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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준수의 EBS 스페이스-공감 출연과 '미들맨'의 죽음

2009년 이후 독립선언을 한 JYJ 그룹은 그동안 방송출연을 제약당해왔다. 마약, 도박, 사기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출연자를 방송사가 출연정지 시키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JYJ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다. 이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공연과 인터넷을 통해 스타성과 방송적 가치를 입증한 JYJ는 강력하고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음악 방송 출연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번 EBS에의 출연은 역사적인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음악방송을 주업으로 하는 방송사를 통해 컴백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인터넷, 모바일, SNS 혁명 에너지가 추동한 역사적이며 구조적인 사건인 것이다.

  • 김유열
  • 입력 2015.03.30 13:19
  • 수정 2015.05.30 14:12

시아준수가 방송에 출연한다. 'EBS 스페이스-공감'에 출연하는 것이다. 시아준수의 음악방송 출연은 2009년 이후 6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출연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아니하고 새 시대의 씨앗을 응축하고 있다. 2009년 7월 동방신기의 시아준수, 믹키유천, 영웅재중 세 멤버는 국내 최대의 기획사 SM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로서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 문화권력에 대한 도전이요, 반기인 것이다. JYJ의 독립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혹자는 혁명이라 할 것이고 혹자는 반란이라 할 것이다. 객관적인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한다. 혁명이든 반란이든 그의 독립 선언은 지금까지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EBS 음악방송출연은 하나의 패러독스이며 한편으로는 그의 성공을 방증하는 것이다. 예능을 주업으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케팅적 영향력이 지대하지도 않은 EBS를 통해 막혀있던 음악방송의 창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것이다.

'JYJ 사건'은 하나의 우연적 사건이나 해프닝이 아니다. 패러독스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 경제, 기술의 구조적 변화의 산물이다. 혁명적으로 진행된 미디어 빅뱅은 모든 걸 바꾸어 놓았다. 특히 무르익은 인터넷, 모바일, SNS 시대는 방송 중심으로 세워진 문화계의 권력 판도와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어 가고 있다. 이를 통해 중세의 르네상스를 넘어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민 혁명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다. 절대 왕정을 붕괴시키고 시민은 스스로 자신들의 공화국을 건설하고 있다. 마치 JYJ 팬덤을 연구했던 이승아씨 책 제목 'JYJ 공화국'처럼 새로운 공화국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 모바일, SNS로 대변되는 기술 혁명은 전통의 문화권력체제를 붕괴시키고 있다. 새 질서, 새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규격과 품질을 엄격히 통제하고 자유 경쟁을 배제한 중세적 길드(GUILD) 체제로서는 기술혁명이 가져다 주는 폭발적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다. 자유와 평등과 참여가 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이루는 시대를 살고 있다. 뉴미디어 시대는 자유와 평등과 참여를 기술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는 전통 체제를 앙시앙 레짐으로 내몰고 있다.

JYJ의 김준수(시아준수)가 3월 21일 태국 방콕 썬더돔에서 열린 솔로 콘서트에서 노래하고 있다.

미디어 빅뱅이 만들어낸 문화 빅뱅

2009년 이후 독립선언을 한 JYJ 그룹은 그동안 방송출연을 제약당해왔다. 방송출연정지, 방송출연금지도 아닌 방송출연제약이다. 마약, 도박, 사기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출연자를 방송사가 출연정지 시키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JYJ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다. 이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법적 문제가 야기된 것도 아니다. 2012년 JYJ와 기획사 사이 법적 분쟁이 마무리됐다. 그 후에도 지금까지 이들은 음악방송출연에 제약을 받아온 것이다. 공연과 인터넷을 통해 스타성과 방송적 가치를 입증한 JYJ는 강력하고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음악 방송 출연은 불가능했다. 한국대중문화예술산업총연합회(문산연)의 방송 활동 규제 요청이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번 EBS에의 출연은 역사적인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음악방송을 주업으로 하는 방송사를 통해 컴백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인터넷, 모바일, SNS 혁명 에너지가 추동한 역사적이며 구조적인 사건인 것이다. 시아준수의 EBS 선택과 EBS의 시아준수 선택은 예사롭지 않은 시대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2009년 이전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양자의 통찰적 만남은 일회성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새로운 문화 체제의 서막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의 방송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철학의 방송 체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제약할 수 없는 편집 권력 "방송"

