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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 인터뷰] 임권택 감독이 말하는 '남자가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건,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5년 전에는 '남자와 운전'이라는 단어들로 받아들였던 그의 말이 '늙음과 부부'라는 주제로 다가왔다. "남자가 늙으면 아내에게 해줄 게 운전밖에 없다"는 '부부처세술' 같은 가르침이 "늙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아내에게 운전이라도 해줘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임권택 감독을 다시 만나면 이 말의 맥락에 대해 다시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강병진
  • 입력 2015.04.02 09:32
  • 수정 2015.06.01 14:24
ⓒ명필름

약 5년 전, 임권택 감독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얻어 탈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영화잡지의 기자였고, 정성일 - 허문영 영화평론가와 임권택 감독의 대담을 정리하러 나선 길이었다.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함께 영화를 본 후, 우리는 함께 상수동 근처의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나는 보조석에, 뒷좌석에는 정성일 평론가가 앉았다. 운전을 하던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 평론가에게 물었다. "정성일 선생은 직접 운전을 하는 편인가요?" 그때 정성일 평론가는 "운전을 할 줄 모른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 역시 멋쩍은 듯 이렇게 말했다. "저도 운전을 할 줄 몰라서 주로 여자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닙니다."임권택 감독은 뜻밖의 대답이라는 표정을 짓고는 엷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운전을 해야 돼요. 남자가 말이오,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안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어요. 지금은 댁들이 젊어서 모르겠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아, 그때 '임아무개'가 한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할 때가 올 거요."(웃음)

30대가 넘어서도 운전면허가 없었던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미 '남자는 운전!'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은 터였다. 하지만 그때 임권택 감독처럼 '남자가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허세나 멋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실용적인 용도로서 운전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약 2년 후, 나는 운전면허를 땄다. 꼭 임권택 감독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할 때는 도리없이 그의 말이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건,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죽어가는 아내와 마음에 둔 젊은 여직원 때문에 번민하는 50대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죽음, 늙음, 결혼, 남자, 여자, 그리고 몸 등등 '화장'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상념의 단어를 던져놓는다. 영화를 보는 동안, 5년 전에는 '남자와 운전'이라는 단어들로 받아들였던 그의 말이 '늙음과 부부'라는 주제로 다가왔다. "남자가 늙으면 아내에게 해줄 게 운전밖에 없다"는 '부부처세술' 같은 가르침이 "늙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아내에게 운전이라도 해줘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임권택 감독을 다시 만나면 이 말의 맥락에 대해 다시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일단은 영화에 대해 먼저 물었다.

*영화 '화장'의 중요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화장'이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과거 101편의 영화가 개봉하기 전과는 기분이 조금은 다르실 것 같습니다.

= 옛날에는 흥행이 잘 안되면 어쩌나 가슴 조이게 하고 그런 게 있었어요. 이번에도 그런 거는 마찬가지인데, 뭐가 좀 다르냐면, 내가 만들어 놓고도 이게 관객에게 어떻게 들어갈 것인지 그게 아주 궁금한 거예요. 내가 관객들에게 영화를 어떻게 봤느냐고 여러 가지를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묻고 싶으신 건가요?

= 영화를 오래 해오다 보니까, 영화라는 게 만드는 사람의 나이만큼 되는 거구나 생각을 하게 돼요. 나이를 먹은 만큼 찍게 되는 거예요. 더도 덜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젊은 관객에게나, 중년 사람들에게나 내가 80대가 돼서 만든 이 영화가 어떻게 닿을지, 궁금증이 많이 나는 거죠.

- 예전에는 관객의 반응보다, 감독님이 영화에 담아낸 것들이 더 중요하셨다는 뜻인가요?

= 그런 거죠. 그때는 내 소신이 더 중요했다고 볼 수 있고, 소신이 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다르죠. '화장'은 중년의 남자 주인공이 뇌종양을 앓는 부인을 최선을 다해 간호를 하다가도, 젊은 회사 직원에게 쏠리는 감정의 추이를 담아내야 하는 영화에요. 그런 마음속의 동요를 80세 노인이 바라본 것으로 찍었기 때문에, 이게 잘 통할 건지 걱정이 되는 거죠.

- 혹시 80대가 아니라 60대 혹은 50대 시절에 '화장'과 같은 소재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셨을까요?

