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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게이

20대 초반 한창 연애에 목말라 있을 때에는 뜬금 없이 램프의 요정에게라도 빌고 싶은 소원이 한 가지 있었다. 팔 다리 굵고 등이 운동장처럼 넓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김게이야 김게이야, 그 동안 게이로 살기 난이도 나이트메어 급인 한국 사회에서 음으로 양으로 호모 포비아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잘 살아왔으니 내가 업적 보상으로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원하는 게 뭐니? 라고 묻는다면 이 초능력을 달라고 꼭 말하고 싶었다.

  • 김게이
  • 입력 2015.03.20 07:45
  • 수정 2015.05.20 14:12

[이미지 출처]

지금은 형과 결혼해 지지고 볶고 잘 살고 있으니 절실하지 않지만, 20대 초반 한창 연애에 목말라 있을 때에는 뜬금 없이 램프의 요정에게라도 빌고 싶은 소원이 한 가지 있었다. 팔 다리 굵고 등이 운동장처럼 넓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김게이야 김게이야, 그 동안 게이로 살기 난이도 나이트메어 급인 한국 사회에서 음으로 양으로 호모 포비아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잘 살아왔으니 내가 업적 보상으로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원하는 게 뭐니? 라고 묻는다면 이 초능력을 달라고 꼭 말하고 싶었다. 기나긴 솔로 생활에 지쳐 연애를 꿈꾸는 흔한 사람들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나에게 반하게 만드는 능력 같은 것을 달라고 하겠지만, 나같이 얌전하고 정숙한 게이가 그런 문란한 욕심까지는 언감생심 부릴 상상도 못했고, 어찌 보면 내 상상은 조금 더 특이한 거였다.

'엠 아이 블루?'라는 퀴어 단편 소설에서 보았던 바로 그 능력. 동성애 성향의 사람들을 파란색으로 볼 수 있는 초능력.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인정할 정도로 성향이 강한 사람은 아주 파아란 색으로 보이고, 동성애 성향이 약할수록 파란 색이 옅어진다. 물론 이 능력이 미다스의 손처럼 통제 불능이면 안 되겠지. 레이더를 작동시키듯, 스위치 온/오프가 자유로워야 유용할 거다.

[단편소설집 "엠 아이 블루?"]

이 바닥에서는 '게이다'라는 말이 존재하기도 한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게이+레이더'의 합성어인데, 게이가 다른 게이를 알아보는 능력을 발휘할 때 흔히 '게이다'를 통해 감지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능 좋은 게이다를 가진 게이라 해도, 그건 결국 주관적인 짐작과 추측일 뿐.

이 초능력이 생기면 놀랄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일단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몇 배는 많아 깜짝 놀랄 것이고, 동성애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표현했던 사람들 중 몇몇이 희미하게나마 푸른빛을 띠거나 심지어 완전히 파란색으로 보여 깜짝 놀랄 것이고, 볼 때마다 저런 사람이 게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전혀 게이 같지 않아 그림의 떡으로만 생각하던 남자들 중 몇몇이 새파랗게 반짝거려 깜짝 놀랄 것이고, 세상에 게이가 단 하나 있다면 쟤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파랗게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친척들 중 누군가가 파란색으로 보여서 깜짝 놀랄 수도 있고, 아직 돌도 안 지나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가 파란색으로 보여 깜짝 놀랄 수도 있고, 가끔 어떤 사람은 파랗게 됐다가 하얗게 됐다가를 왔다 갔다 해서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거다.

물론 이 초능력은 오로지 동성애자에게만 유용한 걸 거다. 동성애자가 아니라면 이런 초능력 따위 필요도 없을 것이고, 이런 초능력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이해하기도 어렵겠지.

누군가 마음에 들었을 때 다가가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당신과 사귀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습니까, 따위의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게이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안타까움이다. 퀴어는 수가 적다. 동성애자는 일상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할 때,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받아줄 극악의 확률에, 심지어 그 사람이 나처럼 게이일 확률까지 곱해서 생각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를 위해서는 모든 동성애자들의 숙제, 퀴어 인생의 안나푸르나, 용기의 최대치를 확인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지, 그 이름도 커다란 커밍아웃이라는 산을 먼저 넘어야 한다. 그래서 사실 동성애자들에게는 얼굴 대 얼굴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만남 속에서 데이트 상대 혹은 불멸의 연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전생에 하비 밀크쯤 되는 덕을 쌓았다면 나도 게이야, 그리고 나도 네가 좋아, 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동성애자 인권운동 계의 마틴 루터 킹 정도 되시는 우유느님,

