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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계약서 처음 적어본 아이들..."사회 나갈 때 큰 도움 되겠어요"

  • 강병진
  • 입력 2015.04.02 16:55
  • 수정 2015.04.02 18:09

“중학교에서 전태일에 대해 배웠니?”

지난 3월31일 오후 4시 경기 수원시 팔달구 삼일상고 1학년 6반 사회시간. 담임이자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허진만 교사가 수업 시작에 앞서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26명 중 2명이 손을 들었다. 역사시간에 배웠다고 했다. 다른 중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앞다퉈 “우리 학교에서는 안 가르쳐줬다”며 와글와글 말을 쏟아냈다.

“그러면 근로계약서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있니?”

이번에는 8명이 손을 들었다. 대부분이 걸그룹 걸스데이의 혜리가 나오는 ‘알바 권리 챙기기’ 광고를 보고 ‘최저시급’은 알고 있었지만, 근로계약서가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3년 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직장을 구하겠다는 학생들은 은행원, 승무원, 공공기관 직원, 대기업 직원, 프로그래머,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장래 희망을 쓴 자기소개서를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두고 있었다.

이날 수업 주제는 ‘근로계약서 협상 후 작성하기’였다. 주교과서인 사회교과서와 연계해 사용하는 부교재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에 수록된 ‘노동과 경제’(2부 2단원)의 마무리 활동이다. 4~6명씩 짝지은 모둠별로 각자 아르바이트생과 고용주 역할을 맡는다. 협상 뒤 ‘아름답고 정의로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다.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고교과정 집필책임자이기도 한 허 교사는 “고용노동부가 만든 ‘18살 미만 연소근로자용 표준근로계약서’를 직접 써보는 수업이다. ‘연소근로자’ ‘제수당’ 등 학생들이 모르는 한자가 많아 한문 선생님께 미리 설명해달라고 따로 부탁을 드렸다”고 했다.

햄버거·피자 가게, 편의점, 숯불갈비 식당, 뷔페, 주유소 사장님과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구직자로 나뉜 학생들은 금세 역할놀이에 빠져들었다.

주유소를 맡은 모둠에서는 시급과 근무일수를 두고 사장과 구직자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구직자 역을 맡은 오은지(16)양이 최저시급(5580원)을 웃도는 시급 7000원을 요구하자, 사장 역의 박세민(16)양이 “현실을 모른다”고 받아쳤다. 3개월만 일하고 싶다는 구직자에게 사장 역할의 정제현(16)군은 “일하다 도망치는 것 아니냐. 단기보다 장기 아르바이트생이 좋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너무 빡세다(힘들다)” “일하는 시간을 10분만 빼달라” “어린 학생이 돈을 밝힌다” “그러면 일하지 마” 등 구직 현장에서 흔히 나올 법한 대화가 오갔다.

중학교 3학년이던 지난해 겨울방학을 이용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박양은 “친구들과 주말에 저녁 8시부터 새벽 6시까지 일했지만 근로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앞으로 계약서를 쓴다면 나도 할 말이 많아질 것 같다”고 했다. 근로기준법은 원칙적으로 밤 10시~새벽 6시에 청소년에게 일을 시킬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처음 근로계약서를 쓰는 학생들은 실수를 많이 했다. 피자 가게에서 주말 오토바이 배달원 자리를 구하는 상황이었던 모둠에서는 손님이 몰리는 점심과 저녁 시간을 포함해 하루 10시간 일하기로 근로계약이 이뤄졌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18살 미만 청소년은 원칙적으로 하루 7시간,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일해서는 안 된다. 뒤늦게 법을 어긴 사실을 안 학생들은 하루 7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조정했다.

박소원(16)양은 “청소년은 하루 7시간 이상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호텔에서 알바를 하던 친구가 많이 힘들어하면서도 ‘돈을 많이 준다’며 그냥 참고 일했다. 학생 때 계약서를 작성해본 것만으로도 사회에 나갔을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중국집 전단지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해봤다는 유진(16)양은 “이런 내용들을 취업하기 전에 학교에서 먼저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노동기본권에 대한 지식과 감수성을 기르기란 쉽지 않다.(<한겨레> 2월24일치 8면) 허 교사는 “노동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보니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열고, 쟁점을 배우고, 이를 토론하는 데에만 세번 이상 수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진도부터 나가야 한다. 결국 개별 교사의 의지에 달려 있는 셈”이라고 했다. 2007년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초·중·고에서 노동기본권 교육이 포함됐지만, 직접적으로 노동을 다루는 내용은 거의 없고 다른 주제를 배우면서 ‘곁가지’로 언급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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