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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판정 확산 : 더 이상 오심은 경기의 일부가 아니다

  • 허완
  • 입력 2015.03.16 13:24

스포츠의 성역이었던 심판 판정이 테크놀로지 발달로 변화를 맞고 있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전통적 관념은 급속한 비디오 기술 발달로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심판이 눈은 둘이지만, 각종 카메라 영상을 받아 보면서 경기를 보는 관중들의 눈은 두자릿수”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공정성” “땀의 대가” “페어플레이” 등 스포츠 가치를 위해서는 기술의 도움을 받는 게 맞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휘슬 하나로 그라운드를 지배했던 판정관들의 세계가 기술 진보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셈이다.

영향력이나 대중성이 큰 축구에서의 변화는 최근의 흐름을 대변한다.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2010년 이전까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며 판정에 대한 이의 제기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축구장에서는 여전히 주심의 휘슬 장면을 전광판에서 리플레이하지 않는다. 자칫 오심으로 스탠드의 관중이 동요하거나 소요를 일으키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일본 '도요타 스타디움'에 설치된 호크아이 카메라. 공이 골라인을 넘었는지 판독하는 역할을 한다. ⓒAP

블라터 회장의 고집도 꺾이고 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잉글랜드-독일 경기에서 잉글랜드팀 프랭크 램퍼드의 슈팅이 골라인을 넘어갔음에도 인정되지 않은 뒤 골라인 테크놀로지 도입 여론이 촉발됐다. 피파는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는 골라인 테크놀로지를 채택했다.

피파의 움직임은 페널티킥과 오프사이드에 대한 비디오 판정까지 나아가고 있다. 지난달 국제축구평의회(IFAB)는 네덜란드 축구협회가 실험해온 페널티킥과 오프사이드에 대한 비디오 리플레이에 대해 검토했다. 비디오 분석 요원이 페널티킥과 오프사이드에 대한 정보를 무선 헤드셋을 쓴 주심에게 보내 상황을 알리도록 하는 방식이다. 네덜란드협회 관계자는 “한 경기에서 두세 차례 판독하는 게 적합했고 결과는 5~20초 안에 나왔다”고 밝혔다. 감독이 판정에 대한 이의를 신청하면 심판이 비디오로 확인해 정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의 제기 횟수를 제한하고, 정확한 판정임이 드러나면 불이익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심으로 활약하고 있는 앤서니 테일러가 지난 2013년 영국 런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골 결정 시스템(GDS)' 미디어 설명회 당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Gettyimageskorea

국제축구평의회는 이 제안을 일단 기각했다. 세계 최초로 축구협회를 만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4곳의 대표와 피파 쪽에서 4명이 참석해 구성하는 평의회의 보수적 성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룰 개정은 8명 중 6명이 찬성해야 한다. 하지만 엄밀한 판정에 대한 팬들의 요구가 크기 때문에 내년 심사 때는 다른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레그 다이크 잉글랜드축구협회(FA) 회장은 “심판들도 스스로 실험해보려고 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경기를 완전히 망칠 수 있어 비디오 판독은 점진적으로라도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2013~2014 시즌부터 호크아이를 통해 골라인 안으로 공이 통과했는지를 판별하고 있고, 독일 분데스리가는 2015~2016 시즌에 골라인 테크놀로지를 도입할 예정이다. 카메라 설치 비용(50만유로, 약 6억원) 등이 워낙 커 반발에 부닥쳤지만, 신뢰성을 높이는 게 팬의 관심뿐 아니라 마케팅을 위해서도 좋다는 판단을 해 설치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도 2015~2016 시즌에 골라인 판독기를 도입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쪽은 “비용 문제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비신사적인 행위나 속임수 등에 대한 징계는 사후 비디오 판독을 통해 내리는 것이 일반화했다. 지난 5일 잉글랜드축구협회는 프리미어리그 경기 중 서로 침을 뱉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조니 에번스와 뉴캐슬의 파피스 시세에게 각각 6경기, 7경기 출전정지 제재를 내렸다. 심판이 놓친 장면은 텔레비전을 통해 자료가 남았고, 이는 징계 근거로 활용됐다. 주먹, 팔꿈치, 발로 상대를 구타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비디오로 잡히면 징계한다. 한국프로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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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축구의 금과옥조로 ‘오심도 경기의 하나’라는 게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과거엔 방법이 없으니까 그대로 넘어갔지만,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잘잘못이 드러난다. 기술의 발전을 공정성이라는 경기의 대원칙에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국내의 경우 1980년대는 경기 비디오를 확보할 수 없었고, 1990년대에도 지상파 중심이어서 경기 비디오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케이블텔레비전의 스포츠 중계가 많아졌고, 시청자를 위해 초고속 카메라나 야구의 스트라이크존까지 추적해내는 비디오 기술이 도입되면서 팬들의 흥미는 더 높아졌다. 신 교수는 “심판들은 비디오 판독으로 심판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반발하는데, 정작 경기에서 보호해야 할 가치는 권위가 아니라 정확한 판정”이라고 했다.

