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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머 앤드류의 50가지 그림자

플래처는 좋은 연주가 어떤 것인지 알지만 스스로는 할 수는 없는, 그럼에도 그것에 도달하고자 몸과 마음을 내던진 상태에 있는 연주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 연습에 대한 집착, 과정에 대한 순결성, 재능에 대한 불안, 무대에 대한 공포, 결과에 대한 불만, 평가에 대한 불안, 그리고 위대한 선배 연주자에 대한 존경과 질시, 신화에의 동경 등이 뒤섞여 온갖 형태로 표출되는 존재다.

  • 원종우
  • 입력 2015.03.21 08:37
  • 수정 2015.05.21 14:12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꽤 스포일러. 하지만 영화 특성상 읽고 보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음)

<위플래쉬>. (이를테면) 저런 류의 텐션 속에서 4년간 영국 음대를 다녔던 내게 이 영화는 일반 관객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그래서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고 -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는 건 극중의 비극적 졸업생 연주자만큼은 아니겠지만 내게도 다소 고통스런 면이 있다 - 결국 보러 들어가 앉아서도 이걸 보는 게 맞나 싶었다. 실제로 불편해서 중간에 나간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저런 훈육 방식을 미화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있단다.

하지만 나는 일종의 통쾌함 속에서 웃으면서 나왔다. 이 영화는 첨부터 끝까지, 오로지 메타포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플래처 같은 음악 선생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학생의 가정사를 모욕하고 뺨을 때리고 피를 철철 흘리는데 드럼에 앉히고, 그것도 모자라 쫒아낸다? 음악뿐 아니라 어떤 교육 현장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교사다. 그래서 훈육방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나의 플래처를 기억한다. 그는 BBC 오케스트라 출신으로 학생의 연주에 '쓰레기'라는 말을 던지던 이언 스콧도 아니고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연주력과 지식을 특유의 거만함과 함께 과시하던 숀 벡스터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거들었을 뿐이고 진짜 플래처는 내 속에 살고 있었다. 플래처의 잔인함과 불합리함은 오로지 자기 내부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사실 영화 속에 플래처의 메타포성에 대한 많은 힌트가 있다. 비현실적인 아침 6시 수업을 말하고는 정작 본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의 태도를 보면 먼저 왔다 간 것도 아니다. 이 일화는 훌륭한 연주자가 되려는 앤드류의 강박적 내면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나도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여러 번 나오는 찰리 파커의 심벌 이야기도 선생이 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에 의한 강박은 누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다. 나 역시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연습 신화에 스스로를 옭아 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음을 맞추지 못한 학생을 찾다가 다른 학생을 쫒아내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틀린 학생이 아니라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학생이 그 방을 나간다. 결국 그 학생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죽은 졸업생의 사인이 플래처의 입에서는 교통사고로, 이후 다른 사람에게서는 자살로 말해지는 부분은 어떤가. 플래처가 자신의 책임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걸로 보이지만 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앤드류가 믿고 싶었던 모습이 상황에 따라 변화해 투영된 것이다. 한참 학교를 다니며 열심히 연습할 때는 교통사고로, 좌절 끝에 학교를 떠난 후에는 자살로.

나의 플래처도 만만치는 않았다.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연습을 강요하며 장 보러 가는 일요일 한시간의 휴식만 허락할 정도로 독했다. 매주 두 번씩 있던 실기 시험 전에 나는 그의 비난과 모욕이 두려워 술을 마셨고, 더블 스윙 연습 대신 기타로 불가능한 악보의 완벽한 연주를 요구하는 그를 만족시키려다가 손가락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래서 교통사고를 겪고도 연주장으로 달려가는 앤드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삶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인 플래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너무 좌절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요컨대 플래처는 좋은 연주가 어떤 것인지 알지만 스스로는 할 수는 없는, 그럼에도 그것에 도달하고자 몸과 마음을 내던진 상태에 있는 연주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 연습에 대한 집착, 과정에 대한 순결성, 재능에 대한 불안, 무대에 대한 공포, 결과에 대한 불만, 평가에 대한 불안, 그리고 위대한 선배 연주자에 대한 존경과 질시, 신화에의 동경 등이 뒤섞여 온갖 형태로 표출되는 존재다. 마치 <뷰티풀 마인드> 속 존 내쉬의 상상 속의 친구 찰스의 음화(네거티브)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끝나고 웃으며 나올 수 있었다. 앤드류가 플래처를 엿먹여서, 혹은 그와 결국 화해하는 듯해서가 아니다. 아티스트란 무거운 존재 양식에 부가되는 대가를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앤드류의 모습이 멋지고 통쾌해서다. 내가 몇 년간 그림자라도 보고 온 그 연주자들의 세계, 월드 클래스 뮤지션의 세상은 저 지점을 통과하지 않으면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마지막 무대에서 앤드류처럼 덤벼들지 못했기에 그곳에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게는 지금의 삶이 더 어울린다.

여하튼, 그래서 이 영화는 실은 <앤드류의 50가지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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