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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점령지 주민들이 생생하게 증언하는 지옥도

지난해 6월 급작스럽게 국제정세의 핵으로 등장한 이슬람국가(IS)는 연합군의 폭격과 이라크 정부군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세력과 영역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민간인 참수 등 비인도적 만행을 자행하는 이슬람국가 아래서 주민들은 끔찍한 암흑시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주민들의 증언으로 그 참상을 구성한다. 영국 <인디펜던트>의 ‘이슬람국가하에서의 삶’, <가디언>의 ‘이슬람국가 수도 안에서’, <비비시>의 ‘모술 일기’, <뉴욕 타임스>의 ‘지하디스트 수도에서의 삶’ 등 이슬람국가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들을 토대로 작성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가명이다.

이라크 팔루자의 농민 압바스와 오마르

지난해 1월3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약 60㎞ 떨어진 팔루자에 이슬람국가(IS)의 전신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 무장대원들이 입성했다. 이는 현재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이슬람국가 수립의 서막이었다. 팔루자는 이슬람국가가 처음으로 장악한 인구 밀집 지역이다.

팔루자의 수니파 농민 압바스(53)는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가 입성하던 날을 환희의 날로 회상한다. 그 전부터 바그다드의 시아파 중앙정부의 종파적 국정 운영과 탄압은 이 수니파 도시 주민들의 무장저항을 불렀다.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 무장대원들은 이 도시 주민들의 도움으로 이라크 육군 병력의 3분의 1인 5개 사단을 패퇴시키고 도시를 점령했다.

압바스는 “처음에 우리는 너무 행복했고 이를 ‘이슬람 정복’이라 불렀다”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잔치를 베풀며 대원들을 따뜻이 환영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러 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온건하고 인기있는 정책을 표방했다.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변곡점은 2014년 6월10일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가 이라크 제2도시 모술을 함락하고 바그다드 인근까지 진격하며, 29일 ‘이슬람국가’를 선포한 정세 변화와 함께 찾아왔다. 이슬람국가가 강요하는 규율들은 엄격해졌다.

“그들이 모술을 점령할 때까지 모든 것은 좋았다.” 압바스는 모술 함락 뒤 주민들에게 가해지는 제약이 갑자기 늘어난 것을 느꼈다. 모스크의 성직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이나 다른 아랍 국가들에서 온 성직자들로 교체됐다. 예배는 의무가 됐고, 어기는 이들에게는 40대의 태형이 가해졌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항의하자, 이슬람국가 쪽은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에도 처음에는 계율이 엄격하지 않았다”며 초기의 온건한 계율은 이슬람 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물과 전기 부족이 시작됐다. 연료용 가스 가격은 1통에 80달러 가까이로 치솟았다. 자신의 두 아들과 세 딸에게 다가오는 위협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2014년 연말이 다가오면서 새로운 징집법이 제정됐다. 모든 가정은 아들 중 한명을 이슬람국가의 대원으로 내놓아야 했다. 압바스는 벌금을 내며 버텼으나, 새해부터는 의무조항으로 바뀌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딸들을 노리는 이슬람국가 대원들이었다. 한 외국인 대원이 집까지 쫓아와 딸과의 결혼을 요구했다. 압바스는 결국 올해 1월2일 팔루자를 서둘러 떠났다.

팔루자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카르마의 수니파 농부 오마르 아부알리(45)도 2014년 1월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의 입성을 지켜봤다. 두 아들은 그들을 환영했다. 그도 “알라의 병사들이 (이라크 정부의 시아파 총리였던) 말리키의 악마들을 패퇴시켰다”는 선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점령 뒤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바그다드와 가까운 카마르는 거의 봉쇄돼 식료품이 공급되지 못했다. 밀가루 한 자루 가격이 100달러 가까이까지 올랐다.

지난해 2월 마을의 마지막 정수시설이 폭격으로 파괴됐다. 물 부족으로 마을은 끔찍한 상황을 맞았다. 오마르는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를 위해 5개월이나 일했다. 14살과 15살인 두 아들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미군이 폭격이 잦아지고 학교가 폭격당해 아이들이 죽는 것을 보고 그는 전 재산을 간신히 처분해 고향을 떠났고, 현재는 쿠르드족 지역의 도시 아르빌에 살고 있다. “미군의 공습과 이라크 정부군의 포화는 이슬람국가 대원뿐 아니라 우리들도 죽이고 있다. 이슬람국가의 대량학살과 차이가 없다. 우리에겐 친구가 없다.”

시리아 락까의 사업가 까드리와 반IS 활동가 아부 이브라힘 락까위

2013년 5월부터 락까에서 통제력을 확장하던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2014년 1월 이 도시 서부에 있던 시리아 정부군 기지를 장악했다. 락까는 2013년 3월부터 시리아 내 알카에다 조직인 누스라전선 등이 장악했던 곳이다.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누스라전선도 몰아내고 이 도시를 자신들의 수도로 만들기 시작했다.

시리아 북부 알레포의 주민 까드리는 이 무렵 락까로 이사 왔다. 알레포에서 아동복 공장을 운영하던 그는 폭격으로 공장이 파괴되자, 두 가지 선택에 직면했다. 고향에 남아 공습 속에서 목숨을 건 삶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터키의 난민촌으로 갈 것인가. 그는 두 가지 방안 대신 남아 있는 현금을 갖고 락까로 왔다. 이곳에서는 어느 정도 질서와 안전이 보장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락까에서 10명 정도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을 다시 차렸다.

