 추정하나, 바틀비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자유의사에 기한 선택 (그것이 작위든 부작위든)은 불확실한 결과를 감수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바틀비에게 있어서 '택한다' 라는 것은 자신의 택하는 행위의 의미를 지각하고,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를 책임지는 일이다. 한일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바틀비의 행위에 따를 결과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그는 모든 삶의 행위가 무의미함을 알고 신념에 찬 죽음을 택한다. 그에게 죽음을 유일하고도 불가피한 최종 선택인 것이다.

「바틀비」는 프랑스 (모리스 로네 Maurice Rone감독 1976) 영국 (앤소니 프리드먼 감독 Anthony Friedman 1972), 미국 (조너선 파커 감독, Jonathan Parker 2001)에서 순차적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각각의 영화는 특색이 있어 바틀비가 기거하던 사무실의 열쇠만큼이나 다양한 관점을 부각시켰다.

「베니토 세레노」

1855년, 10월, 11월, 12월, 3차에 걸쳐 발표된 중편, 「베니토 세레노」는 발표 당시에는 특별한 호평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인 1856년, 「바틀비」, 「엔칸타다스 군도(群島)(The Encantadas), 「종루(鐘樓)」(The Bell Tower) 등과 함께 묶여 중, 단편집 「피아자 이야기 (Piazza Tales)」로 출간되었다. 작가의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중, 단편집이었다. 작가 자신은 작품집의 제목을 「베니토 세레노와 기타 소표(素描)」(Benito Cereno and Other Sketches)로 명명하여 이 작품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나타내었다. 그로부터 거의 70년 후인 1924년에야 비로소 다시 출판되었다. 그동안 흑백 인종문제가 심화되면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게된 것이다. 1928년, Edward J. O'Brien이 미국의 베스트 중, 단편 15편을 선정하면서 「베니토 세레노」를 일러 "미국문학상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한 후로 많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비평을 내놓았다. 실존인물, 아마사 델라노 (Amasa Delano, 1763-1823)의 기록, 「항해일지」(A Narrative of Voyages, 1817)가 작품의 원재(原材)인 만큼 원재를 창작에 활용하는 기법을 두고 논의가 벌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작품의 주제는 의심할 바 없이 인종문제다. 반란이 일어난 배의 이름이 신대륙의 인종문제의 원초적 원인을 제공한 인물, '크리스토퍼 콜론'(콜럼버스)이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델라노 선장, 베니토 세레노, 흑인 바보, 세 사람 중 누구의 관점에 서느냐에 따라 선상 노예반란의 의미와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델라노는 순진한 낙관주의자 미국인의 전형이다. 그는 선의, 낙관, 활력에 가득 찬 신세계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그는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의 소유자로 흑인이 백인을 지배하는 상황을 상상조차 못한다. 그에게 흑인노예는 '뉴펀들랜드 개'처럼 순하고 튼튼한 애완동물일 뿐이다. 흑인 노예가 어린 아이와 함께 노는 모습은 천상에서 여러 동물이 자유분방하게 노니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작은 체구의 흑인 바보가 돈 베니토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을 보면서 이상적인 주종관계라고 찬탄한다. 그는 부하를 효율적으로 통솔하는 능력을 보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흑인이라는 열등한 인종에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백인의 최대 미덕이다. 이런 순진무구함 때문에 자기가 직면했던 객관적인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잠재적인 약탈자에게 치명적인 정보까지도 제공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돈 베니토는 봉건제를 주축으로 하는 구시대, 구대륙을 상징한다. 그는 바보를 재판에서 대면하기를 거부한다. 심지어는 피고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자신이 바보의 강요에 의해 노예 생활을 했기에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란이 평정되고 고국에 돌아갈 수 있음에도 완강하게 거절하고 외딴 수도원에 은거하다 29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눈앞에서 벌어진 흑인 노예들의 잔혹한 행위에 충격을 받아 삶의 의욕을 잃고 너무나도 나약하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것이다. 죽기 얼마 전에 무엇이 그렇게나 당신을 괴롭히느냐는 델라노의 물음에 '흑인'이라고 간신히 대답한다.

