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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성'까지 강요받는 제복 속의 눈물

여성의 인권을 최전선에서 감시해야 할 이들이 경찰이지만, 정작 경찰 조직 내의 여성경찰은 성적 불평등으로 고통을 겪는다. 타이에서는 동료 남성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경찰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2010년 2월 타이 방콕의 대법원에서 질서 유지에 나서고 있는 여경들
여성의 인권을 최전선에서 감시해야 할 이들이 경찰이지만, 정작 경찰 조직 내의 여성경찰은 성적 불평등으로 고통을 겪는다. 타이에서는 동료 남성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경찰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2010년 2월 타이 방콕의 대법원에서 질서 유지에 나서고 있는 여경들 ⓒ연합뉴스

지난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세상 곳곳에서 여성들이 노동 해방과 평등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여성이 노동권 보장을 외친 지 100년이 넘었지만 현실은 아직 남자의 반이다. 인류 역사에서 한 주제를 놓고 이처럼 오랫동안 싸운 적도 없고 이처럼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없다.

어쨌든 그 여성 노동권을 최전선에서 보살펴야 하는 법 집행자들이 있다. 경찰이다. 그 조직 속의 여자들을 사람들은 여경이라 불러왔다. 제복사회의 두 상징 가운데 다른 하나가 군대고 그쪽 여자들을 여군이라 불러온 것처럼. 남자는 경찰이고 군인인데 여자는 꼭 여경이고 여군이어야 하는 게 옳든 그르든 바로 불평등한 성 현실을 나타내는 좋은 본보기다. 그 제복 조직 둘을 견줘보면 그동안 성차별과 성폭행 같은 범죄를 놓고 군대 쪽을 다룬 조사나 연구들은 적잖았고 또 말썽이 터질 때만큼은 사회적 눈길이 쏠렸던 것도 사실이다.

근데 경찰 쪽은 그런 내부 성범죄 연구나 보고서마저 흔치 않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들도 주로 직무나 보직 관련 성차별 정도를 다룬 게 다다. 두 제복은 명령관계와 계급관계를 줏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조직이다. 오직 군대에서만 그 많은 성범죄가 일어난다고 볼 수 없는 까닭이다.

“현장에선 남자처럼, 사무실에선 얌전하게”

“현장에 나가면 남자처럼 좀 건들거리고 적당히 욕도 하고 술도 마시고…, 사무실에선 여자처럼 얌전하고 예쁘게 굴고 대들지 말고….”

2010년 타이 경찰을 취재할 때 만났던 방콕 경찰청 니티아(가명·이름 밝혀지면 끝장이라고!)가 털어놓았던 말이다. 여자이면서 남자고 여자여야 한다는 이 불편한 전통 탓에 어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정체성마저 헷갈린다는 니티아 말은 여자가 경찰 노릇 하기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니티아는 경찰 안에도 널리 퍼져 있는 성적 불평등을 “제복 속에 감춰진 눈물”이라 불렀다.

그 무렵 타이 경찰 안에서는 부하나 동료를 성폭행한 사건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9월에는 딱이라는 한 주를 책임진 치안감이 부하 여자들을 여럿 성폭행한 사건이 불거졌고 11월에는 얄라주에서 남자 경찰이 동료 여자 둘의 도움을 받아 민간인 친구들과 함께 또 다른 동료 여자를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튀어나왔다.

그해 타이에서는 경찰에 보고된 성폭행 사건이 4600건을 웃돌았다. 마히돈대학 인구사회조사연구소 교수 끄리따야 아차와닛꾼은 “침묵을 강요해온 타이 문화 탓에 성폭행 사건은 5%쯤만 보고된다”고 밝혔다. 니티아는 “명령관계에다 진급과 보직이 걸린 탓에 경찰 안에서는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이 터져도 모두들 쉬쉬하다 보니 그 보고율은 바깥세상보다 오히려 훨씬 낮을 것”이라고 했다.

인도네시아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여기서는 예부터 전통적으로 여자가 경찰이 되려면 처녀성을 담보로 잡혀야 했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경찰은 경찰청장 조례 제5/2009 ‘경찰후보자 신체검사 지침’에 따라 경찰이 운영하는 병원의 여의사가 손가락 두 개를 후보자 성기에 집어넣어 처녀성 유무를 검사해 왔다. 수십년 전부터 모두가 다 알고 있던 이 이야기가 지난해 11월 다시 불거졌던 건 경찰 법무감찰국장쯤 되는 묵기야르토가 “경찰 지원자들에 대한 처녀성 검사는 신체적 건강과 도덕성을 점검하는 절차였다.

