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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외줄 끝내 오른 박지윤

  • 김병철
  • 입력 2015.04.05 07:07
  • 수정 2015.04.05 08:23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열심히 일하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을까? 보통의 경우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 일 욕심을 부리며 개미처럼 일하는 것은 흉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여자라면, 그것도 가정이 있는 여자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느냐는 질문과 간섭이 달라붙기 시작한다.

어린아이는 엄마와 유년기를 보내는 게 정서에 좋지 않느냐는 걱정을 가장한 참견부터, 둘이 안 벌면 안 될 정도로 집안 사정이 어려우냐는 비아냥, 결혼까지 했으면 일 욕심은 줄여도 되지 않느냐는 성차별적인 언사와 젊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지 않느냐는 노골적인 퇴직 요구까지.

조금씩 상황이 개선된다고는 하나, 아직 한국에서 기혼 여성이 일 욕심을 내는 건 수많은 편견의 벽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다.

3월 한달간 나는 4편의 글을 썼다. 글에서 다룬 4명 모두 여성 연예인이었다. 때마침 고아성이, 채시라가, 김희선이, 수지가 각각 좋은 작품을 선보이거나 이슈가 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절반 정도는 의도적이었다.

‘술탄 오브 더 티브이’에서 다루는 연예인의 성비가 남자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과연 한국 연예계가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 자신도 남자이기에 은연중에 남자 연예인에게 더 많은 무게를 싣고 있었던 탓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많았다.

고민 끝에 난 세계 여성의 날(3월8일)이 있는 3월 한 달만큼이라도 되도록 여자 연예인들로만 목록을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3월을 보낸 뒤, 난 내가 한 명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나운서 박지윤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걸 새카맣게 잊은 게 아닌가. 박지윤이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모든 편견과 맞서고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 안다. 언론·방송계 종사자들의 선망 한국방송(KBS)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 방송인, 케이블 프로그램(와이스타 <식신로드>) 사상 최초 백상예술대상 여자 예능상 후보 지명, 방송 출연 개수를 절반 가까이 줄인 지금도 4개 프로그램에 메인 진행자로 고정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

이런 화려한 타이틀만 놓고 보면 마치 박지윤은 잘 깔린 탄탄대로를 밟고 올라온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러나 2004년 한국방송 공채 합격 뒤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박지윤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면, 그 길이 그리 무난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커리어가 뉴스나 교양이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 <스타 골든벨>(2004~2010)로 풀리기 시작했던 2006년부터, 박지윤은 끊임없이 외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한국에서 여자 아나운서들은 종종 턱없는 저평가의 대상이 된다. 기껏 엄청난 경쟁을 뚫고 저녁 메인뉴스 앵커 자리에 앉아도, 동료 남자 아나운서로부터 찬사랍시고 ‘9시 뉴스의 꽃과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를 듣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나마 뉴스는 상황이 낫다. 커리어가 뉴스나 교양이 아닌 ‘예능’으로 풀리기 시작하면, 여자 아나운서가 받는 상대적 저평가 위에 예능인에 대한 뿌리 깊은 천시가 얹어져 차원이 다른 홀대를 받는다.

아나운서의 본령에 충실하고자 해도 연예인처럼 소비될 것을 강요하면서, 정작 작정하고 연예인의 영역에 발을 디디면 아나운서의 본령을 벗어났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환장할 상황. 박지윤은 입사 2년 만에 ‘아나운서로도 예능인으로도 온전히 존중받기 어려운’ 이 기괴한 외줄 위에 올랐다.

자신의 약점을 무기 삼아 남들을 웃기는 코미디 특유의 문법과 남에게 내려놓음을 강요하는 것을 헷갈리는 이들이 많은 탓에, 그의 사소한 신체적 특성은 종종 놀림의 대상이 되곤 했다.

<스타 골든벨>을 진행하며 박지윤은 종종 자신보다 야리야리한 체구의 여자 아이돌과 비교를 당했고, 그 탓에 ‘등빨’ 좋다는 이야기나 ‘어깨장군’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예능은 시청자를 웃게 만들면 그뿐’이라 외모 비하를 합리화하는 상황을, 박지윤은 그저 우직하게 전진하는 것으로 돌파했다.

