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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부남과 25년 동안 바람을 폈다

  • YourTango
  • 입력 2015.03.27 08:15
  • 수정 2015.05.27 14:12
ⓒAlamy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 블로거이자 연애 사이트 YourTango의 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By A.J.

나는 1981년 샘을 만났다. 당시 39살이었던 나는 아주 끔찍한 이혼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14개월 된 아이와 나를 버린 남편은 기본적인 자녀 양육비도 제대로 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능력 있는 변호사가 필요했다. 그때 알던 두 명의 변호사가 동시에 한 사람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둘은 정말 잘 맞을 거예요."

샘은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도사였다. 나는 그에게 계속 물었다. "전 어떻게 하죠? 괜찮을까요?" 그는 자기가 모든 일을 해결할 거라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지켰다.

나는 그에 대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가 애정의 대상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착한 아내와 다 큰 자녀들이 있는 기혼자. 그러나 난 외로웠고 두려웠다. 열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그런 허탈감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감정이 논리보다 훨씬 더 앞섰다.

다음 같은 말로 그를 아파트로 초대했다. "딸과 내가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지도 않고 우리 상황을 법정에서 어떻게 변론할 수 있겠어요?"

속 보인다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가 응했다는 것이다.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난 그가 입은 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아니죠. 정말 이것만은 안 되는데..."라고 그는 진지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딸과 베이비시터가 운동을 하러 나간 기회를 이용해 그와 아파트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곤 했다. 그는 가끔 오후 업무를 쉬고 나를 코니 아일랜드에 데리고 갔다. 2년이 지나자 그는 '언제나'라고 새겨진 금과 에나멜로 만든 핸드메이드 반지를 내게 선물했다.

그의 아내가 바람피우는 것을 눈치챘고, 사실을 밝히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우린 별로 불화가 없는 사이였는데 우연히도 당시에는 대판 싸운 후 헤어진 상황이라 샘은 아내에게 우리 사이가 끝났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고 샘도 이후 그 대답을 고치지 않았다.

불륜의 상대가 된다는 것

친구 부부 아서와 린은 내가 '불륜녀'의 역할에 만족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불륜녀'라는 역할이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아빠는 내가 15살 때 재혼하셨다. 엄마가 죽은 지 5년 만에 말이다. 새엄마는 아빠가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며 처음부터 나를 미워했다. 아빠는 내가 따로 살면 새엄마가 좀 '진정'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미시건 디트로이트 시의 멈포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다른 아이들처럼 집에 돌아가지 않고 차를 몰고 시내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아빠가 때때로 호텔에 와서 나와 함께 있어 줬다. 그러나 대부분은 집에서 새엄마와 오빠랑 지냈다. 난 집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난 샘과의 불륜을 어린 시절에 어긋났던 내 경험을 성공적으로 재현하는 기회로 여겼다.

원래 잘 나가는 광고 카피라이터였던 나는 이혼과 외부모 역할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업무가 요구하는 만큼의 집중이 불가능했다. 내가 일을 안 하는 기간엔 샘이 나와 딸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한 번 이런 말을 했다. "절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1987년에는 가족관계가 그에게 특히 중요한 시기였다. 샘의 딸들이 결혼하고 자신의 가족을 만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가족 관리에 요구되는 시간이 늘어났다. 나의 앞에 서서 샘의 관심을 요구하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즉, 나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더 줄었다.

1994년엔 이미 '함께' 13년 동안의 세월을 보낸 후였다. 주중에 샘은 나를 만나기 위해 매일 시간을 냈다. 함께 외식도 하고 아파트에 돌아와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때 딸이 이미 십 대였기 때문에 딸이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만 샘을 집으로 초대했다.

난 그를 볼 때마다 숨이 가빠졌다. 그 어느 누구와도 그런 열정이나 깊은 연대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난 우리 둘의 시간이 현실의 세계에서 잘라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빨래를 걱정하지 않았고, 그가 코를 고는 것을 참지 않아도 됐다. 그는 내 고양이 몬티가 머리 맡에서 함께 자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됐으며, 그의 영국산 양복에 오렌지색 고양이 털이 묻는 일도 없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듯

정신 치료사는 자신의 감정을 너무 빨리 믿지 말라고 내게 조언했다. 마음 깊이 감정을 느낀다고 다 이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난 샘을 너무 사랑했다. 완전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처럼.

클리셰(상투적인 문구)대로라면 아빠 대신 그를 선택했다고 하겠지만, 내 경우엔 그런 클리셰가 아니었다. 나는 샘을 엄마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엄마가 죽은 이후로 느끼지 못했던 안정된 느낌과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그에게서 받았다.

2009년 어느 날 오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리젠시 호텔 코너 테이블에 앉아 난 그에게 만약에 그가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에게 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전혀 예상 외였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당신한테 최선을 다해야지. 이런 말은 다시 꺼내지 맙시다."

주먹으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의 상처보다는 내가 바보 같다는 느낌이 더 짙었다. 왜 나는 자신을 이제까지 더 잘 돌보지 못했을까? 샘에게 덜 의존하도록 어떤 일이라도 왜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하면서도 나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불쾌한 점심 식사를 하다가 드디어 끝이 났다. 그것도 당연히 리젠시호텔에서였다. 이것저것 못한다는 것을(밤을 함께 보내는 것도 안된다, 태양의 서커스는 이미 가족과 관람해서 싫다 등) 핑계 대는 샘을 보며 갑자기 딱 분명해졌다.

내 가슴에 난 구멍은 나 외에는 그 누구도 채울 수 없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해야 했다.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말이다. 드디어 이해한 거다.

호텔에서 나와 파크 애비뉴에 잠깐 서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는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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