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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돌고래의 러브스토리? 그녀가 떠나자 돌고래는 자살했다

  • 박세회
  • 입력 2015.04.04 06:37
  • 수정 2015.04.04 06:38

돌고래에게 인간 언어를 가르치려는 신경생리학자 존 릴리의 실험은 낭만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았다. 보조연구원 마거릿 로바트는 큰돌고래 ‘피터’의 학습능력 향상을 위해 그와 친밀도를 높이고 싶었고 공동 주거공간을 마련해 두 달 남짓 함께 살았다.

존 릴리의 이상한 돌고래 실험

1960~70년대 인간과 돌고래의 공동 언어를 개발하는 신경생리학자 존 릴리의 시도가 당시에 허무맹랑하게만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던 것 같다. 1978년 나온 그의 책 <인간과 돌고래의 대화>의 추천사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썼다.

“이 분야 전문 가들에 의해 정교하게 수행되지 않았지만, 과학연구의 노력과 결과를 지성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굉장히 중요하다. 지식의 대상을 일부의 영역에 제한하면 인간의 철학과 정신을 말려 죽이고 정신적 빈곤 상태로 이어진다.”

1960년대는 특이한 시대였다. 베트남전 반전 여론이 대학가를 휩쓸고 대마초가 유행하고 히피가 들끓었다. 비틀스의 음악이 전세계로 퍼질 때 프랑스 대학생들은 1968년 권위주의에 도전했고 미국의 촌구석 우드스톡에서는 이듬해 록 페스티벌이 열렸다. 아폴로11호가 1969년 달에 착륙했고, 과학자들은 1960년부터 외계 지적생명체를 탐사하는 세티(SETI)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타자와의 연대, 사랑과 혁명, 평화주의가 시대의 곳곳에서 꽃을 피웠다.

이 시대 사람들은 외계인과 맞서 싸우는 이미지보다는 평등하게 악수하는 모습을 꿈꿨다. 미국의 저명한 우주과학자 프랭크 드레이크(1930~)가 주도하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이 후원한 세티 프로젝트도 외계인과 평화로운 조우를 그렸다. 머나먼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산다면 우리의 언어를 듣고 이해하려 노력하리라. 그러나 빈 공간이 있었다. 외계인과 만나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순 없지 않은가.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아이들보다 빠른 학습능력에 흥분

신경생리학자 존 릴리(1915~2001)를 프랭크 드레이크가 찾아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1950년대부터 돌고래 두뇌를 연구한 릴리는 돌고래를 지구에 사는 지적생명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 못지않게 큰 두뇌와 대뇌피질이 발달한 점을 주목한 그는 이들에게 돌고래어(語)가 있으며 인간과 의사소통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1963년 카리브해의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의 세인트토머스섬 해안가에 하얀 이층집이 실험시설로 결정됐다. 목적은 돌고래와 의사소통, 그들에게 ‘인간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돌고래는 외계 지적생명체의 지구판 모델이었다. 돌고래와 소통할 수 있다면 외계인과도 소통할 수 있었다. ‘돌핀하우스’라고 불린 실험실에는 뉴기니 등 원주민 생활과 언어를 연구한 당대 최고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1904~80)도 합류했다.

존 릴리의 이상한 실험은 지난해 크리스토퍼 라일리가 만든 다큐멘터리 <나를 사랑한 돌고래>가 공개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실험에 참여한 민간인 마거릿 하우 로바트가 처음으로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갓 대학을 중퇴한 20대 젊은 여성이었던 그녀가 무작정 돌핀하우스에 찾아가 문을 두드린 건 1964년 초 어느 날이었다.

“여기 돌고래가 있다고 들어서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베이트슨이 실험시설을 보여주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특수설계된 풀장에는 큰 덩치에 적극적 성격을 가진 암컷 ‘시시’와 소심한 겁쟁이 ‘패멀라’ 그리고 갓 어른이 된 수컷 ‘피터’ 등 세 마리의 큰돌고래가 살고 있었다.

베이트슨은 돌고래들끼리의 의사소통에 관심을 가졌지만, 릴리는 돌고래와 사람이 소통하는 ‘종간 언어’(interspecies language)를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돌고래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게 로바트의 임무였다. 그녀는 존 릴리의 지지 속에서 열정적으로 영어교육에 임했다. 수컷 돌고래 피터에 중점을 뒀다. “내가 말할 때 피터가 듣도록 하고, 피터가 소리를 낼 때 내가 듣는 것이었죠.”

돌핀하우스는 피터에 대한 영어교육을 녹화·녹음해 두었다. <나를 사랑한 돌고래>가 공개한 당시 영상을 보면, 로바트는 마치 유치원생에게 숫자를 가르치듯 피터를 이끈다.

“원, 투, 스리….”

“워억, 뚜익, 띠익….”

피터는 따라 했다. 정확한 발음은 아니지만 억양과 리듬이 맞았다. 아이들보다도 빠른 피터의 학습능력에 흥분했다.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해 담대한 실험계획을 세웠다. 1965년 돌핀하우스 이층을 인간-돌고래의 공동생활 공간으로 개조했다. 얕은 수심의 풀장에 책상, 전화기, 의자를 들여놓고 로바트가 일했다. 침대를 아예 풀장에 들여놓고 피터와 함께 잤다. 피터는 일주일에 엿새를 여기서 보내고 나머지 하루는 특수제작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가 두 암컷과 지냈다.

“헬로.”

“헤-에로-우룩.”

(삼각형이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며) “트라이앵글.”

“트리라-에꾸륵.”

