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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사는 목숨을 건 '극한 직업'이다

U.S. Ambassador to South Korea Mark Lippert who was attacked by a man with a knife on March 5, listens to U.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n and Pacific Affairs Daniel Russel at the Foreign Ministry in Seoul, South Korea, Tuesday, March 17, 2015. (AP Photo/Lee Jin-man)
U.S. Ambassador to South Korea Mark Lippert who was attacked by a man with a knife on March 5, listens to U.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n and Pacific Affairs Daniel Russel at the Foreign Ministry in Seoul, South Korea, Tuesday, March 17, 2015. (AP Photo/Lee Jin-man) ⓒASSOCIATED PRESS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발생한 건 슬프고 걱정스럽지만, 난 아들이 자랑스럽다.”

마크 리퍼트(42)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과 관련해, 아버지 짐 리퍼트(71)가 지역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우선은 아들의 부상을 걱정하는 아버지이지만, 미국 대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반미 세력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는 ‘수난사’를 인식한 발언이다.

리퍼트 대사 사건처럼 동맹국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미 대사 관련 사건으로는 1964년 에드윈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 피습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16살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으며 미 하버드대에서 일본사를 가르쳤던 ‘일본통’ 라이샤워(1910~1990) 대사는, 1961년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일본 대사로 발탁됐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전 총리의 손녀인 부인 마쓰카타 하루와 더불어 일본에 도착하던 모습은 단연 일본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부임 3년 뒤 일본인 청년이 대사관 앞에서 흉기로 그의 오른쪽 넓적다리를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19살짜리 정신분열증 환자의 배후 없는 단독 범행으로 결론났지만, 하야카와 다카시 당시 국가공안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미-일 관계 악화가 우려되던 상황에서 라이샤워 대사는 수술 과정에서 수혈을 받았고, 그 뒤 “이것으로 내 몸 안에 일본인의 피가 흐르게 됐다”고 말해 일본 사회를 ‘안심’시켰다. 리퍼트 대사가 수술 뒤 병석에서 “김치를 먹었더니 더더욱 힘이 난다”며 “같이 갑시다”라고 한 것을 연상케 한다. 당시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는 “일본 젊은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일본인들을 대표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미국 쪽에 공개 사과했다. 라이샤워 대사는 당시 수혈 탓에 간염에 걸려 평생 고생하다가 26년 뒤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

미국 대사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미 국무부 누리집을 보면, 대사 6명이 국외에서 임무 수행 도중 숨졌고, 2명은 비행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최근엔 2012년 리비아 벵가지에서 발생한 영사관 피습 사건에서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를 포함해 중앙정보국(CIA) 요원 등 미국인 4명이 숨진 일이 있었다. 중화기를 동원한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의 공격에 당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제작된 '순진한 무슬림'이란 동영상에 대해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미 항의 시위가 벌어지던 중이었다. 동영상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사기꾼, 바람둥이 등으로 묘사한 내용이었다.

미국 특수부대는 당시 공격을 주도한 아흐메드 아부 카탈라를 지난해 6월 리비아에서 끝내 붙잡아 본토로 데려갔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자신의 재임 기간 발생한 벵가지 영사관 피습 사건을 “가장 아쉬운 일”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2012년 9월12일 새벽 리비아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에서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은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미국 대사가 의식을 잃은 채 옮겨지고 있다. 스티븐스 대사는 결국 숨졌다.

미국의 직접 개입 탓이라기보다는, 주재하는 나라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미국 대사가 희생된 일도 있었다. 1979년 2월 출근길에 무장 괴한들에게 납치된 애돌프 덥스 주아프가니스탄 미국 대사는 시내 한 호텔로 끌려갔다. 납치범들은 수감중인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고, 미국 쪽은 아프간 정부에 시간을 더 끌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덥스 대사는 무력 진압에 나선 경찰과 납치범들의 총격전 도중 목숨을 잃었다. 당시 아프간 당국이 협상을 하지 않고 진압하기로 결정한 배경엔 소련 쪽의 조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4년 8월엔 로저 데이비스 주키프로스 대사가 부임한 지 6주 만에 반미시위 도중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미 대사관 앞에서 모여든 그리스계 시위대 300~400명은 미국이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을 좌시한다며 시위중이었다. 저격 배후는 한달 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리스계 우파 민족주의 성향 무장세력이라고 여겨졌다.

붙잡힌 피의자들은 기소 당시 살인 혐의가 아닌 불법무기 소지 혐의를 적용받았고, 5~7년 징역형도 감형받아 결국 1년반 만에 풀려났다. 미국 정부도 사건 직후 즉각 데이비스 대사의 후임자를 보내 사건을 축소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1968년 8월 내전중인 과테말라에서 숨진 존 메인 미국 대사는 최초로 국외에서 목숨을 잃은 대사였다. 그는 대사관으로 이동하던 중 ‘무장반군’(FAR) 소속 반군에 붙잡혔고, 탈출을 시도하다 등에 총탄 8발을 맞고 숨졌다. 주검은 수습되지 않고 한동안 길가에 방치됐다. 앞서 대사관의 무장요원들을 살해한 바 있는 이 단체는 애초 수감된 반군 지도자와의 맞교환을 요구하려 했으나 메인 대사가 도주하려는 것을 보고 총격을 가한 것으로 미 외교 당국은 보았다.

주재국과는 무관한 제3국에서의 정치 혼란으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1973년 3월 수단 하르툼에서 일하던 클리오 노엘 대사는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열린 행사 도중 들이닥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조직인 ‘검은 9월단’ 조직원 8명에게 납치당했다. 전근을 앞둔 조지 무어 미국 공사의 환송회였던 이날 행사에 참석한 노엘 대사와 무어 공사, 기 에이드 벨기에 공사, 압둘라 알말루크 사우디 대사, 아들리 알나세르 요르단 공사 등 모두 10명이 인질이 됐다.

인질범들은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수감중인 팔레스타인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를 거절하자, 노엘 대사와 무어 공사, 에이드 공사 등 서방 출신 3명이 살해됐다. 탈출용 비행기를 내달라는 요구가 묵살되자, 인질범들은 사흘 뒤 나머지 인질을 풀어준 뒤 수단 당국에 투항했다.

1976년 6월 레바논에서는 프랜시스 멜로이 미국 대사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소속 무장대원들에게 붙잡혔다가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1969년 9월 브라질에서 벌어진 버크 엘브릭 대사 사건은 납치한 미국 대사를 대가로 요구한 정치범 석방이 받아들여진 ‘성공’ 사례였다.

당시 엘브릭 대사는 좌파 게릴라 무장세력인 10·8 혁명운동(MR8) 세력에게 붙잡혔다가 학생·노동 운동가 등 15명과의 맞교환으로 78시간 만에 풀려났다.

무장세력은 납치 배경에 대해 브라질 군사정부의 민간인 고문과 수감 등 억압적인 국내 현실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가 터키 대사를 골랐다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미국 대사의 몸값’을 시사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풀려난 엘브릭 대사는 당시 사건을 돌이켜, “대사가 된다는 게 항상 장밋빛 침대 같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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