미국의 동성애자 인권운동가 하비 밀크(1930-1978)]

그래서 퀴어들은 온라인을 통한 만남을 주로 이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온라인 특유의 익명성을 바탕으로 나는 게이다, 너도 게이다, 우리는 모두 게이다, 라는 사실을 전제한 상태에서 서로를 만난다. 상대가 어떤 말투를 쓰고, 어떤 빛과 냄새를 뿜고,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어떤 몸짓을 하고, 어떤 숨소리를 내고, 어떤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각도에서 어떤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얼굴 대 얼굴의 만남은 저 여자는 남자를 좋아해, 저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 라는 가설(오, 오늘의 이십일 세기에도 존재하는 이 무시무시한 말이여. 플로베르는 통상 관념 사전에서 가설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가설 : 종종 '위험하고', 언제나 '과감하다')을 기정사실화 하는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가지는, 그러면서도 전혀 의식하지는 못하는 특권이다. 심지어 그들은 저는 게이입니다, 혹은 저는 레즈비언입니다 고로 이성인 당신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라는 내용의 거절조차 들을 가능성이 거의 없지 않은가.

이성애자는 누군가에게 고백하기 이전에 한 가지 고민만 하면 된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할까? 하지만 동성애자는 두 가지 고민을 해야 한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할까? 라는 고민은 저 사람도 게이일까? 라는 고민이 해결된 뒤라야 가질 수 있는, 어찌 보면 참 부러운 고민이다.

20대 초반, 특히 군대 있을 때에는 정말 연애가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특히 상병이 꺾이고 몸이 좀 편해지고 나서 부터는, 부대에 갇혀 연애 못 한 극한의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켜 주옥 같은 시와 소설을 써내려 가긴 개뿔 그냥 후임들에게 건드리면 폭발하는 수준의 히스테리를 주옥 같이 부려 중대에서 진상으로 유명할 정도였다. 그때 주황색 활동복을 입고 국방색 매트리스를 긁으며 밤마다 꿈꿨던 내 연애의 모습은 이랬다.

한국현대시인론 수업을 낡은 인문대 건물에서 듣는데 저 뒷자리에 짧은 머리를 하고 무테안경을 쓴 남자가 보인다. 덩치도 딱 좋고 얼굴도 귀엽게 생겼다. 오호 괜찮네. 김춘수에 대한 발표를 위해 조를 짜는데 똑같이 복학생 처지라 놀아줄 사람이 없는 우리 둘은 같은 조가 된다. 도서관에서 같이 자료를 찾고 발표 피피티를 만들고 레포트를 작성하고 하면서 조금씩 친해지다가 말도 놓는다. 성공적으로 발표가 끝나고 저녁에 함께 술을 마신다. 그렇게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함께 시험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한다. 우리는 이제 대외적으로 친한 형 동생이 되었지만 나는 사실 그 형을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용기를 내 술자리에서 형에게 고백을 한다. 형, 나 사실은 게이야. 그리고 언젠가부터 형을 쭉 좋아해오고 있었어. 그래? 사실은 나도 게이이고 널 좋아해! 맙소사, 우리 마음이 같았다니. 그럼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야? 물론이지. 나는 이제 너밖에 없어. 나도 이제 형밖에 없어. 하트 뿅뿅.

내 스스로도 썩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이런 판타지를 상상했다는 게 이등병 때 군복입고 명동에서 놀았던 것만큼 민망하긴 하지만, 실제로 군 시절 절반의 시간은 이런 연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었다. 일반들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한 패턴의 연애. 일상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이 생기고, 고백을 하고, 사귀고. 사귀면서도 함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연애.

전역 후에 온라인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짧게 짧게 연애도 해보고 그러다 역시 온라인을 통해 만난 우리 형과 지금은 이렇게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일상에서 만난 사람과의 연애'가 영원히 이루지 못할 꿈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괜히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노스텔지어랄까, 가져보지 못한 떡에 대한 애먼 상상 식욕이랄까, 그런 게 있다. 내게 그런 초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연애도 한 번쯤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현실성이라곤 전혀 없는 빵상 망상 헛된 상상일 뿐이지만. 등이 넓고 팔뚝과 허벅지 굵은 램프의 요정이 뜬금없이 나한테 왜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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