인권유린이나 성차별이 아니다”고 기자들한테 말하면서부터다. 언론과 인권단체들이 들고일어나자 경찰 대변인 아구스 리얀토는 “처녀성이 있는 후보자는 80점, 아닌 자는 60점을 준다”고 밝혔고, 대인관계국장 로니 솜피는 “처녀성 검사가 주로 생식기 결함, 종양, 성병을 확인하는 절차이며 후보자 결격 사유는 아니다. 처녀성이 없는 후보자 가운데 경찰이 된 이들도 많다”고 발뺌하면서 오히려 불길을 더 키워 놓았다. 인도네시아 경찰이 오직 여성 후보자한테만 저질러온 이 희한한 성차별은 나라 안팎에서 융단폭격을 맞았지만 아직 이 법을 없애겠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는 혼전 순결을 미덕이라 강조해왔고 처녀성을 종교적 가치로 여겨온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 처녀성 문제는 인도네시아나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을 통틀어 종교보다는 오히려 식민지 현대화에 따른 결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예컨대 성직자들의 성문란, 매춘(성매매) 같은 사회문제로 타락국가 낙인이 찍혔던 빅토리아 왕조가 식민 지배자로 아시아에 나타나 역설적이게도 금욕주의를 퍼뜨린 결과 처녀성을 강조하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실제로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사회는 자유로운 성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고 처녀성 따위에 목을 매는 일도 없었다.

더구나 인도네시아 현실은 처녀성 검사같이 야만적인 법을 받쳐줄 만한 상태도 아니다. 2010년 인도네시아 가족계획국(BKKBN)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성 경험 비율이 자카르타 51%, 수라바야 54%, 메단 52%로 전국적인 현상으로 드러났다. <성과 학생운동>이란 책을 쓰기도 했던 언론인 아맛 타우픽은 “반둥의 대학생 68%, 고등학생 40%, 중학생 20% 웃도는 이들이 성 경험을 했다”고 밝혀 정부나 민간 조사가 거의 비슷한 수치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타우픽은 “인도네시아 젊은이들한테 성은 개인적 선택의 문제일 뿐 종교나 관습으로 옭아맬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게다가 연간 240만건 낙태 가운데 청소년이 80만건에 이르는 현실은 제쳐놓고 “정부가 처녀성 따위를 공무원 선발 기준으로 삼는다는 건 아주 비열한 고집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자카르타 남부 칼리바타 같은 곳에 널린 병원들이 500만루피아(한국돈 약 45만원)를 내면 해주는 처녀막 재생수술이 왜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는지 따져볼 만한 대목이다.

8.1% 대한민국 여경, 대부분 하위직

경찰 내부 성폭행이나 성차별 범죄는 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 쪽에서만 벌어지는 별난 일이 아니다. 2014년 세계경제포럼이 밝힌 성평등 지수가 아시아 사회보다 훨씬 높은 오스트레일리아(24위)에서도 지난해 말 “성차별과 성학대는 여경으로서 한 부분이었다”는 전직 여성 경찰의 폭로로 온 사회가 들끓었고, 또 올해 3월 초 캐나다(19위)에서는 토론토 경찰 셋이 여성 동료를 성폭행한 사건으로 난리가 났다. 민주주의 챔피언이라 떠들어온 미국(20위)에서도 올 3월 미주리주 퍼거슨 경찰 내부의 성학대 사건으로 큰 말썽이 일고 있다.

지난해 8월 흑인 청년을 무차별 총격으로 살해하면서 악명을 떨쳤던 바로 그 동네 경찰이다. 중동 쪽 이스라엘(65위)에서는 지난 2년 동안 경찰 부총장급 최고위직 16명 가운데 7명이 성학대 사건으로 옷을 벗은 데 이어 올 2월 들어 또 다른 부총장급이 같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경찰 내부 성학대나 성폭행 범죄는 지역, 문화, 종교, 경제와 상관없이 온 세상에서 벌어져왔다는 뜻이다.

