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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주인이 본 술꾼들의 거짓말 5

술꾼들의 가장 흔한 거짓말은 딱 한 잔만 더 마시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값싼 자기와의 약속은 없다. 마지막 한 잔 이후에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이름의 한 잔을 마시게 된다. 물론 이번에도 말 그대로 진짜 마지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습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술을 주문할 때마다 '그런 의미에서' 라는 구실을 붙인다. 그런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정승환
  • 입력 2015.03.24 12:54
  • 수정 2015.05.24 14:12
ⓒGetty Images

1. 마지막 한 잔

"여기 오백 하나 더 줘요."

새벽 두 시. 마지막 남은 손님은 대식 아저씨. 꼬박꼬박 삼십 분에 한 잔씩, 다섯 시간째 마시고 있는 그는 항상 영업이 끝나는 시각에 마지막 잔을 주문한다.

"제기랄, 이젠 늙었어. 본래 오백 열 개 가지곤 끄떡도 없었는데. 어이, 여기 마지막으로 한 잔만 더 줘."

"나도 알아. 이제 가야지. 맥주는 십 분 안에 마시고 갈 거야."

대식 아저씨가 '마지막 잔'을 정말 십 분 만에 마시고 나갔느냐.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술꾼들의 가장 흔한 거짓말은 딱 한 잔만 더 마시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값싼 자기와의 약속은 없다. 마지막 한 잔 이후에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이름의 한 잔을 마시게 된다. 물론 이번에도 말 그대로 진짜 마지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습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술을 주문할 때마다 '그런 의미에서' 라는 구실을 붙인다. 그런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W 씨의 마지막 잔 이후에는 두 번째 마지막과 세 번째 마지막 잔이 이어진다. 네 번째 마지막은 없다. 그때부터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라고 단서를 달아서 계속 마시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2. 나는 이 술집의 엄청난 단골이다.

거의 매일 와서 마시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이 언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씩 오는 사람은 스스로 단골임을 자처한다. 그 중에는 전혀 내 기억에 없는 '오랜' 단골도 있었는데, 정작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가게 개업 연도를 실제보다 몇 년씩 앞당겨 부르기도 하고, 수십 번도 더 왔다면서 화장실 위치를 모르거나, 또는 내가 가게 주인이 아니라고 우기기도 했다. 사실이 어떻든 별 탈은 없다. 최후에는 그런 사소한 혼동은 술 탓으로 돌려진다. 그 외의 뜨내기손님들은 극장의 영화시간이나 친구와의 약속을 기다리느라 간단히 한두 잔을 마시고 간다.

3. 내가 가는 날 그 술집에 손님이 많다.

"나는 사람들을 몰고 다녀."

"나만 가면 희한하게 그날 손님이 많더라고"

이건 미신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술집을 선택한 날, 나도 같은 장소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물론 한두 명의 예외는 있다. '날파리'는 정반대의 미신을 믿게 하는 인물이었다. 손님을 모이지 않게 하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그가 오는 날이면 워낙 손님이 없고 파리만 날아다닌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다. 일 년 넘게 단골로 왔는데 그가 오는 날은 거짓말처럼 손님이 적었고 그가 마시는 술도 적었다. 열흘에 한 번 정도 들러서 500cc 생맥주 한 잔으로 한 시간 반 정도를 마셨다. 누가 술을 사주지 않으면 보통은 두 잔을 마시고 갔다. 그 역시 자신이 손님을 끄는 편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오는 날에는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무에게도 술을 산 적이 없는 그가, 항상 술을 얻어먹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였다. (반대로 서비스 술이나 안주를 사양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일러스트레이터였던 그는 항상 돈이 부족했다. 모처럼 손님이 많던 어느 날, 날파리는 정말 예외적으로 어떤 여자를 데려와 위스키 한 병을 외상으로 마시고 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인의 말로는 술값을 갚기로 한 날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미안해서 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위스키 한 병이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자 점점 손님이 늘었다. 아니, 그는 손님이 모이기 시작할 즈음에 떠났다.

W는 또 하나의 예외다. 그가 오는 날에는 언제나 손님이 많았고, 자신이 술을 워낙 많이 마셔서 매상이 더 높았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 왔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하면 그가 단골이 될 수 있을까 늘 고심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술값을 조금 싸게 해주었다. 정말 희한하게도 그가 내 가게를 찾기 시작한 것은 날파리가 떠난 직후의 일이다.

4. 나 오늘 전혀 안 취한다.

반드시 거짓말은 아니지만 조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취하기 시작한다. S는 러시안 스탠다드 보드카를 처음 마시던 날 이렇게 말했다.

"저 오늘 하나도 안 취해요. 벌써 몇 잔이나 마셨는데, 정말 좋은 술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번호키를 누르지 못해서 한참 동안 애를 먹었다고 했다.

평소에 마시지 않던 독주가 당기는 날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L은 어느 주말 밤, 데킬라를 너무나 마시고 싶다며 병째 주문했다. 이상한 날이었다. 그는 독한 술을 좋아하지만 평소에 데킬라를 주문한 적이 없었다.

하여튼 그는 기분 좋게 잘 마시고 갔는데, 다음 날 오후가 되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나중에 연락했더니, 머리맡에 전화가 울리는데 손도 못 올릴 정도로 온 몸이 쑤시고 아파서 못 받았다고 했다. 그는 그 이후로 몇 년 간 데킬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5. 여기 분위기 너무 좋아요. 앞으로 자주 올게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처음 오는 손님이 이런 말을 하면 단골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더욱 희한한 점은 단골손님이라도 '주말에 올 것 같아요.' 라고 말하면 그가 지정한 날에는 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약속이 깨지거나, 다른 약속이 잡히거나, 친구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거나, 뭐 그런 식이다.

그 밖의 손님들의 들으나마나 한 말로는 '이번 금요일에 올 수 있으면 올게요.'가 있다. 아마도 '올 수 있어도 안 온다.'의 반대말은 아닐 것이다. 그저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정도의 가벼운 인사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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