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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비판과 공포증 분간해야

우파의 선동과 인종주의가 합쳐진 이슬람 공포증과 정당한 이슬람 비판을 분간하지 않으려는 좌파의 위선은 쿠아시 형제의 범죄를 무조건 인종차별과 계급갈등의 폭발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범행 직후 쿠아시 형제는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지 '이슬람을 차별하지 말라!'거나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외치지 않았다. 이슬람은 미개한 때문이 아니라 한때 너무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다. '옛날에 우리집 부자였어'라는 이들의 자원은 열등감이 아니라 턱없는 자긍심이다. 바보들만 이 역설을 모른다.

  • 장정일
  • 입력 2015.03.24 08:11
  • 수정 2015.05.24 14:12
ⓒASSOCIATED PRESS

* 이 글은 장정일 작가와 이택광 교수의 아래 1), 2), 3) 논쟁에서 이어지는 글로, 4) 글과 한겨레에 함께 게재됐습니다.

1) 장정일 | '이슬람 테러'에 온정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지제크의 답변

2) 이택광 | 장정일은 지제크를 물구나무 세웠다

3) 장정일 | 이택광이야말로 어정쩡한 좌파다

4) 이택광 | 이슬람 문제 아닌 것을 착각

일찍이 철학자 김진석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소도(蘇塗)와 근대 국가는 양립하지 못한다면서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민주화의 성지(聖地)' 명동성당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명동성당의 소도 역할에 너그러운 것은 그것이 고작 한 점의 장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한 전체가 명동성당이 되고자 했다면 당연히 저항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신정일치 제국의 시민이 되어 있을 줄이야.

인도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라는 소설로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로부터 사형(Fatwa) 선고를 받았다. 최근에 나온 그의 자서전 <조지프 앤턴>(문학동네, 2015)에 따르면 파트와는 작가만 아니라 "이 책의 내용을 알면서도 출판에 관여한 모든 자"에게 내려졌다. 곧이어 이탈리아·노르웨이·터키 번역자가 피습당하고 일본인 번역자는 피살당했다. 호메이니에게는 이들을 심판할 어떤 사법적 권한도 없었으니, 이것은 교황의 파문권이 되살아난 중세다.

이슬람 공포증의 현대적 용법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구에 퍼뜨린 것으로, 오늘날엔 유럽 좌파가 애용하는 독점적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세력이 '종북'이란 용어에 재미가 들려 그 어떤 발전적인 대북 정책도 모색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유럽의 좌파도 같은 꼴이 됐다. 루슈디 사건으로 유럽 좌파 지식인들에게 넌더리가 난 밀란 쿤데라는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청년사, 1994)에 "나는 그때 그들이 내건 그 점잖은 중립적 태도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면서, "유럽은 아직도 유럽인가?"라고 물었다.

우파의 선동과 인종주의가 합쳐진 이슬람 공포증과 정당한 이슬람 비판을 분간하지 않으려는 좌파의 위선은 쿠아시 형제의 범죄를 무조건 인종차별과 계급갈등의 폭발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범행 직후 쿠아시 형제는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지 '이슬람을 차별하지 말라!'거나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외치지 않았다. 이슬람은 미개한 때문이 아니라 한때 너무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다. '옛날에 우리집 부자였어'라는 이들의 자원은 열등감이 아니라 턱없는 자긍심이다. 바보들만 이 역설을 모른다.

종교로서의 이슬람과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이슬람주의를 구분해야 한다지만 사정은 간단치 않다. 이슬람은 반드시 신앙의 다섯 기둥을 준수해야 한다. ①신앙 증언('알라를 제외한 신은 없다') ②하루 다섯 번의 예배 ③라마단 기간 동안의 단식 ④자기 수입의 2.5%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자카트) ⑤평생 한 번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것. 이 가운데 ④는 이슬람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중시하는 미덕이자 권고 사항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저 미덕을 급진화하면서 종교와 좌파의 황홀한 연대를 이루었다. 하지만 ④가 미덕이나 권고가 아닌 신앙의 의무인 이슬람에서는 오히려 '자선'이 꽉 막힌 자본주의에 숨통을 터주고, 계급 혁명을 미연에 저지하는 방지턱이 된다. 자선이 신앙의 의무로 주어졌으므로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비이슬람적'인 것으로 단죄된다. 때문에 사회가 혼란할 때마다 이슬람주의는 좌파보다 더 최상층과 최하층 양편에 효과적으로 적응한다.

이슬람국가(IS)가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종교 고유의 가치를 급진화하고 있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우리는 이슬람과 이슬람주의가 얼마든지 친화적일 수 있다는 암울한 단서만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예시는 이슬람주의를 계급갈등이나 제국주의로 환원하는 것 이상의 이슬람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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