‘성희롱에 대한 여경들의 고집스러운 수동적 반응의 이유’라는 미시간주립대학 연구 논문(2008년)엔 미국 중동부 주 조사 대상 여자 경찰 117명 가운데 106명이 최근 2년 사이에 성학대를 경험한 사실이 담겨 있다. 이 조사는 인종, 나이, 직급, 직종, 경력, 결혼과 무관하게 경찰 내 모든 여자들이 당해온 성학대를 폭로했다.

그렇다면 같은 성평등 조사 대상 142개국 가운데 119위를 차지한 대한민국의 여자 경찰은 안녕하실까? 1946년 80명으로 출발한 여자 경찰은 68년이 지난 2014년 7월 현재 8330명으로 경찰 인력 10만2669명 가운데 8.1%쯤에 이르렀다. 이건 성평등 지수 상위권 나라들인 독일(12위) 30%, 영국(26위) 27%, 오스트레일리아 25%, 뉴질랜드(13위) 23% 그리고 유럽연합 평균 20%에다 미국 15%와도 큰 차이가 난다. 여자 경찰의 비율만 따져 봐도 그 성평등 지수란 게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한국 경찰의 계급 현황을 보면 성차별은 더욱 또렷해진다. 흔히들 군대의 대령급으로 치는 총경 이상 고위 경찰직 가운데 여자는 오직 1.7%에 지나지 않는다. 총경 502명 가운데 여자 8명(1.6%), 경무관 45명 가운데 여자 1명, 치안감 26명 가운데 여자는 아예 없고 그나마 치안정감 5명 가운데 여자가 1명 있을 뿐이다. 나머지 81%에 이르는 거의 모든 여자들이 순경(1466명), 경장(2643명), 경사(2709명) 같은 하위직에서 일하고 있다.

이건 2005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가 성차별을 들어 줄기차게 권고해온 경찰 간부후보생 10% 제한 철폐와 경찰대학 여학생 입학 비율 철폐가 아직도 통하지 않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올해 경찰대학은 신입생 100명 가운데 여학생 12명을 뽑아 경찰이 예고했던 대로 딱 12%를 채웠다. 그동안 여자 경찰은 인원수나 계급에서뿐 아니라 보직에서도 큰 차별을 받아왔다. ‘부드러운 손길’이니 ‘섬세한 정서’ 따위를 내세운 희한한 성차별적 표어 아래 80%에 이르는 여자 경찰들이 오직 생활안전(3350명), 수사(1624명), 경무(1503명) 같은 특정 업무에 몰려 있다.

여경을 보호할 제도와 문화를 다듬자

여자 경찰이 당해왔을 성학대와 성폭행 같은 성범죄 관련 통계나 자료는 대한민국에 아예 없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지 어떨지 참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성비, 계급, 보직을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성차별이 아주 심각한 대한민국 경찰을 놓고 오직 성학대와 성폭행만은 일어나지 않는 안전지대라고 부를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성평등 지수가 아주 높은 나라들의 경찰 안에서도 심심찮게 벌어져온 그런 일들이고 보면 대한민국 남자 경찰들만 별나게 도덕적이라고 볼 만한 근거도 없다.

경찰과 함께 제복을 상징해온 여군을 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2012년 여군 인권상황 실태보고조사서를 통해 여군 43%가 성차별을 경험했고 11.9%는 최근 1년 동안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혔다. 2014년 10월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9~2013년 사이 여군 성범죄 피해자가 61건이었다고 한다.

한국군이 교범으로 여겨온 미군을 보자. ‘여군 79%, 성학대 경험’ ‘퇴역 여군 37%, 두 차례 이상 성폭행 경험’ ‘퇴역 여군, 14% 집단 성폭행 경험’…, 미국 국방부는 2014년 군내 성범죄 5061건을 밝히면서 그마저도 성폭행이나 성추행 보고율이 15%에 채 못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록 군대와 경찰이라는 제복조직을 단순 비교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더 늦기 전에 여자 경찰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다듬어야 하는 까닭이다. 범죄 예방은 경찰의 생명이다. 성차별,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따위를 막는 건 경찰 몫이다. 그 경찰들부터 안전해야 사회가 안전할 수 있다. 시민이 나서서 여자 경찰을 보호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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