사실 EBS 출연은 마케팅 차원에서 JYJ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JYJ는 음악 방송 출연을 제약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스타로서 마케팅 파워를 행사해 왔다. 굳이 EBS 더 나아가 방송이란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감을 의심할 수 없다. 2014년 11월 도쿄 돔에서 열린 공연에서 이틀간 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1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최근의 서울 공연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하늘을 찔렀다. 방송출연이 제약당했지만 이제 방송은 그에게 제약이 아닌 것이다. 그들을 제약할 수 있는 건 그들 자신뿐이다. 인터넷과 SNS는 제약의 사슬을 끊고 팬들과 직접 교감하고 소통하게 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고라(Agora)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이다.

신 시대는 甲乙의 관계 역전의 시대

'JYJ 사건'을 통해 문화권력의 역전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문화권력의 핵은 방송이었다. 모든 길은 방송으로 통했다. 방송에 살고 방송에 죽었다. 관객을 만나는 접점은 브라운관이었다. 음반의 성공도 공연의 성공도 방송이 좌우했다. 방송은 문화창달의 주역이기도 했지만 절대 권력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한 절대 권력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보는 절대 권력의 붕괴와 건설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의 산물이다. 권력은 이동한다. 공룡 기획사의 출현은 절대 권력의 약화를 가속하고 급기야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획사는 방송 창구를 통해 소속 아티스트를 세상에 내놨다. 그러나 갑을 관계(甲乙關係)에서 더 이상 을(乙)로서의 기획사는 의미 없는 시대가 되었다. 방송은 더 이상 갑(甲)이 아니다. 갑을(甲乙)의 관계전도는 역사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방송법에 의해 편성과 제작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JYJ의 방송출연제약은 또 다른 역전 현상의 단초를 보여준 것이다. 단 이틀간의 공연으로 150억원의 매출력과 관객 동원력을 보인 월드 스타가 출연하는 데 제약당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출연과 제약의 기회비용을 견준 후에 "제약"이 더 타산적이라는 합리적 결론에 도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의 갑을(甲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90년대 후반 구멍가게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대형 기획사의 출현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의 문화 수준을 글로벌 수준으로 높였다. 한류를 창출하고 부흥시켰다. 80년대 90년대 초에 불가능했던 드라마와 K-POP의 글로벌 진출은 새로운 문화권력이 만들어낸 신화다. 70-80세대는 서양 POP으로 대표되는 문화의 신봉자이면서 동시에 한류의 주창자다. 그들의 창조 코드는 기획이다. 스타는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스타 레시피에 의해 창조되었다. 레시피에 의해 창조된, 기획된 스타의 손짓, 발짓, 눈빛 하나하나는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 탁월성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한류는 한민족의 자랑이요, 자부다. 그들이 만들어 낸 판타지는 한국의 젊은이와 아시아의 젊은이를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류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 어려운 것이다.

자유가 배제된 기획은 괴물!

