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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출마 초읽기에 들어간 힐러리 클린턴은 누구인가?

미국 첫 여성 대통령에 재도전하는 힐러리 로댐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2016년 대선 출마 선언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정확한 출마 선언 시점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선거자금 모금 과정에서 ‘다음달께’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 주자들은 물론, 공화당 잠룡들도 여유있게 따돌리고 있다. 내년 11월 초 치러지는 대선까지는 20개월이나 남아 있어 예상치 못한 복병들이 튀어나올 수 있지만, 현재로선 ‘클린턴 대세론’이 힘을 얻고 있다. 공화당이 최근 불거진 클린턴의 국무장관 재직 시절 개인 이메일 사용 문제를 집요하게 물어뜯는 것도 어떻게든 대세론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로 보이지만 역부족이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백악관에서의 ‘퍼스트레이디’ 생활, 국무장관에 이르기까지 68년간 삶의 행적을 쫓아봤다.

힐러리 클린턴의 삶

1947년 10월26일: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생

1965년: 웰즐리여대 입학

1969년: 예일대 로스쿨 입학

1971년: 빌 클린턴과 교제 시작

1975년: 빌 클린턴과 결혼

1979년 1월~1981년 1월/1983년 1월~1992년 12월:

빌 클린턴, 아칸소주 주지사 역임

1993년 1월~2001년 1월: 빌 클린턴, 대통령 역임

2000년: 뉴욕주 민주당 상원의원 당선

2008년 6월: 미국 대선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

2009년 1월~2013년 2월: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1947년 10월26일, 미국 중부 일리노이주의 최대 도시인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전형적인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그는 2003년 펴낸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어머니는 나와 두 남동생 주위를 맴돌면서 하루를 보내는 주부였고, 아버지는 소규모 사업가였다”고 회고했다.

클린턴은 대학 재학 시절까지는 ‘보수적인 공화당원임을 늘 자랑으로 여기던’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후 ‘민주당 성향이었지만 밖으로 좀처럼 이를 잘 드러내지 않았던 어머니’가 그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클린턴이 평생 동안 아동과 복지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어머니의 삶과 깊이 연관돼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어머니는 모든 인간, 특히 아동들이 당하는 학대에 분개했다”고 적었다.

그가 여성의 권리에 처음으로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약속에 자극받아, 우주비행사 훈련에 지원하고 싶다는 편지를 미국항공우주국(나사)에 보냈지만, 나사의 답변은 “여자는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클린턴은 이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여자를 싸잡아서 일률적으로 거부한 것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나중에 내가 모든 종류의 차별과 맞서는 이들에게 더욱 공감하고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1960년대 미국 전역에 들불처럼 번졌던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은 클린턴을 ‘공화당 지지자’에서 ‘민주당 지지자’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65년 미국 명문여대인 웰즐리여대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그는 대학의 ‘청년공화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여전히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공화당원이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공화당의 베트남전 확전 주장이나 소속 의원들의 인종차별주의적 발언들은 그를 실망시켰고, 1968년 민주당 대선 예비 주자로 나선 반전주의자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공화당과 결별했다.

1969년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한 힐러리는 1971년 로스쿨 동창인 빌 클린턴을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4년간의 연애 뒤인 1975년, 그는 인생에서 상당히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된다. 남부 아칸소주에서 정치인의 꿈을 키우던 빌 클린턴은 그에게 청혼하면서 아칸소주로 가자고 제안했고, 워싱턴에서 이미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힐러리는 어렵사리 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빌과 결혼 뒤 아칸소주에 정착했지만 ‘빌의 아내’로만 머물지 않고, 1977년 어린이 보호재단인 ‘아동과 가족들을 위한 아칸소 대리인협회’의 공동창립자가 되는 등 아동 및 가족정책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남편이 주지사였던 1983년엔 아칸소주 교육표준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돼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교사평가를 의무화하고 주 표준 교육과정과 교실 크기, 입학 전 홈교육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 보급한 것이다.

빌이 1992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도 힐러리의 왕성한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대통령 부인으로는 처음으로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인 ‘웨스트 윙’에 별도의 집무실을 두고 인사 등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93년 1월 ‘전미 헬스케어’ 티에프 팀장으로 임명된 뒤엔, 의료보험을 확대하기 위한 연방정부 보건복지제도 개혁안 마련을 주도했다.