보수적인 종목의 하나였던 테니스는 비디오 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6년 유에스오픈은 테니스 메이저대회 최초로 호크아이를 도입해 판정에 반영했다. 관중석 상단에 설치한 여러 대의 고속카메라가 공을 추적해 입체영상을 만들어낸다. 물론 기술이 100% 완벽한 것은 아니다. 클레이코트에서 벌어지는 프랑스오픈에서는 공의 자국이 남아 판독이 쉽지 않아 채택하지 않았다. 하드코트라 하더라도 육안으로 선을 나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공이 유효타로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2008년 윔블던대회 결승전에서 라파엘 나달과 로저 페더러가 만났을 때, 호크아이는 1㎜ 정도 차이로 공이 선에 걸렸다며 나달의 유효타를 선언했지만 기계의 오차범위 3.6㎜ 이내의 것이어서 정확도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테니스 경기장에 설치된 호크아이 카메라의 모습. ⓒAP

테크놀로지의 진화는 올림픽 종목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럭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박태웅 대한럭비협회 사무국장은 “럭비에서는 심판 판정에 절대 복종하는 게 전통이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관념이 아직도 강력하다”고 했다. 하지만 럭비도 변화의 바람을 피할 수는 없다. 박태웅 국장은 “국제럭비연맹이 텔레비전경기분석관(TMO) 제도를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비디오 리플레이를 통해 득점 상황 확인 등 판정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이다. 럭비도 언젠가는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국내 스포츠에서도 비디오 판독이 판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프로야구에서는 홈런과 파울을 구분하는 것에 더해 지난해부터 아웃과 세이프 등 5개 항목으로 비디오 판정 범위를 넓혔다. 프로배구연맹은 2007년 말부터 비디오 판독을 도입해 터치아웃이나 네트터치 등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서 최종 판단자 구실을 하고 있다. 경기가 끊어지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신속하게 판정을 한다. 류대환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차장은 “비디오 판독의 효과가 크다.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걸리지 않는다. 선수나 감독이 항의하는 시간이 비디오 판독으로 오히려 단축됐고, 깔끔한 판정이어서 팬들의 신뢰도도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감독들은 판정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면 된다.

2013년부터 실관중 집계, 객단가와 연봉 공개 등 정보 공개를 통해 팬들의 신뢰를 높인 프로축구연맹은 올 시즌 판정의 신뢰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K리그 발전을 위해서는 팬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그 핵심에는 공평무사한 판정이 있다고 보고 있다. 프로축구는 지난해 성남 등 일부 구단이 판정 불복과 오심 논란으로 혼란을 겪었다. 올해부터 심판 컴퓨터 배정, 거점 숙소제, 전담제 운용 등으로 변화를 준다.

그렇다고 심판의 영역이 완전히 기계한테 점령당하는 것은 아니다. 비디오 판독 만능이라면 주심이나 선심 대신 로봇으로 경기해야 할 것이다. 신문선 교수는 “축구처럼 몸이 부닥치는 경기에서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판단한다면 재미도 없고 건조해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양이 아니라 질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심판이 경기를 끊지 않고 이어가는 경우 더 재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인간인 심판이 판정 영역에서는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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