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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화하고 있다. 우먼에서 휴먼으로

그녀들은 이제 너그럽다.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입장 바꿔 생각하고 행동하기의 달인들이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던 젊은 날의 어록들과 한참 멀어진 듯 따뜻한 언어들을 구사한다. 신기하다. 자식들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애면글면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엄마를 떠나가는 보폭에 맞춰 그녀들도 자식들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해냈다.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 안목까지 어느덧 갖춘 걸까. 조금 잘난 척 이름을 붙이자면 '60이후의 관점'이겠지.

  • 정경아
  • 입력 2015.03.25 13:04
  • 수정 2015.05.25 14:12
ⓒAlamy

함께 여행을 다니는 서너 개의 작은 동아리가 있다. 혈연뿐 아니라 직장이나 학교 시절, 또는 동네 인연이 발전한 결과다. 나이는 또래들을 포함, 위 아래로 각각 5년 차이 정도. 여행을 떠나 며칠을 함께 먹고 자다보면 평소 안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우선 각자의 재능이 드러난다. 운전을 잘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좋아하기까지 하는 친구는 운전대를 접수한다. 안심이다. 여고 때부터 공부쟁이였던 한 친구는 가이드북을 달달 외운 모양, 세부 일정을 기획하고 행선지에 대해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한다. 최근에 읽은 새 책이나 영화 평으로 우리를 업데이트시키기도 한다. 음식을 따로 준비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유부초밥과 주먹밥에 아삭한 돼지감자 장아찌를 도시락으로 가져온 친구도 있다. 나는 숫자나 회계에 전혀 조예가 없는 처지에 총무를 맡아 공동기금을 관리하느라 쩔쩔맨다, 무쇠팔 무쇠다리로 행선지마다 마당쇠 배역을 자처하는 친구도 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밥값을 한다.

평소엔 드립커피를 엄청 밝히던 친구들이 기사식당 자판기의 달달한 공짜 커피에 빠져든다. 전국적으로 분포된 값싸고 맛있는 기사식당들과 단골을 트고 난 후의 현상이다. 이름만 기사식당이지 남녘 해남이나 강진 쪽 기사식당들은 거의 한정식을 방불케 하는 상차림으로 우리를 열광시킨다.

여행 내내 차 속이나 민박집에서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퇴직이 임박한 남편 흉보기와 자랑질은 동시다발로 진행된다. 아들딸의 취직 걱정도 기본 메뉴. 한 친구는 아들이 사귀는 여친의 신비주의 태도 때문에 도무지 그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하소연을 유머로 승화시켜 모두를 배꼽 잡게 한다. 임신 중인 딸이 석 달 후 아기를 낳으면 결국 친정 엄마인 자신이 손주를 기르겠노라 선언하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스포츠용품 광고기획자인 딸이 출산 휴직 후 커리어에 불이익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을 곁들이면서.

한바탕 가족 관계 현황 브리핑이 끝나면 미래 기획 발표 순서다. 유화를 몇 년 배워왔던 친구는 봄에 수채화를 시작하겠다고 한다. 종로에서 전통차 카페를 하는 친구는 자신의 영업 공간에서 소규모 문화 행사를 열겠다며 격월별 행사 일람표를 제시한다. 어느 대학에 방문교수로 와있는 일본인을 초청해 일제 강점기 서울의 생활상에 대한 일본인의 관점을 듣는 모임으로 시작할 거라나. 근사하다. 외국계 의류회사를 퇴직한 친구는 재취업 준비 중이다. 글로벌 소싱 전공을 살려 재취업에 성공할 게 거의 확실시된다. 3년 후에 30년 대기업 직장 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후배는 선배들에게 퇴직 후 재취업 교육 아이디어를 구한다. 지금까지와 다른 인생 2막에 궁리를 거듭하는 성실형이다.

을미생으로 별로 하는 일 없이 회갑을 맞는 나는 회갑 기념행사인 '된장학교' 입학과 허핑턴포스트 블로그 연재 상황을 발표한다. "웬 된장학교?" 친구들이 의아해 한다. 내 대답은 "된장찌개 한번 제대로 끓여보려고." 모두들 나를 비웃으며 박장대소. 블로깅도 나이 60을 자축하는 책 한 권을 만들 생각으로 시작한 거다. 굳이 책을 못 만들어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잠들기 전까지 이어지는 대화.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진다. 그녀들은 예전의 그녀들이 아니다. 길게는 거의 40년, 짧게는 10년 동안 알고 지냈기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들은 친구였고 동지였고 때로 적대적 경쟁자였다. 공유의 명분 아래 전공과목 발표물을 상호 표절했다. 경쟁이 예상될 때 상대방에게 업무상이나 그 외 결정적 정보를 차단하기도 했다. 상대방의 실수나 실패를 은근히 기뻐한 적이 있다.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은 것도 꽤 여러 번. 1980년 대 초반, 언행일치 현실 참여를 강조하던 운동권 친구는 실천에 게으른 내게 "비겁하다"는 말로 대못을 박기도 했다. 가까웠기에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았던 사이, 몇 년씩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낸 기간도 있었다.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한 것은 결국 오래된 인연이다. 서로의 흑역사를 포함한 연애 연대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 거기다 너나없이 체험한 밥벌이의 신산함이 서로를 연민케 했을까. 1970년대 초반에 사춘기를 통과했던 이들이 갖는 문화적 감수성과 취향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우리는 재결합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러 다닌다.

30년 넘게 결혼 중이건, 돌싱이건 간에, 대학 중의 대학인 결혼과 직장생활을 통해 그녀들이 축적한 내공은 눈부시다. 우선 아는 것이 엄청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도서관으로 여겨질 정도로 박식하다. 남북관계와 동북아 현대사, 기독교 대 이슬람의 갈등 배경과 전망뿐만이 아니다. 아들의 진로 문제로 남편과 아들 사이가 급냉동 될 때 부자관계를 조정하는 기술부터 급체한 아기의 엄지손 따기, 한밤중 남편이 술친구들을 끌고 들이닥쳤을 때의 긴급대처 10분 요리 레시피까지 도대체 그녀들은 모르는 게 없어 보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녀들은 이제 너그럽다.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입장 바꿔 생각하고 행동하기의 달인들이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던 젊은 날의 어록들과 한참 멀어진 듯 따뜻한 언어들을 구사한다. 신기하다. 자식들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애면글면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엄마를 떠나가는 보폭에 맞춰 그녀들도 자식들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해냈다.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 안목까지 어느덧 갖춘 걸까. 조금 잘난 척 이름을 붙이자면 '60이후의 관점'이겠지.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젊은 날의 시야협착증을 인정하고 사과할 정도는 된다. 사람들이 내뿜는 각자 고유한 아름다움에 조금씩 눈을 떠가는 덕분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친구 재발견의 시대. 이제 우리들은 서로 칭찬한다. 글을 칭찬하고 장래 희망을 칭찬한다. 시댁과 친정에 대한 적정선의 섬김이나 저항의 자세를 칭찬한다. 먹을 것을 나누고 자잘한 선물을 보낸다. "보고 싶다"고 시도 때도 없이 이모티콘 곁들인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는 함께 여행 다닐 친구 명단에 서로의 이름을 올릴 수 있음을 마구 기뻐한다. 이거, 굉장한 재산 아닌가.

내가 존경하는 김선배는 이 현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진화하고 있다. 우먼에서 휴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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