하지만 “대통령 부인이 법적 근거도 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공화당 다수파의 반발에 밀려 그의 개혁안은 끝내 의회 승인을 받지 못했다. 아칸소주 교육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힐러리 클린턴에겐 뼈아픈 정치적 패배였다. 그럼에도 그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정의 어린이에게 연방 차원의 지원을 하는 ‘아동건강보험 프로그램 법안’을 추진해 성공시키고, 사법부에 여성폭행방지사무소를 설치하는 데도 기여하는 등 아동과 여성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2000년 11월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클린턴은 2008년 대선을 앞두고 마땅한 후보가 없던 민주당의 확실한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07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클린턴 대세론은 거역할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변화’와 새로운 지도력을 호소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정치 풋내기’ 버락 오바마 후보의 돌풍은 거셌다. 2008년 1월 디모인에서 열린 민주당 경선 대회에서 오바마한테 큰 표차로 패배하면서 클린턴 대세론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8년 6월4일에 결국 오바마에게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내주었다. ‘대세론’에 자만해 안정적인 선거전략을 폈던 클린턴 진영의 패배였다.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경쟁자였던 클린턴에게 국무장관직을 제안한다. 미국의 세계 운영 전략을 책임지는, 대통령에 이은 실질적인 ‘2인자’ 자리였다. 애초 이를 거부했던 클린턴은, 국무부 인사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는 조건으로 국무장관직을 수용한다. 국무부 고위직 가운데 ‘오바마 사람’은 제임스 스타인버그 국무부 부장관 정도였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여성이나 인권 문제 등에서는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대외정책에서만큼은 오바마 대통령보다 대체로 더 강경한 편이었다. 이전에도 그는 2001년 9·11 테러 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등 상원의원 시절에도 대외정책에선 단호한 입장을 취해오던 터였다. 그 스스로도 이미 2012년 6월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권고했으며, 시리아 내전과 관련해서도 반군에 대한 무기 지원을 주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공화당 쪽의 대중국 강경파보다는 유연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협력적 관계를 강조하는 비둘기파도 아니었다. 2011년 가을 오바마 행정부가 대아시아 정책의 종합판을 내놓으며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라는 이름을 붙일 때도 클린턴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됐다. 당시 백악관은 ‘아시아 회귀’라는 표현이 군사적 뉘앙스가 배어 있어 중국이 반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심지어 대중국 정책의 실무사령탑이자 클린턴의 최측근이었던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조차도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란 용어를 선호했다고 밝힌 바 있지만 클린턴의 결정을 뒤집지는 못했다.

대북 정책에서도 클린턴은 북-미 관계 개선을 모색하긴 했지만 관계정상화라는 큰 목표보다는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기 위한 관리 차원의 성격이 짙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 아이콘처럼 돼버린 ‘전략적 인내’라는 용어도 실무자들이 간혹 언급하기는 했지만 클린턴이 2010년 5월26일 방한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대북 정책에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가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전략적 인내는 ‘미국이 먼저 유화책을 내놓지 않고 북한이 굽히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점점 굳어졌다.

클린턴은 국무장관 재직 시절 연방정부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아 최근 논란이 된 이른바 ‘이메일 게이트’에도 불구하고 2016년 대선 예비 후보 가운데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지난 12일(현지시각)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후보감 16명 가운데 클린턴의 인지도와 선호도는 각각 89%와 50%로, 다른 후보들을 가볍게 제쳤다. 민주당의 조 바이든 부통령은 78%의 인지도와 39%의 선호도로 2위를 기록했고, 공화당의 가장 유력한 주자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68%의 인지도와 35%의 선호도로 3위에 그쳤다. 선명한 개혁 어젠다로 진보 진영의 열광적 지지를 얻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인지도 41%, 선호도 22%에 그쳐, 아직은 클린턴의 대항마로는 위협적이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클린턴이 백악관 입성까지의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적잖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우선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고령과 건강이다. 미국의 전국 각지를 1년 이상 ‘초 단위’로 누비려면 엄청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2016년에 만 69살이 되는 그의 체력이 이런 강행군을 버텨줄지 물음표가 붙는다. 그는 2012년 말 뇌진탕 증세로 입원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너무 많은 참견꾼들과 너무 적은 참모라는 ‘역설’을 극복해야 한다. 그의 주변엔 남편 빌 클린턴의 인맥을 비롯해 2008년 민주당 경선 때의 참모들, 오바마의 참모들과 정치 컨설턴트들이 운집해 있다. 그러나 권위를 갖고 이들을 통제할 만한 핵심적인 측근 그룹은 아직 보이지 않으며, 최근 ‘이메일 게이트’가 단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클린턴의 참모들은 그가 장관 재직 시절 개인 이메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이미 몇달 전에 알고 있었지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언론에서 먼저 보도됐다는 것이다.

2008년에도 수많은 참모들과 정치 컨설턴트들 간의 갈등으로 오바마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는 평가가 많았다. 믿을 만한 측근 그룹을 만들어 ‘권위의 부재’를 극복하는 것이 대선으로 가는 핵심 관건인 셈이다. 2008년에 이은 대권 재수생인데다, 남편의 대통령 연임 등이 유권자들에겐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국무장관 당시 일어났던 리비아 벵가지에서의 미국 외교관 사망 사건 관련 의혹, 고액 강연료 논란 등도 다시 불거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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