그는 공동 진행자 김제동과 함께 농담을 주고받았고, 그 농담 안에는 ‘외모 디스’나 연애 이야기와 같은 짓궂은 농담들도 적지 않았다. 피할 수도 없고 특별 대우를 바랄 수도 없다면, 물러서느니 이상한 룰이나마 ‘게임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 체구가 작은 남자 아이돌 가수라도 나올라치면 둘 중 누구 어깨가 더 넓은가를 겨루는 상황을 견뎌가면서.

박지윤은 그렇게 존중받는 내일을 위해 존중받지 못하는 오늘을 견뎠다. 40번 이상의 낙방을 견뎌가며 도착한 곳에서는 노력에 대한 존중 이전에 ‘등빨’을 먼저 이야기했고, 프리랜서 전향 이후 지상파 방송에 얼굴을 비치는 횟수가 줄어들자 사람들은 으레 ‘육아에 전념하느라 방송을 쉬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첫아이 출산 뒤 40여일 만에 방송에 복귀하자 사람들은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칭찬하는 대신 ‘출산이 체질이냐’는 짓궂은 농을 걸었고, 맡은 프로그램마다 조기 종영했던 프리랜서 초창기 시절을 반복하기 싫어 치열하게 달리니 ‘욕망 아줌마’라는 해괴한 별명이 따라붙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세상은 ‘농담’ 속에 뼈를 숨겨 박지윤의 발목을 건 것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바람직한 여자 연예인 체형’을 벗어났다고, 결혼하고 출산도 했으면 좀 쉴 것이지 왜 그렇게 악착같이 나오냐고. (실제로 첫 문단에 적은 글의 대다수는 박지윤이 둘째 출산 27일 만에 제이티비시 <썰전>에 복귀했을 때 인터넷에 올라온 네티즌 반응들과 궤를 같이한다.)

그때마다 박지윤은 부당한 게임의 법칙에 항의하기보단 자신을 더 많이 내려놓는 쪽을 택했다. 아이 엄마라는 캐릭터를 적극 활용해 “모유 수유를 했더니 글래머가 됐다”는 더 센 농담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출산 뒤 이른 복귀를 놀리는 말들에는 “타고나길 강골로 태어났다”고 맞받아치며, ‘욕망 아줌마’라는 센 별명이 생기자 아예 상표권 등록을 해버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한국 사회가 여자 연예인을 대하는 태도를 억척스러운 아줌마의 캐릭터로 극복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우회하지 않으면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들 수 없다.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슈퍼우먼이 되어야 비로소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가사노동, 육아 등의 성 역할 고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말하는 건 불공정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만 귀를 기울였다. 박지윤은 이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올라가 끝내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합당한 존중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섰을 때 잊지 않고 조용히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여자에게만 더 많은 걸 요구하느냐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존중을 해줄 셈이냐고.

지난해 10월 제이티비시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박지윤은 “아이들이 자랄 때는 엄마가 아빠보다 더 많이 옆에 있어줘야 좋다”는 패널들의 말에 차분히 “아빠가 대신해줄 수 없는 (엄마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하기 시작하면 여성의 사회진출이 근본적으로 막힌다”고 반박했다.

평소 고수하던 ‘욕망 아줌마’의 캐릭터를 벗은 박지윤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어조로 패널들을 설득했다. 지금은 자신보다 남편이 더 많은 시간을 육아에 할애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셋째도 가지고 싶고 일도 계속하고 싶은 자신이 그렇게 비정상이냐고 묻는 박지윤의 질문은 공손하지만 단호했고, 토론 전 5 : 6이던 정상 대 비정상의 비율은 토론이 끝난 뒤 7 : 4로 뒤집혔다.

같은 해 같은 방송사의 추리예능 <크라임 씬>에서 박지윤은 홍진호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일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을 깨고 홍진호를 위협하는 실력을 입증하며 ‘추리여왕’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단서를 빠르게 조합해 진실을 파악하는 추리력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추리를 납득시키는 설득력이 모두 필요한 게임.

박지윤은 첫번째 시즌에서 단 두차례를 제외하고 모든 사건에서 승리했다. 마치 “사실은 이렇게 실력만으로 인정받는 게 맞지 않느냐”고 세상에 되묻기라도 하는 듯.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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