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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점들 "골목 만물상, 쓰러지게 놔둘 건가요"

ⓒ한겨레

첫 손님은 문을 연지 40분 만에 들어왔다. 교복 입은 여중생은 1만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맡기고 과자(100원)와, 신발주머니(1500원) 등을 샀다. 현금으로 돌려주지 않는 잔금은 문구점 칠판에 학생의 이름과 함께 적혔다. 그 뒤로도 초등학생 손님들이 드문드문 들어왔지만 손님들의 주머니에선 짤랑짤랑, 동전만 나왔다. 등교시간인 오전 9시 이후엔 사람 발길이 뚝 끊겼다. 지난 1일 찾아간 경기도 부천시 원미초등학교 뒤 원미문구점이 올린 오전 매상은 1만원이 채 안됐다.

문구점 주인 이종문(60)씨는 대기업에서 12년간 일하다 이른바 ‘명예퇴직’을 한 뒤 이 문구점을 차렸다. 어느덧 19년째 장사를 한다는 그는 “올해처럼 힘들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초등학교 주변으로 문구점이 2개에 불과한데도 9개의 문구점이 경쟁할 때보다 벌이가 안 된다. 방학이 길어지고, 노는 토요일이 생기면서 방학기간이나 주말은 문을 열어도 파리만 날린다. 학습준비물 없는 학교 지원제도와 대형마트까지 생기면서 문구용품을 찾는 손님은 더 줄었다. 지금은 하루 매출이 많아야 14만원이다. 3월은 신학기로 장사가 잘 되는 달이지만 3월 매출도 신통찮았다. 50만원씩 주는 월세는 지난해 12월부터 계속 밀린 상태다.

그에게도 하루 200만원어치도 팔던 호시절은 있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체육복과 응원도구를 사려는 이들로 가게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구점 매출 대부분이 자잘한 군것질거리와 문구점의 3분의1을 떼어낸 공간에서 파는 분식이다. 노트, 필기구류 등 학용품은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10분 거리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2만원대 리듬악기 세트 같은 건 이제 들여놓지도 않는다. 하교시간인 오후 1~4시 사이에 반짝 몰렸던 아이들도 학용품 보다는 군것질거리와 오락기에만 손을 댔다.

“대형마트가 안파는 것 없이 다 파니 골목상권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근린시설로 존속시켜야하는 업종도 있는 거예요. 문구점은 골목에서 만물상 역할을 했는데 다 쓰러지게 생겼어요. 도화지 하나 사러 마트를 가야 하는 게 맞는 겁니까?”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국 문구소매점은 1997년 2만6914개로 정점을 찍은 뒤 2000년대 들어 매년 1000여개씩 줄어들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문구소매점 절반 이상인 8743개가 연매출 5000만원 이하의 영세 점포들이다. 전국 문구시장 규모는 1조6000억원이다. 이 가운데 학용품 시장 규모는 업계 추산 약 5000억원이다. 나머지는 프랜차이즈 사무용품 시장으로 보고 있다. 동반성장위에 제출한 대형마트 3사의 문구용품 매출은 약 2500억원으로 학용품 시장의 절반을 차지한다. 2011년 시행된 학습준비물 제도에 이어 대형마트의 공세로 힘들어진 문구업계는 2013년 8월 동반위에 문구점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올해 3월 동반위는 대형마트에 할인행사 자제, 묶음단위 판매 등 자율적 사업축소만 권고하는데 그쳤다.

이에 문구점 업계가 반발하자 동반위는 다시 재조정에 나섰다. 지난 5일까지 대형마트와 문구업계 양쪽에 의견서를 내도록 해 중재를 진행중이다. 이성원 전국학용문구협동조합 사무국장은 “동네문구점이 살기 위해서는 대형마트가 판매하는 학용품의 품목 제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동반위는 “양쪽의 협의를 통해 적합업종 지정을 노력중”이라고 말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대형마트에서 문구는 상품구색에 불과할 뿐 매출에 미치는 영향은 적다. 그리고 대형마트 판매액보다 알파 같은 대형 사무용품 프랜차이즈들의 매출이 더 큰데 우리만 타깃이 되는 상황이 좀 억울하다”고 말했다.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동네 책방이 도서정가제 등의 자구노력으로 살아나고 있듯 문구점 스스로도 변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성원 사무국장은 “학습준비물 없는 학교 제도, 대형마트 등 문구점을 위협하는 외부 환경요소가 지금은 너무 크다. 동네 서점처럼 다 없어질 상황에 가기 전에 이런 외부 환경제약부터 줄이는 게 시급하다고 봤다. 적합업종 지정을 통해 숨고르기가 가능해지면 지금도 노력중인 카드단말기 구비라든가 가격정책, 낡고 비위생적이라는 인식 등을 없애기 위한 노력들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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