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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고, 진실이 무엇이냐고?

[뉴스 AS]

사건 당사자 자처하면서도 신원을 밝히지 않은 블로거 글을

학부모·학교·시교육청 등 취재원들의 증언보다 더 믿어야할까

사건 본질은 막말 여부보다 급식비 못낸 학생에 상처 준 것

반전 드라마는 언제나 관객의 마음을 잡아끕니다. 어떤 부실한 소재라도 적절한 반전이 준비되면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게 마련입니다. 어제(6일) 하루 모든 10대들과 10대 동생을 둔 언니·오빠, 자녀를 둔 엄마·아빠, 할머니·할아버지까지, 온국민의 분노를 끌어모은 ‘충암고 교감 막말 사건’에도 반전 돋는 속편이 준비된 모양입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충암고’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가 완성됩니다. ‘충암고 진실’.

“충암고 기사의 98%는 거짓이다.” 속편은 충암고 재학생임을 주장하는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출발합니다. “교감 선생님은 ‘지금 급식비 몇 달치가 밀렸으니 부모님께 말씀드리라’고 했을 뿐 ‘꺼져라, 급식비도 안 냈으면서 뭘 먹으려 하냐’ 등의 말씀은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해당 블로거의 주장입니다. 그의 비판은 이어집니다. “(언론과) 인터뷰를 했을 때도 학생들은 ‘부모님께 말씀드리라는 말만 했다’고 하는데 학생들이 저런 말을 했다고 기사를 써놨더군요.” <경향신문>의 단독 기사에서 출발해 <한겨레> 등 거의 모든 언론이 취재·보도한 내용을 뒤엎는 반전입니다.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이 강한 와중이어선지 그의 주장은 이내 ‘기·승·전·기레기’론과 함께 퍼져나갑니다.

논란은 7일 충암고 쪽이 학교 누리집을 통해 ‘사과문’을 발표한 뒤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문제의 김 교감이 올린 사과문에서 “일부 언론의 기사에서 ‘급식비 안 냈으면 밥 먹지마’ ‘내일부터는 오지 말라’ ‘밥 먹지 마라’ ‘꺼져라’ 이러한 말은 저는 하지 않았으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도 않았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앞서 충암고 교장도 “당사자인 교감에게 알아보았지만, 학생들에게 어떠한 막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보고를 받았다. 앞으로 언론에 보도된 사실대로 막말을 했다는 내용이 확인되면 그에 걸맞는 조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드리겠다”는 취지의 사과문을 게재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묻습니다. “진실이 뭐냐”고요.

많은 경우 ‘사실’은 진실에 접근할 징검다리가 됩니다. 충암고 사건을 취재한 기자로서 제가 파악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일단 저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을 직접 인터뷰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블로거도 ‘기자들의 무례한 태도’를 지적했지만 외지인으로서 ‘학교에 무단으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학교 관계자와 학부모, 경위 파악에 나선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를 통해 ‘간접 경로’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아이들과 교감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이 보도된 것은 한 학부모가 “아이가 급식비와 관련해 교감 선생님한테 혼나고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고 언론사에 알려온 게 계기가 됐습니다. 이 학교에 근무하는 한 교사는 “모욕적인 일을 당한 아이들이 더 있는지 알아보려고 몇 개 학급에서 물어보았더니 다수의 아이들이 입을 모아 부당함을 호소했다”고 설명합니다. 서울특별시 서부교육지원청의 현장조사에서도 교장·교감 쪽은 막말을 하지 않았다면서도 대부분의 보도 내용은 시인했습니다. 기자는, 사건 당사자를 자처하지만 출처의 신뢰도도 당사자의 신원도 확인할 수 없는 인터넷의 글보다는 자신을 드러낸 복수의 간접 취재원의 말에 더 신뢰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6일 학부모단체 등 서울지역교육협의회 관계자들의 항의 방문에서 교장이 했다는 말은 이 학교 관리자들의 의식 수준을 드러냅니다. 논란 중에서도 교장은 “사과하지 않겠다. 전화비는 내면서 급식비는 안 내는 아이들이 있다. 도덕적 해이 때문에 내지 않는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열악한 급식실 상태를 지적하자 “우리는 돈이 없다”는 말을 거듭하며 “재단 이사를 시켜줄 테니 돈을 내시겠느냐”며 빈정거리듯 반문하기도 했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학부모단체 관계자는 “그런 자세라면 아이들에겐 더 심했을 것”이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막말을 했느냐’는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닐 수 있습니다. 좀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김 교감이 스스로 작성한 사과문에서 “미납된 장부를 보여주며 빠른 시일 내에 납부하라고 했다”고 시인했듯, 학교가 나서서 민감한 시기의 10대들 앞에서 급식비 체납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일부 학생들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게 이 사건의 알맹이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가난의 폭로’만으로도 쉽게 생채기났으리라는 점은, 우리 모두 사춘기를 지나왔기에 십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충암고 교장은 이와 관련해 사과문에서 “급식 지원 대상 학생(어려운 학생)들은 미납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고를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낼 형편이 되는데도 내지 않은 아이들만 지도했다’는 뜻입니다.

교장의 해명과 달리, 아이들의 사정은 제각각입니다. 학교 급식비 지원 대상은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가족보호대상자 또는 최저생계비 130% 이하 가정 등입니다. 이 중 한해 사이 형편이 달라진 아이도 있을 것입니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15년 교육 복지 대상자는 3월 중 심사해 4월 말께 확정됩니다. ‘서류 밖의 아이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2인 가구 최저생계비가 105만원인 나라에서 중·석식을 합쳐 한 달 15만원가량의 급식비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사정에 따라 급식비 납부가 늦어지는 달도 있었을 법합니다.

오늘의 학교에는 그런 아이들을 기다려줄 아량이 없습니다. 어느 교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참여정부 말기까진 서류상 급식비 지원 자격이 되지 않더라도 담임교사가 간곡하게 추천하면 급식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새 그런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이들이 급식비를 내지 않으면 담임교사들이 나서서 ‘추심하듯이’ 독촉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충암고 사건은 ‘반전 드라마’라기보단 ‘의무 급식(무상 급식)’의 필요성을 역설하려고 만들어진 한 편의 잘 짜여진 촌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학교의 어른인 교감이 ‘외상값’ 장부를 들고 직접 나선 처지도 마냥 손가락질을 할 수만은 없는 ‘웃픈’ 현실입니다. 학교가 아이들한테서 외상값을 챙겨받아야 하는 ‘사업주’ 처지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외상값 수금 없이 장사를 지속할 수 없는 식당이 아니라면, 충암고 교감님도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충암고 이야기가 반전물 대신 따뜻한 학원물로 막을 내리려면 정부와 정치권, 교육 당국의 책임 있는 어른들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깊이 궁리하지 않아도 그 답이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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