바보는 흑인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무력하게 만든다. 거대한 체구에 반비례하여 지능이 낮고, 타고난 나태함에다 사악함까지 더하여, 우수한 인종인 백인에 종속된 삶을 사는 것이 흑인의 숙명이자 인간세계의 자연스러운 질서라는 백인우월주의 통념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의 주인공은 흑인 바보며, 작가는 바보를 '엉클 톰'의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도 등장했다. 바보를 통해 작가는 새 시대의 흑인지도자 상을 제시했다는 주장이다. 이 작품이 출간되기 바로 직전 해에 출간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스토 부인(Harriet Beecher Stowe)의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 1852)에 제시된 이상적인 흑인상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톰 아저씨처럼 착하고 순종하는 무식한 흑인 대신 반항하는 지적인 청년지도자 흑인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196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금상이 수여된 프랑스 영화 「베니토 세레노」는 (1967 제작, 감독 Serge Roullet) 바보의 관점을 부각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멜빌은 노예문제에 관한 쇼 판사의 판결문을 포함하여 많은 법률문서를 읽었다. 열렬한 연방주의자였던 쇼에 의하면 연방정부는 가족이고, 남북전쟁은 가족 간의 분쟁이다. 가족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코 해체할 수 없는 신성한 공동운명체다. '탈퇴'(secession)를 선언하고 연방을 뛰쳐나간 남부주연합(Confederate States)이나 마찬가지로 노예제의 전면적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 급진주의자도 연방가족(federal family)의 해체를 획책하는 적이자 악이었다. 1849년의 한 판결에서 쇼 판사는 보스턴의 공립학교에서 인종간의 분리 교육을 지지하는 '평등하되 분리'(separate but equal)을 선언했다. 이 법리는 연방대법원의 플레시 판결 (Plessy v. Ferguson, 1896)에 반영되어 1954년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에 의해 번복될 때까지 미국의 평등권법리의 근간이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작품의 마지막에 첨부된 '진술확약서' (deposition)라는 것을 통해 '법적사실'로 확정된다. 그러나 그 법적 사실이 진실을 대변한다는 보증이 없다. 진술확약서는 법적증언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진술로만 구성되어 있다. 흑인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 흑인은 자신의 사건에 관해 증언할 법적 능력이 없다. 또한 작가가 지적하듯이 이 문서는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것도 전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편집'한 초역(抄譯)본이다. '번역자는 반역자'6)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해묵은 격언이 있다.7) 아무리 두 언어에 함께 통달한 번역자의 힘을 빌려도 두 언어 사이의 여행에는 필연적인 오류와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다. 더더구나 편집이 동원된 초역으로 마감한 법적서류가 어찌 총체적 진실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이 소설은 아마사 델라노의 「항해일지」에 더하여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실제사건이 투영되어 있다. 1841년의 '아미스타드 사건'이다.8) 아프리카에서 납치된 흑인들이 포르투갈 국적의 노예선에 실려 스페인 령 쿠바의 아바나까지 운송되어 온다. 긴 항해 중 절반 이상이 죽어 고기밥 신세가 된다. 목숨을 부지한 44명의 화물 인간은 웃돈을 치는 서인도 농장주에게 팔려 아미스타드(La Amistad) 호에 선적된다. 이들 아프리카 산 '화물 인간'들은 '우정'이라는 위선의 선명에 도끼를 던지며 반란을 일으킨다. 항해에 필요한 두 사람만 남기고 스페인선원을 모두 살해하고는 태양을 가리키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자고 명령한다. 자유를 향한 동진(東進)을 계속의 항해를 계속하던 중 식수를 구하러 뉴욕 주 롱 아일랜드 근처 섬에 들렸다가 미국 해군에 나포된다. '태양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 해로는 실은 죽음에 이르는 뱃길이 된 것이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지위와 법적 처리에 관한 뉴헤이번(New Haven, 코네티컷 주) 소재 연방지방법원의 재판이 있은 후(1839) 항소법원을 거쳐 (1840) 연방대법원의 최종판결(1841)로 자유의 몸이 된다. 그 지난한 과정을 1997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시간 반으로 압축하여 영상으로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9)