그러나 지나친 기획은 자유를 제약하고 그것은 급기야 창조를 억제한다. 진정한 창조와 예술은 자유를 먹고 사는 동물이다. 자유는 때로는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한 괴물도 된다. 히틀러는 자유가 배제된 예술로 파시즘을 기획했고 레닌과 스탈린은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자유가 배제된 예술은 한 시대를 풍미할 수는 있어도 영원할 수는 없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자유가 박탈되면 인간은 사라지고 동물만 남는다. 자유를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건 그것이 인간으로 존재의 의미 자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기인 1789년 8월 26일에 발표된 '인권선언'이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것으로 시작한 것도 자유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예술가에게 자유로운 영혼과 괴팍을 허용해주는 문화가 존재하는 것은 그들이 자유로워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배제되고 기획된 걸그룹의 군무(軍舞) 같은 군무(群舞)나 북쪽의 대규모 매스게임을 목도하면 그래서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획일화 속에 창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다양성은 창조의 원천이고 자유는 다양성의 어머니고 뿌리다. 물론 인간의 자유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자유의 순간부터 죄성을 잉태하고 있다. 그 자유로 인하여 인류는 한편으로 참혹과 참상의 역사도 경험한다.

자신과 타자의 자유도 충돌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자유도 충돌한다. 충돌의 역사가 비극의 역사를 초래하지만 진보의 역사도 만들었다. 자유는 타고난 것이라 보통의 억제력으로는 제약할 수 없다.

JYJ의 독립선언이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예술을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러나 그의 독립은 성공으로 귀착된 것으로 보여진다. 기실 그의 성공에는 2000년 초반까지도 상상할 수 없는 기술 혁명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은 통제할 수 없는 자유와 독립을 가능케 했다. 모바일, 인터넷 혁명 전의 권력은 대개 편집된 권력이다. 권력은 편집의 산물이다. 편집은 악마도 천사로 만든다. 꺼꾸로 천사도 악마가 된다. 그래서 악마의 편집이다.

인쇄 미디어의 시대에는 편집 권력은 신문이었다. 한정된 지면에서 편집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TV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TV는 하루에 24시간 이상 방송할 수 없다. 희소성은 권력을 만든다. 편성권과 편집권은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다. 편성권은 편집권의 하나의 형태다. 독자와 시청자는 중간자(미들맨)의 편집의 과정을 뛰어넘어서 원천 텍스트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취재, 편집자의 눈을 통해 걸러진 뉴스를 만난다.

미들맨은 죽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들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들맨을 죽여야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모바일, SNS 시대에 인류 역사상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변이 속출되고 있다. 편집자가 사라지고 있다. 유저의 동영상과 글이 삭제 없이 유통될 수 있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는 글자수를 제한하지만 페이스북은 그마저의 제한도 없다. 유통을 좌우하던 미들맨의 존재가 사라지니 모든 게 바뀌고 있다. 2006년 4월에 저드슨 레이플리가 업로드한 <댄스의 진화>는 두 달 만에 2,50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무대 위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맞춰 다양한 춤을 추는 6분짜리 롱테이크 동영상이다. 현란한 조명도, 무대장치도 없이 원 카메라에 의해 촬영된 보통사람의 흐릿한 동영상이다. 최근에 방송한 EBS의 '지식채널 e'의 "박지선"편도 방송 시청률은 1% 내외에 불과하지만 SNS에서 하루 만에 190만명에게 도달하였다고 한다.

탁월한 기획자와 편집자도, 기획사도 필요 없다. 넘기 어려운 장벽의 방송사도 필요 없다. 고가의 장비도 필요 없다. 제작비도 필요 없다. SNS를 통한 핵분열의 속도는 TV는 전파 속도를 추월한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신화는 이런 공간에서 창출되었다.

편집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와 편집되지 않을 자유와 권리 충돌에서 누가 승리하는가? 편집되지 않을 자유와 권리가 승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편집권은 전가의 보도가 이미 아닌 것이다. 방송이 역전된 환경을 재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방송의 시청 점유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신문이 방송에게 자리를 내주듯 방송도 인터넷과 SNS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방송>과 <인터넷> 감성의 "1.5 전략"

JYJ의 독립 사건과 시아 준수의 'EBS 스페이스-공감' 출연 사건은 서로 다르지 않은, 동일한 사건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하나의 선택은 방송출연제약으로 귀결되었고 또 하나의 선택은 방송출연으로 결정되었지만 하나의 현상으로 보여지는 것은 왜 일까? <공감>은 전통 방송 철학 "1"과 인터넷 철학 "2" 사이에 "1.5"쯤되기 때문이다.