= 그때 찍었다면 많이 다른 영화가 됐을 거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이 만큼 찍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화장'은 명필름으로부터 연출 제안을 받았던 프로젝트입니다. 김훈 작가의 원작을 읽어보셨을 때의 감상은 어떤 거였나요?

= 김훈 선생의 문장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것을 영상으로 풀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일단 문장이 주는 힘에 내가 현혹돼서 빠져들어 가면 이거는 안 될 거라고 봤어요.

-그렇다면 무엇이 영화로서의 '화장'을 가능하게 할 거라고 보셨습니까?

= 문장을 영상으로 옮기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가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사실감'이라고 본 거죠. 추은주라는 여자에게 끌리는 감정 같은 것도 사실감을 통해서 표현해야만 한다고요. 그런 걸 놓치면 허황된 이야기로 떨어질 우려가 있었어요.

-감독님의 이전 작품을 아주 많이 봤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감독님이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 그리고 그 속에 놓인 사람을 통해서 영화를 구현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장'은 병실과 사무실, 장례식장을 주로 오고 가는 영화입니다. 감독님께는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 뭔가를 극복한다는 것보다, 이전에 만들었던 임권택 영화 다운 어떤 틀로부터 벗어나야 되는 데 그런 방법은 없는가를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동안에는 한국의 문화나 우리 안에서 공유하는 역사를 주로 다루었는데, 내가 또 그런 영화를 하면 옛날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나로서는 '화장'의 병원이나 사무실처럼 제한된 장소가 내 영화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뇌종양 투병을 하던 아내가 죽은 어느 날 아침. '화장'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남편인 오상무(안성기)는 심전도 계기판의 소리가 일정한 음을 내던 순간 잠에서 깨어나 아내(김호정)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는 심전도 계기판의 규칙적인 소리만큼 규칙적으로 아내의 병실을 찾았고, 이 소리는 그에게 병실의 일상과 다름없었다. 환자의 심장을 더듬어 주기적으로 그의 상태를 체크하는 심전도 계기판처럼, 오상무 역시 성실한 태도로 아내를 간병했지만 그는 아내가 오늘 아침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따뜻한 눈물과 포옹으로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계기판의 소리가 끊어지면서, 그에게도 알람이 울린 것이다. 알람이 그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매우 간명하다. 아내가 죽었다.

아내의 죽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남자. 그는 "50대가 넘은 남성에 찾아오는 노화현상"인 전립선 비대증을 앓는 남자이고, 죽어가는 아내를 열심히 간병하던 남편이며, 후배 여직원을 흠모하는 직장 상사다. 어쩌면 지금껏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만났던 남자일 수도 있지만, '화장'의 오상무는 그들보다 차가운 피를 가진 듯 보인다. 그는 아내를 극진히 간호하지만, 어설프게라도 아내를 위로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온몸이 망가진 아내를 바라보며 "아직도 예쁘다"거나, "여전히 사랑한다"는 등의 말도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업무를 보고, 저녁에는 병원에 가서 아내를 돌보고, 아내가 잠들면 숨겨놓은 소주와 육포로 자신을 위로한 뒤 잠에드는 것이 그의 일상일 뿐이다. 그렇게 잠시 숨을 쉴 때쯤, 그는 다른 여자를 떠올린다. '화장'이 바라보는 죽음, '화장'이 바라보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 그리고 '화장'이 바라보는 생동하는 본능 또한 오상무라는 필터를 통해서 관객에게 보여질 것이다.

- '화장'은 상당히 건조한 톤으로 묘사하는 영화입니다. 원작에서도 그랬지만, 오상무는 아내의 장례와 함께 회사의 업무도 함께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일 모두 의무에 해당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이 조금이라도 다른 의미로 보이는 순간은 영화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상여 장면이었습니다. 관 속의 아내는 매우 고운 자태로 누워 있고, 상여 행렬에는 오상무와 그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상무의 뒤에는 붉은 색 옷을 입은 추은주가 함께 걷고 있고요.

= 그 장면에서도 죽음에 대해 뭔가를 전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죽어가는 부인과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생동하는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상징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인과 젊은 여자 사이에서 꽉 쪼여있는 한 사내의 이야기다, 라는 걸 보여주려고 한 거죠.