실제 재판에서 전직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 1767-1848)가 아프리카인들의 변론에 나섰다. 전직 대통령이 변호인으로 나선 사실은 이 사건의 비중을 가늠케 한다. 마치 국정 연설을 연상시키는, 무려 여덟 시간에 걸친 구두변론을 담은 총 80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변론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자유의 문서로 손색이 없다. 그의 변론은 미국의 건국과 헌법의 초안을 주도한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이상에 호소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판결문을 쓴 조셉 스토리(1779-1845)의 말을 빌리자면 '강렬한 수사와 신랄한 풍자'의 극치였다. 대법원은 아미스타드의 흑인들은 어느 나라 법을 기준으로 보아도 자유인이었고, 이들은 불법적으로 납치되었기에 노예의 신분과 재산을 전제로 하는 법리가 적용될 수 없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렸다. "스페인 법에 의해서도 이들은 자유인이었다. 불법적으로 체포, 납치, 수송된 자유민이다. 이들이 박탈당한 자유를 되찾기 위해 행한 잔혹한 방법은 유감스런 일이나 불가피한 자구행위였다." 이들의 선상반란이 '자연권'의 행사이자 정당방위라는 변호사의 주장을 정면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나 행사책임은 불문에 붙이기로 한 것이다. 10여년 후에 나온 소설 속에서 보다 인권의식이 앞선 선구적 판결이었을까?

「수병, 빌리 버드」

멜빌이 죽고 난 지 33년 후인 1924년, 유작 「수병, 빌리 버드」가 출판된다. 자칫 영원히 묻혀버릴 뻔 했던 작품이다. 1891년 9월, 아내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초라한 장례를 치른 후 유품을 정리한다. 각종 시집과 철학서적으로 가득 찬 책장에는 고인이 생전에 수집했던 판화와 복사판 그림들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육중한 프랑스제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원고를 모아 작은 여행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그 가방은 20년 동안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연필로 쓴 난필 원고 340매 뭉치가 들어있었다. "1888년 11월 16일 금요일 시작, 1891년 4월 19일 책의 끝(End of Book)"이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 세관을 그만 두고 둔 후, 죽기 직전까지 이 작품에 매달린 것이다. 이 중편은 작가 멜빌이 세상에 남긴 '최종 유언' (last will and testament)이 되었다. 작품을 헌정한 잭 체이스 (Jack Chase)는 작가가 「미합중국」 (United States)호에 승선했을 때 만난 상급자였다. 율리시스처럼 현명하고 넬슨처럼 용맹하며 인자하고 박식한 인물로 「화이트 재킷」(White Jacket)에 묘사한 한 바 있었다. 그래서 「수병, 빌리 버드」를 작가의 '정신적 자서전'으로 평가하며 「백경」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멜빌이 심도 있게 다루었던 '신과의 다툼'을 완결하는 작품이라고 평한다. 그런가 하면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을 그린 알레고리라는 해석, 천진난만한 소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파멸과 정신적 부활이라는 해석, 아담의 부활과 악마에 의한 재 파멸이라는 주장, 권위적인 아버지를 극복해야 하는 아들의 성장과제를 제시했다는 주장, 순진무구한 인간이 악으로 가득 찬 풍진 세상에서 감내해야 할 불의를 고발한 작품이라는 주장, 시대정신에 체포된 무고한 인간의 원형적 비극을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 자의적인 법에 유린되는 정의를 다룬 작품이라는 주장, 또는 미세한 세속의 법에 유린된 인간 본연의 비애를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 등... 실로 다양하기 짝이 없다. 이렇듯 백가쟁명의 해석을 종합하여 사회적 권위와 개인적 자유, 구체적 정의와 추상적 선 사이의 대립과 충돌을 심도 있게 다룬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전쟁과 규율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심오한 법철학적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타락 이전의 아담에 비유되는 빌리 버드, 악의 구현체이면서도 선을 인지할 능력을 구비비한 클래가트, 그리고 고귀한 이상과 비정한 현실을 조화시키는 능력을 구비한 '별같이 빛나는' 비어함장, 세 인물 중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작가의 의도를 달리 해석해 내기도 한다. 빌리를 주인공으로 보아 작가의 자전적 비극으로 보는가 하면, 클래가트에 초점을 맞추어 사악한 세태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 태도에 주목하기도 한다. 비어함장을 주인공으로 보면 사회제도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선한 인간을 희생시켜야 하는 심판자의 고뇌를 깊이 다룬 작품이 된다.