초기에 까드리처럼 내전에 지친 주민들로부터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지지를 받았다. 교통경찰들이 교차로를 정리했고, 범죄는 줄었고, 세금 징수도 이뤄졌다. 락까의 신용은행은 세무서로 바뀌었다. 자영업자들로부터 전기, 물, 치안의 대가로 두달에 약 20달러씩을 징수했다. 이는 아사드 정부에 바치던 뇌물에 비하면 저렴했다.

락까에 남은 기독교도들도 한달에 몇달러의 소수교도 세금을 내고 생활할 수 있었다. 여성의 외출과 복장 규제는 온건했다.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 않은 여성이 검문에 걸리자, 그 여인이 집에 가서 다시 복장을 갖추고 탑승할 때까지 버스는 기다렸다. 외국에서 온 엔지니어와 의사들이 전기, 수도 공급과 병원을 운영했다.

2014년 6월 이슬람국가가 선포된 뒤 락까의 상황도 바뀌었다. 시리아 정부군과 연합군의 공격이 거세졌다. ‘락까는 침묵 속에서 도살당하고 있다’는 반이슬람국가 활동조직을 이끄는 아부 이브라힘 락까위는 “이슬람국가는 시리아 정부군의 전투기에 로켓포로 대응하지 않고, 단지 주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우리는 아침에 시리아 정부군의 공습, 오후에 연합군의 공습, 그 중간에 이슬람국가의 처형 사이에 끼여 있다”고 개탄했다.

지난해 9월 이후 물가는 폭등해 빵값은 150% 올랐다. 그러나 이슬람국가 대원들은 에너지 음료 레드불을 수시로 마시고, 시리아 평균임금의 두배에 해당하는 한달에 3000시리아파운드의 급료를 받고 각종 특권을 누린다. 락까위는 “주민들에게 공급되는 물과 전기는 거의 바닥난 반면 이슬람국가 대원들의 발전기는 항상 켜져 있고, 그들을 위한 병원에 최고의 의사들이 배치됐다”며 “일반 주민들은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예배 시간에 거리를 배회하거나 담배를 피운 주민들에겐 태형 대신에 벌금이 부과됐다. 이슬람국가 대원들은 심지어 예배 시간에 가게 문을 강제로 열게 하고는 벌금을 받아 가곤 했다. 혈액이 부족해지자 헌혈도 강제됐다. 이슬람 법정에 회부된 주민들은 먼저 헌혈증서를 보여줘야 한다.

45살 이하 여성들에게 도시는 감옥이다. 이슬람국가 대원과 결혼을 원하는 여인들은 검은 옷 아래에 하얀 베일을 두르라는 공지가 거리에 붙었다. 여인들이 이슬람국가 대원과 결혼해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없고, 알 수 있는 것은 전투명뿐이다.

가난과 무료함에 찌든 아이들에게 이슬람국가 대원이 되는 것은 큰 유혹이다. 학교는 폐쇄됐다. 온종일 아이들은 에이케이(AK) 소총을 가진 대원들의 주변에서 놀았다. 올해 2월 들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으나, 이슬람국가가 허용하는 것만 가르친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세뇌될 것을 우려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다.

이슬람국가 대원 함자

팔루자 출신의 함자(33)는 지난해 이슬람국가 대원이 됐다. 하지만 그는 올해 1월 이슬람국가에서 도망쳤다.

지난해 1월 이슬람국가는 팔루자를 함락하고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교육시켜 주겠으니, 정부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예배 뒤 이 사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짤막한 강연을 했다. 일종의 세뇌였고, 6개월 동안 아주 천천히 진행됐다. 나는 그 강연에 참석했고, 그들은 참석한 젊은이들을 상대로 특정 주제와 관련한 쿠란 경연대회를 열었다. 나는 그 경연에서 두번이나 우승했고, 매번 30만이라크디나르를 상금으로 받았다.”

지난해 7월 함자의 가족들은 바그다드로 떠났고, 그는 남았다. “두번이나 쿠란 경연에서 우승한 뒤 나는 그들의 체제를 좋아하게 됐다.” 함자는 결국 이슬람국가에 가담했다. “나는 이슬람국가가 이상적인 국가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기꺼이 가담하려고 결정했다.” 그는 7월과 8월 두달 동안 신체단련 훈련을 받고 팔루자 외곽 부대에 한달 동안 배치됐다. 그는 한달 반 동안 락까에서 집중적인 군사기술 훈련을 받았다.

이슬람국가가 그를 비롯한 신입대원들을 락까로 보낸 것은 ‘칼리프 국가’의 실체를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락까로 데려갔을 때, 모든 전사들은 시리아와 이라크 사이의 국경이 허구이고 우리 모두는 칼리프의 통치 아래서 단결하게 됐음을 확신하게 됐다.” 대우는 좋았다. 한달에 350달러 가까운 월급에다 식료품, 연료, 인터넷 사용 등 특권도 주어졌다.

처형은 적을 겁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신입대원들의 충성 맹세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신입대원들은 가입 뒤 6개월이 지나면 처형에 가담하도록 하는 것이 이슬람국가의 규정이라고 함자는 설명했다. 지난해 11월 많은 수니파 주민들이 정부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끌려왔다. 11월 마지막 주에 그들은 공개 처형을 당했다. 함자가 아는 이들도 있었다. 상관이 그에게 총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처형에 가담하겠느냐고 물었다. 함자는 같은 수니파 주민들을 어떻게 죽이느냐며 거부했다.

이후 13살짜리 야지디족 소녀를 성폭행하는 데 가담하라는 제안을 받고는 탈출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는 바이버 메신저로 친구의 도움을 구했다. 1월 초 그는 친구가 주선해준 밀수업자에게 거액을 치르고는 이슬람국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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