- 과거 '축제'에서 묘사했던 죽음과 늙음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온도입니다. '축제'는 늙어간다는 의미를 동화를 통해 묘사했고, 할머니의 죽음 또한 온 가족이 함께하면서 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으로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다.

= 그때는 죽음에 대해서 좀 치장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런 나이였으니까.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 죽음에 대해 애써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그런 게 없으시다는 건가요?

= 그런 거죠. 없어요. 죽음은 그냥 죽음인 거예요. '축제'에서는 나도 죽음에 연연한 게 있었으니까, 그렇게 의식화시킨 게 있었을 텐데 이제 그런 건 지난 거에요. 그것도 지금 나이만큼의 생각인 거고.

- 감독님이 생각하신 오상무도 어느 정도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요? 오상무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어딘가 초연한 분위기의 표정입니다. 또 자신의 몸에 달고 있는 소변 주머니에 대해서도 그냥 함께 살아가면 된다는 식의 태도인 것 같아요. 극 중의 딸은 장례가 끝나면 꼭 수술을 받으라고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오상무는 어떤 남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 음, 삶 자체에 큰 열정은 없는 사람이 아닐까, 어찌 보면 성공한 사람이잖아요. 회사에서도 좋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가족 안에서도 그렇게 평가받는 사람인데, 아마도 본인은 그런 걸 크게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닐까라고 봤어요.

- 영화 속에서는 '부사장 승진 대상'에 포함된 임원이지만, 딱히 그런 걸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 그렇지도 않죠. 삶 자체에 대해 크게 기대하는 게 없는 거요. 적당하게 살면서, 적당한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그런 거죠.

- 하지만 그래도 아내 말고 다른 여자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다는 건, 조금 다른 맥락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 나는 그런 본능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사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추은주를 좋아하지만, 평생을 잊지 못하고 마음에 심어두는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요. 한때 잠깐 마음속에서만 빠졌다가, 다시 또 빠져나오는 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죠.

- 영화 속에서 오상무가 죽어가는 아내를 대하는 태도 또한 비슷한 걸까요?

= 그런 거죠.

'화장'에는 죽어가는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를 궁금하게 만드는 장면이 하나 있다. 뇌종양 선고를 받은 아내는 수술을 앞두고 삭발을 해야한다. 이때 머리를 밀어주는 사람은 오상무 자신이다.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순녀는 속세와 이별하며 삭발을 했지만, 이 장면에서 고행의 표정을 짓는 건, 아내가 아니라 오상무다. 그의 딸은 "간호사에게 맡기지, 왜 아빠가 하느냐"고 묻지만, 오상무는 그저 단 하나의 머리카락도 남기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아내의 머리를 대한다. 왜 그는 아내의 머리를 직접 밀겠다고 나선걸까? 삭발을 한 아내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걸 싫어할까 봐 그런 걸까? 하지만 사실 아내의 입장에서 삭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남편이 아닐까? 영화 속 딸이 오상무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임권택 감독에게 물어보았다.

-오상무는 왜 아내의 머리를 직접 밀려고 하는 걸까요? 자신이 비록 마음속에서는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지만, 아내의 간병만큼은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 아마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깎으려 했을 거예요. 그런 의지가 없으니까, 어떻게든 의지를 일으켜보려고 하는 행동이 아닐까. 오상무가 마지막에 개를 동물병원에 맡기는 것도 그래요. 부인이 밥 먹는 자리에서 "나 죽으면 개도 함께 묻어달라"고 하잖아요? 그거는 사실 이제 니가 좀 잘 사랑하고 아껴서 키워달라면서 마음 떠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남편은 아내가 죽은 후에 개를 수의사에게 맡기잖아요. 아내를 정말 사랑했거나, 그런 의지가 있었다면 그럴리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오상무는 추은주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영화 속 시점에서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게 남아 있었을까요?

= 그걸 뭐, 의무감이라고 말하기는 뭐한데... 부부로서 같이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 무슨 사랑이란 마음이 남아서 그렇게 열심히 간병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말하자면, 그건 사람이라면 갖고 있는 도리 같은 거라고 봐야죠. 나와 함께 열심히 살았던 대상에 대한 감정일 거예요.

