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거장'보다 '노장'이 되고 싶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꼭 '거장'이 돼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느 분야의 '최고'만이 살아남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곳이 아니다. 지난 2013년 세상을 떠난 스페인 감독 헤스 프랑코는 82년 간 250여편 이상의 영화를 감독, 제작했다. <뱀파이어 킬러 바비>, <백인 식인종 여왕> 등 제목만으로도 그 허접함이 느껴질만한 시(C)급 영화들을 평생 만들어왔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한 해 동안에도 네 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현실적으로 나 같은 감독이 부러워야 할 대상은 임권택 감독이나 폴란스키가 아니라 프랑코다. 거장이 아니더라도 죽을 때까지 영화만 만들면서 살 수 있다면.

  • 조원희
  • 입력 2015.04.08 14:10
  • 수정 2015.06.08 14:12

우리 나이로 108살. 포르투갈의 현역 최고령 영화 감독 마누엘 드 올리비에라가 세상을 떠났다. 1908년생이면 소설가 김유정, 시인 유치환 등과 동갑이다. 70대 이후가 전성기이긴 했지만 어쨌든 생전 영화역사 전체를 경험한 인류 유일의 감독이었던 셈이다. 말년의 작품들은 단지 '현역 최고령 감독'의 작품으로 우대를 받을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103살에 찍은 <게보와 그림자>는 연극적 설정과 회화적 미장센이 심도 깊은 내부적 서사를 발현하는 작품이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걸작 <나는 집으로 간다>는 그의 나이 93살에 발표됐다.

영화 감독들이 모여서 소원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 많은 이들이 '죽을 때까지 영화 만들고 싶다'는, 어떻게 보면 순진무구하고 소박해 보이는 희망을 내놓는다. 누벨바그 시대의 반항아에서 시작해 종잡을 수 없는 실험의 길을 여전히 걷고 있는 장-뤽 고다르는 85살. 최근 마티유 아말릭과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내놓은 로만 폴란스키는 82살. 상업영화 필드의 질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최고의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85살이다. 그들을 쉽게 부러워할 수 있을까. 고다르나 폴란스키는 일찍이 현대 영화의 기법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스트우드는 아직도 전성기다. '거장'이 돼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또 부러워하는 한국 감독은 75살의 임권택 감독이다. 한국에서 102번째 장편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샘이 날 지경인데 지난 20여년 간 내놓는 작품마다 삶의 깊은 성찰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이번에 내놓은 <화장>도 마찬가지다. 삶의 역동성과 죽음의 허망함을 젊음과 욕망이라는 매우 원초적인 감정을 통해 스크린 위에 투영했다. 현재형의 영화들과 그 양식적 차이가 일부 존재하는데, 그것마저 반갑다. 거장다움이 느껴지는 영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꼭 '거장'이 돼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느 분야의 '최고'만이 살아남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곳이 아니다. 지난 2013년 세상을 떠난 스페인 감독 헤스 프랑코는 82년 간 250여편 이상의 영화를 감독, 제작했다. <뱀파이어 킬러 바비>, <백인 식인종 여왕> 등 제목만으로도 그 허접함이 느껴질만한 시(C)급 영화들을 평생 만들어왔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한 해 동안에도 네 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현실적으로 나 같은 감독이 부러워야 할 대상은 임권택 감독이나 폴란스키가 아니라 프랑코다. 거장이 아니더라도 죽을 때까지 영화만 만들면서 살 수 있다면. 감독들이 너무 조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거장이 되겠다는 것보다 더 큰 욕심처럼 느껴진다.

2009년 2월 1일 스페인 영화감독 헤스 프랑코가 부인과 함께 마드리드에서 열린 고야필름페스티벌에 입장하고 있다. 그는 이날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마누엘 드 올리비에라 #헤스 프랑코 #임권택 #영화감독 #조원회 #노장 #거장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