법률가 독자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비어가 주인공이다. 작가의 장인, 쇼 판사가 비어의 모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0)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아름다운 청년, 빌리를 전시 질서의 유지라는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처형해야 하는 전시 지휘관이 느끼는 연민과 자책의 감정은 모든 재판관에 공유된 것이다.

르무엘 쇼 판사는 인간이 만든 법은 보다 상위에 있는 선험적인 '고차의 법' (higher law) 을 이유로 거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국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 북부 휘그당 법률가 (조셉 스토리, 다니엘 웹스터와 같은)들에게 연방헌법은 신성한 문서였다. 쇼에게 연방의 법은 신성불가침이다. 비어함장의 작중 연설의 뿌리가 어딘지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반란법에 의거하여 재판을 하고 있소. 자식이 아비를 빼 닮을 수밖에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반란법은 그 정신적 모체인 전쟁을 빼 닮았소. ... 전쟁은 정면만을, 다시 말하자면 외형만을 주목한다네. 그리고 반란법도 전쟁의 자식으로서 아비를 본받아 외형만 바라본다네. 버드에 범죄의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네.(21장)

전쟁 중의 반란과 항명, 군 질서의 유지와 공정성이 의심스러운 약식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은 후세 작가의 창작에도 영감을 주었다. 1951년, 허먼 워크( Herman Wouk, 1915-2014 11 현재 생존)는 2차 대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케인호의 반란」(The Caine Mutiny)을 발표하였고 1954년, 은막(銀幕)의 영웅, 험프리 보가트의 예기(藝妓)가 빛나는 영화(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로 재생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영화의 고전으로 남아있다.

"미 해군 역사상 선상반란은 한 건도 없었다."라는 자막이 영화의 오프닝 신에 비친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세계 제2차 대전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군의 사기를 보호하려는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다르다. 적어도 2건의 항명, 반란 사건이 발생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1942년의 소머스 호 사건(USS Somers)과 1849년 유잉 호(USS Ewing)사건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에르바 부에나 (yerba buena) 섬에 유잉 호 반란사건의 주범들의 무덤이 있다.

소머스호 사건은 당시 정가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소머스 호는 해군 중간간부의 훈련선이었다. 배에 승선했던 장교 한 사람과 수병 셋이 반란 혐의로 약식 재판 끝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주범으로 사형당한 청년 장교 필립 스펜스는 당시 전쟁장관 존 스펜스의 아들이었다. 유능한 법률가로 후일 알렉시스 토크빌 (Alexis Tocqueville)의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1835)의 편집자이기도 한 스펜스 장관은 소머스 호의 함장 맥켄지를 살인혐의로 법정에 세운다. 맥켄지도 당대의 식자층에 속했다. 서둘러 약식 재판을 할 만큼 위급한 상황도 아니었고 불과 나흘만 항해하면 뉴욕 항에 정박할 수 있는 거리였는데도 정식재판도 없이 처형한 것에 대한 불만과 의혹의 여론이 팽배해 있기도 했다. 군사법정은 매켄지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대중은 승복하지 않았다.11) 벨빌의 외사촌이 (Lt. Guert Gansevoort),이 배에 초급장교로 승선하고 있었고, 이 부당한 재판을 전해들은 멜빌은 「화이트 재킷」(White Jacket)(1850)에서 이 사건을 거론했고 최후의 작품 「수병, 빌리 버드」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했다.(제21장)

