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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혹은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 - 뛰어도, 돌아도, 더 큰 원을 그릴 뿐.

우리 모두는 어떤 원에 갇혀 산다. 그것을 습관이라 부르든, 관성이라 부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는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다. 결국 자신의 밑바닥까지 스스로 돌이켜보고, 그것을 깨드릴 무진장한 대담함만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버드맨>은 마이클 키튼이나 연출자의 자전적인 영화이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도 치환 가능한, 그렇게 보편적인 이야기다.

  • 허경
  • 입력 2015.03.17 10:13
  • 수정 2015.05.17 14:12
ⓒFox Searchlight

얼마 전 작고한 故 신해철의 그룹 넥스트의 2집 파트 1 첫 번째 곡 '껍질의 파괴'에는 이런 가사가 있었다.

뛰어도, 돌아도, 더 큰 원을 그릴 뿐.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문장이 떠올랐다. 내내 몸부림치던 리건의 애처로운 눈빛과 너무도 잘 매치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극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성공시키려 하지만 스스로도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단지 내가 나 스스로를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 아닌가? 많은 불안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 그리고 많은 잡음들 사이에서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그리고 그는 실패한다. 이 영화에는 단 한 번의 '성공'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 레슬리의 성공적인 브로드웨이 데뷔만 빼고. 이건 본인의 노력이라기보단 다분히 불가항력적인 성공이기에...) 모두가 불행하고 누구나 외롭다. 불안하고 슬프다. 그러나 영화는 회환과 좌절의 어두운 감흥보다는 안으로 침잠함으로써 오히려 '희망'의 카타르시스를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늘 흥미로운 작가였다. 장편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부터 전작 <비우티풀>까지, 언제나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모레스 페로스>의 충격 이후, 서사 강박증에 걸려 헤메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기대는 현재의 만족을 전제로 하지 않은 것이었다. 기대에 대한 기대. 메타 기대라고 부르면 역시 말장난이겠지만. 하여간 그런 수준의, 거대하고 화려한 어둠 속에서 감독도 헤매고 나도 헤매는 그런 그림.

그러나 이윽고 도착한 <버드맨>은 감독 스스로 '뛰어도, 돌아도, 더 큰 원을 그리는' 상황을 반추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거슬러 다시 스타트라인에 선 작품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형식면에서 조금 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그럼에도 의도가 분명하니 딱히 흠잡을 것은 아닌 것 같다.) 단순하고도 풍부한, 누구에게나 위안이 될만한 '인간'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원에 갇혀 산다. 그것을 습관이라 부르든, 관성이라 부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는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다. 결국 자신의 밑바닥까지 스스로 돌이켜보고, 그것을 깨드릴 무진장한 대담함만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버드맨>은 마이클 키튼이나 연출자의 자전적인 영화이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도 치환 가능한, 그렇게 보편적인 이야기다. 뭐. 그렇다고 누구나 변화를 위해 머리에 총을 겨눠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정도 수준의 용기가 필요할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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