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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읽은 세계문학전집

나는 어린 시절에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다. 왜냐고? 심심해서. 부모님이 출근하신 후, 집에 혼자 있는데 TV도 없었다. 어머니 학교 따라 이사 다니다 보니 친구도 별로 없었다. 심심했다. 그때 내 눈에 책장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애들 책 안 읽는다고 뭐라 하는데, 애들이 심심할 여유가 없는 탓이다. 책 속의 이야기에 빠지려면 기본 10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스마트폰 게임은 3분도 좋고, 5분도 좋다. 짧은 시간 짬이 나면 책보다 즐길 게 너무 많다. 아이에게 독서하는 습관을 길들이려면 먼저 삶의 여유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 김민식
  • 입력 2015.03.09 13:25
  • 수정 2015.05.09 14:12
ⓒhuffpost library

어렸을 때, 학교 교사이던 어머니가 일직을 하러 일요일에 학교에 가면 나는 따라 가서 교무실이나 빈 학교 교실을 누비며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로 손님이 왔다. 문학 전집을 팔러다니는 방문 판매원이었다. 국문과를 나온 국어 교사인 어머니는 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외판원을 붙잡고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어머니는 충동 구매에 약한 편이라 세일즈에 주로 넘어가는 편이었고, 결국 며칠 뒤 우리 집에 세계 문학 전집이 배달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책장 빼곡히 꽂힌 한국문학선집과 세계문학전집을 보면서 '저 돈이면 내가 라면땅을 몇 개나 사 먹을 수 있을까?' 하면서 아까워했다.

독서광인지라 다른 집에 놀러가면 서재 구경을 좋아한다. 그런데 왠지 전질로 책을 꽂아둔 사람은 책을 읽기보다 장식용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진짜 독서광은 전질보다는 낱권으로 서가를 채우는 법인데. 세계문학전집의 경우, 구성은 참으로 훌륭하나, 실제로 책을 읽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나는 어린 시절에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다. 왜냐고? 심심해서. 부모님이 출근하신 후, 집에 혼자 있는데 TV도 없었다. 어머니 학교 따라 이사 다니다 보니 친구도 별로 없었다. 심심했다. 그때 내 눈에 책장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글자도 작고 판형도 세로읽기라 초등학생이 보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뭐 그런 책이었는데 어렵기만 하고 잘 안 읽혔다. 그래서 한국단편선집을 꺼내봤다. '운수 좋은 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재밌었다.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고학년이 되면서는 '감자'나 '모밀꽃 필 무렵'처럼 살짝 살짝 야한 장면이 나오는 소설에 급 빠져들기 시작했다. 결국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난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다.

요즘 애들 책 안 읽는다고 뭐라 하는데, 애들이 심심할 여유가 없는 탓이다. 책 속의 이야기에 빠지려면 기본 10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스마트폰 게임은 3분도 좋고, 5분도 좋다. 짧은 시간 짬이 나면 책보다 즐길 게 너무 많다. 아이에게 독서하는 습관을 길들이려면 먼저 삶의 여유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어려서 나는 공부하기 싫을 때는 책을 꺼내 읽었다. 적어도 책을 보고 있을 때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듣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소설에서 야한 대목을 찾아 읽느라 저절로 속독을 익히기도 했다. 후루룩 책장을 넘기다 남녀 주인공이 방에만 들어가면 책 읽는 속도를 늦춰 남녀상열지사를 훔쳐보듯 느릿느릿 스릴을 즐기기도 했다. 한창 사춘기 때는 그런 대목만 하도 여러번 읽어서 나중에 책이 길이 들어, 펼치면 그런 페이지만 나오기도 해서 화들짝 민망했던 때도 있다.

어쨌거나 내게 책 읽는 즐거움을 깨우치고, 독서하는 습관을 길들인 건 그 시절의 세계 문학 전집이었다. 어머니께 책을 권하러 와준 세트 외판원 아저씨에게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그 시절에는 책 권하는 이의 고마움을 몰라, 교무실 한 켠에서 슬쩍슬쩍 노려보았었으니 말이다.

얼마전 전자책을 샀다. 나는 대만족이다. 딸에게 선물했더니 아주 좋아한다. 동생도 하나 선물로 사서 보냈는데 무척 좋아하더라. 나는 리더기도 리더기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100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이 더 반갑고 고맙다. (그것도 단돈 만원에 장만하는!)

요즘 그 안에 있는 다섯권짜리 '레미제라블' 완역본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축약본 '장발장'으로, 뮤지컬로, 영화로 몇 번씩 본 작품이지만, 그 동안 내가 안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구나 싶다. 특히 '레미제라블' 1권에 나오는 뮈리엘 주교의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다. 세트에 함께 구성된 단편선도 구성이 참 좋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몇 번을 읽어도 또 좋다. '마지막 잎새' 역시 단편 문학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역시 100년 가까이 살아남은 책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외투 포켓 안에 세계문학전집 100권을 지니고 다니는 보람이 있다. 언제든 버스 정류장이든 지하철이든 극장 매표소 앞이든 짬만 나면 꺼내서 읽는다. 샘 덕분에 책 읽는 시간이 더 늘었다.

어린 시절 내게 큰 즐거움을 준 세계문학전집, 중년의 나이에 다시 읽기 시작한다. 책을 읽어 인생을 바꾸거나 세상을 바꾸는, 뭐 그런 거창한 소망은 이제 없다. 책을 읽는 여유로움, 그 한가한 순간 순간을 즐길 뿐이다.

사랑하는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최고의 유산은, 역시 책 읽는 습관이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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