- '화장'이 차갑게 보인다면, 그런 감정 때문일 것 같습니다. 아픈 아내를 간병하는 남편을 보는 관객으로서는 아무래도 따뜻한 사랑을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오상무의 태도에서는 그런 게 잘 안보이니까요. 아내가 술을 마시고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지!"라고 할 때는 살짝 짜증이 나는 표정이 보이기도 하고요.

= 살갑게 대하는 말이 없죠. 그런 건 소설에도 없었어요. 왜 없냐면, 솔직히 지겨운 거예요. 마음 속에서는 아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할 수 도 있어요. 살아 있어 봐야 아픈 사람이 더 고생인 것도 있지요. 그런 노력을 해야하는 것에서 오는 짜증스러움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 원작에는 없었던 오상무의 선택이 영화에는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별장에서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오상무에게 추은주가 마지막으로 뵙고 싶다며 차를 몰고 달려오죠. 하지만 추은주가 별장에 도착하자 오상무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상무는 별장을 나와 그저 길을 계속 걷습니다. 어떻게든 추은주를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오상무가 피하려 한다는 건, 그것도 아내에 대한 도리 같은 걸까요?

= 별장에 아내가 보낸 와인이 있잖아요. 아내도 남편이 젊은 여자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와인을 보냈을 때는 내가 떠나면 둘이 함께 마셔라 이런 거에요. 뭐, 질투 같은 마음으로 보낸 것이기도 하겠죠. 남편이 생각할 때도 자실 자기는 이제 별 마음이 없이 살았는데, 아내의 지갑에서 자신의 증명사진이 나오고 그런 흔적을 보니까 일말의 양심 같은 게 생기는 거예요. 물론 이 남자가 젊은 여자를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텐데... 아마도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둘이 만나는 게 뭐 어떠냐고 할테고.... 사실 나도 뭐 어떠냐 싶어요.(웃음) 그래도 가버린 사람에 대한 흔적이 눈에 보였을 때는 또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과거에는 그 부부도 그렇게 서로 좋아했을테니까... 또 그런 게 도리일 거예요. 우리가 살면서 정말 필요한 게 그런 거고요.

-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예전에 감독님이 운전을 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중략...) "남자가 나이가 들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 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 허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 네. 어쨌든 그 이후로 저는 운전면허를 땄습니다.(웃음) 아무튼 지금 다시 그 말을 떠올려보면, 아내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애틋함도 있는데, 어떻게든... 운전 정도는... 아니, 적어도 운전 하나 만큼은 내가 꼭 해야한다는 의지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 뭐, 말하자면 그런 것도 인간으로서의 도리 같은 걸로 봐야죠. 그런 것들이 그나마라도 살아있어야지. 아무것도 없다면 사실 정말 큰 위기잖아요.

- 갑자기 생각나서 질문을 드린다면, 감독님에게도 결혼이라는 계기가 영화의 시선에 변화를 주는 사건이었을까요?

= 아마도 변했을 거예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었고, 그런 생활이 누적되면서 체험된 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에요. 이 영화에서도 그럴 테고.

임권택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화장'의 오상무가 과거 그의 영화 속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다라'의 법운은 길을 떠돌며 구도의 길을 찾으려 했었고, '서편제'의 송화 역시 기나긴 세월을 득음을 향해 방황했었고, '취화선'의 장승업 또한 자신 만의 예술을 찾아 길을 나섰다. 윤리와 본능, 죽음과 늙음의 총체적 난국에 빠진 오상무 역시 결국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일탈 사이에서 안간힘을 쓴다는 점에서 찾는 대상이 다를 뿐 그들과 같은 방랑자일 것이다.

"영화는 자기가 살아온 나이만큼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한 임권택 감독은 102번째 영화인 '화장'에서야 비로소 깨달음이나 예술의 경지가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나마라도 살아있어야만 하는" 인간의 도리를 오롯이 드러낸다. 깨달음을 얻지 못할망정,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해도, 또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메말랐다고 해도, 생동하는 본능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다고 해도 최소한 남아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80대의 영화감독이 생각하는 인생의 필수 조건인 셈이다. 영화로서의 '화장'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80대의 감독이 자신의 인생을 담아 '인간의 도리'에 대해 전하는 영화는 현재 '화장'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주차해놓은 차에 시동을 걸면서 5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했다. 남자의 운전은 언젠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될 도리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다.

영화 '화장'은 오는 4월 9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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