하루 두번, 교육은 10주가량 이어졌다. 피터의 언어능력은 늘었고, 로바트와의 친밀도도 깊어졌다. 피터는 그녀의 신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피터는 나와 함께 있는 걸 좋아했어요. 무릎이나 다리, 손에 몸을 대고 비비는 걸 좋아했어요. 처음엔 아래층의 암컷들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무슨 이유에서건 갓 어른이 된 돌고래의 성적 욕망이 고개를 쳐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애써 끌어올린 친밀도와 언어능력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손으로 돌고래의 성욕을 해소시켜주는 길을 택했다. 라일리 감독은 지난해 6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고에서 그녀의 발언을 이렇게 전했다.

“거칠게만 하지 않으면 불편하진 않았어요. 일이 진행되는 과정의 한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연구자들이)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생활이 아니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성적인 게 아니었어요. 관능적인 느낌에 가까웠죠. 돌고래와 연대감을 강화해주는 것처럼 보였고, 연구의 연속성을 깨뜨리지 않아야 했어요. 나는 피터를 알려고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이 사건은 1970년대에 성인잡지 <허슬러>에 의해 인간과 돌고래의 성관계로 선정적으로 소개된다.)

연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당시 릴리는 향정신성약물 엘에스디(LSD)가 두뇌에 미치는 영향의 연구에도 사로잡혀 있었다. 엘에스디가 정신질환자들에게 효과가 있다고 믿은 그는 동물실험을 통해 지능의 변화를 확인하고 싶었다. 로바트의 반대 속에 릴리는 피터에게 엘에스디 주사제를 투입하기 시작한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이트슨이 떠나고 나사의 지원이 끊기면서 1966년 돌고래 실험은 완전 종료된다. 그해 10월 피터는 미국 마이애미의 비좁은 건물로 옮겨졌다.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 끔찍한 콘크리트 수조였다. 몇 주 뒤, 로바트는 릴리의 전화를 받았다. 피터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돌고래 조련사 출신 보호운동가 릭 오배리 같은 이는 인간과 달리 돌고래는 주기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적으로 호흡하기 때문에 수면에 올라오지 않는 방식으로 종종 자살을 한다고 주장한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로바트와 헤어진 돌고래는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떴다.

히피·마약·우주개발의 1960년대 외계 지적생명체와 소통 위해 시작한 돌고래 영어학습 실험 존 릴리의 버진아일랜드 실험실을 20대 여성 로바트가 찾아왔는데…로바트는 매일 잠까지 함께 자며 수컷 피터의 성욕까지 해소시켜줘 약물 주입문제로 연구 종료되고 콘크리트 수조로 돌아간 피터 얼마 안돼 ‘자살’했다는 소식이

그린피스 고래보호운동의 밑거름 되다

동물과학 역사상 가장 이상한 실험이었다. 히피와 마약, 평화주의와 우주개발의 1960년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실험이었다. 릴리는 1970년대까지 그의 주장을 이어나갔다. 1978년 <인간과 돌고래의 대화>에서 그는 “돌고래도 인간과 소통하려 한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소리의 장단을 이용해 인간 말소리를 닮은 음성을 창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주장했다.

돌고래에게 인간 언어를 가르치려는 신경 생리학자 존 릴리의 실험은 낭만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았다. 보조연구원 마가렛 로바트는 큰돌고래 ‘피터’의 학습능력향상을 위해 그와 친밀도를 높이고 싶었고 공동 주거공간을 마련해 두 달 남짓 함께 살았다.

돌고래에겐 인간의 성대 같은 발성기관이 없다. 성대의 떨림이 아닌 분수공(등에 달린 숨구멍)을 여닫으며 피터는 억지로 소리를 냈다. 독일의 돌고래 행동학자 베른트 뷔어시크는 <해양포유류 백과사전>에서 “스타카토 리듬으로 공기를 터뜨리며 소리를 만든 것”이라며 릴리의 실험은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말한다. 피터는 의미를 이해하고 단어를 조합하고 문장을 구사한 게 아니라(즉, 언어를 배운 게 아니라), 로바트의 소리를 단순 모방했다는 게 현대 해양포유류학자들의 평가다. 로바트가 먹이를 줬기 때문에 피터는 흉내냈다. 이처럼 원하는 행동을 수행하면 보상(먹이)을 주는 ‘긍정적 강화’ 기법은 나중에 공연용 돌고래를 훈련시키는 기본 원리로 사용됐다.

뷔어시크는 릴리의 비과학적 연구가 후대 과학자들이 돌고래 소통에 관한 연구를 꺼리게 한 부작용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동물에 대한 낭만주의적 시각은 여론을 뭉쳐 세상을 바꾸는 촉매로 작용하기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대책없는 주장은 1980년대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세계적 환경단체 그린피스 등을 통해 폭발된 고래보호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서구 사회에서 고래가 보호돼야 할 동물로 유난히 특별 대우를 받는 것도, 1986년 국제사회가 상업포경을 금지한 것도, 이러한 뉴에이지적 문화 전통을 제외하고선 이해할 수 없다.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릴리는 이런 사회적 구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동시에 그 자신이 사회적 구성물의 결과이기도 했다. 동물실험에 열성적이던 존 릴리의 태도는 1980년대 극적으로 바뀐다. 1987년 의사소통 실험용으로 쓰인 큰돌고래 조와 로시를 바다로 되돌려보내는 등 그는 돌고래 전시·공연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파한다. 다큐멘터리는 릴리의 한 강연을 보여준다.

“돌고래를 잡아서 가두고 실험할 권리는 나에게는 없다. 오직 야생에 사는 돌고래들과 함께 일할(연구할) 권리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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