물론 <공감>은 지난 10년간 독특한 칼라를 유지해왔다. 일반적 방송의 도그마에 함몰되지 않고 모든 장르의 뮤지션과 음악을 섭렵해왔다. <공감> 인터넷 사이트에선 공감의 아이텐터티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신중현, 송창식, 김창완, 주현미, 이승환, 제이슨 므라즈, 뱀파이어 위캔드 클로드 볼링 등 국내외 최정상급 아티스트부터 신인 발굴 프로젝트 <헬로루키>를 통해 선발한 국카스텐, 장기하와 얼굴들, 한음파, 아폴로 18 등 신진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는 'EBS 스페이스 -공감'은 록, 팝, 재즈, 클래식, 월드 뮤직, 국악 등 장르에 관계없이 오직 음악을 통해 관객과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감>은 "공감" 자체가 정체성인 것이다. 시청률에도 연연해 하지 않는다. 악마의 편집도 없다. 가능하면 녹화한 것을 거의 그대로 방송한다. 최고의 정상급 가수부터 신인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를 허용함으로써 개방성, 다양성과 예술성을 추구한다. 오히려 매스미디어에 소외된 아티스트들에게 기회의 창구인 것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저녁 EBS 본사가 있는 도곡동 '공감 HALL'에는 매일매일 공연이 진행된다는 것도 새로운 것이다. 마치 방송 편성처럼 월~목요일 일정한 시간에 공연함으로써 새로운 공연 라이프 스타일과 사이클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와 <시아준수> "공감 철학"의 승리!

EBS의 '공감정신'은 전통적인 방송 관행과 새로운 인터넷 관행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다. 방송 관행에서는 관객보다 시청자가 우선한다. 현장에서 관객과 호흡하고 공감하는 리얼리티는 방송에서 필터링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방송 매카니즘적인 숙명이기도 하다. 인터넷 관행은 가능한 한 편집을 자제하는 것이다. 캐스팅도 편집의 행위이다. 편집에는 기준과 지향이 전제된다. 국내외 스타부터 신인까지 모두 캐스팅하는 것은 개방성이란 편집 기준과 지향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가능하면 편집하지 않겠다는 철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상업적 매커니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EBS와 <공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악마의 편집은 해당 방송 콘텐츠의 예술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편집 이전에 존재하는 아티스트의 예술성을 또한 왜곡시킬 수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롱 테이크의 영상 문법을 중시하는 것은 짧은 쇼트의 편집이 팩트나 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몰론 <공감>도 롱 테이크로 편집되지는 않는다. 시아준수가 <공감>을 선택하였든 시아준수가 캐스팅되었든 간에 상관없이 양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통적 방송 관행을 넘어서 새로운 <공감>의 철학과 지향과 '공감'을 이뤘기 때문에 출연이 가능한 것이다.

"시청자와 관객이 아무런 편견 없이 음악가의 음악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 <공감>의 이혜진PD와 "소극장 콘서트를 꿈꾼다고 말했는데, 꿈이 이뤄졌다. 내 음악으로 행복한 공감을 얻고 싶다"고 소감을 말한 시아 준수의 말에서 방송과 인터넷의 "1.5" 감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공감 공연> 전세계 온라인 생중계로 "공생과 상생" 모색해야

이런 측면에서 '공감 공연'을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검토하고 있는 시아준수의 생각은 실현되었으면 한다. EBS를 통해 독점 방송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공중망으로 날아가든 유튜브로 날아가든 EBS와 시아준수가 동승하고 날아간다. 개방과 공유라는 인터넷 SNS의 속성이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합쳐져서 방송 속성과 함께하는 전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함께 갈 수 있다. 방송의 살 길이다. 신문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늦었지만 방송은 인터넷 철학과 감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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