대학사회에서도 필립 스펜서는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다. 엄청난 지적 탐구에 몰두하던 대학생이 모험의 길을 찾아 해군에 입대했고, 그의 지적 상상력과 다소 치기 어린 영웅심을 수용하지 못하는 군대의 희생물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스펜스는 동료들을 부추겨 배를 빼앗아 낭만적 해적질을 할 것을 음모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어쨌든 이따금씩 스펜서의 원혼이 대학 주변을 배회한다는 괴담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를 시조로 받드는 동아리(fraternity)도 있었다. 필자가 학생생활을 한 1980년 초기까지도 미국의 중서부 일부 대학에 문제 동아리의 후예가 남아 있었다.

스펜서 장관도 이루지 못한 아들의 복수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경력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그는 1844년, 연방대법원판사 후보에 지명되었으나 상원의 인준에 실패했다. 또한 이 사건은 미국 해군사관학교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란에 놀란 정부는 정규교육을 통해 해군간부를 양성할 필요를 절감하고 1845년 해군사관학교(US Naval Academy)를 창설했다.

「바틀비」나 「베니토 세레노」와 마찬가지로 「수병, 빌리 버드」도 영국과 미국에서 여러 차례 영상화되었다.12) 피터 유스티노프(Peter Ustinov)감독의 1962년 영국 영화 (로버트 라이언, 피터 유스티노프, 멜빈 더글라스 주연)가 아직도 「빌리 버드」 영화의 '원조' 지위를 누린다. 영화에 더하여 텔레비전 드라마와 오페라도 만들어졌다.

* 이 글은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 수병, 빌리 버드 - 허먼 멜빌 법률3부작」(안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15.3.) 옮긴이의 말 중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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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멜빌은 미국 독립선언은 불의의 법에 저항할 권리를 부여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수병들에 대한 채찍질이 허용되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를 허용하면 "독립혁명은 허사고 독립선언서는 기망의 문서일 따름이다." 라며 분개했다. 「화이트 재킷」(White Jacket)

2) McCulloch's Commercial Dictionary

3) De balera vero sufficit, si rex habeat caput, et regina caudam 헨리 브랙턴 (Henry de Bracton (c. 1210 - c. 1268) 「잉글랜드의 법과 관습」(De Legibus et Consuetudinibus Angliae (On the Laws and Customs of England) 3장 3절.

4) Steven Greenblatt, The Swerve: How the World Became Modern, (2011); 이혜원 옮김 「르네상쓰 1417년 :근대의 탄생」 (까치, 2012) 62쪽 이하.

5) 특히 「음산한 집」(Bleak House, 18`)에서 형평법원(High Court of Chancery)의 운영상 무원칙, 부조리에 대한 사실적이고도 풍자적인 고발을 담았다.

6) translators is traitor, traduttore, traditore.

7) Brook Thomas, Cross-examination of law and literature: Cooper, Hawthorne, Stowe and Melvil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Chs. 6, 7,8.

8) U. S. v. The Amistad, 40 U. S. 518,(1941).

9) 안경환,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7). 271-278.

10) Richard Weisberg, Failure of the Words: The Protagonist As Lawyer in Modern Fiction( Yale University Press, 1984) 131-170.

11) Harrison Hayward ed., The Somers Mutiny Affair, (Eaglewood Cliffs, 1959)

12) 소머스 호 사건 자체도 여러 차례 텔레비전 드라마로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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