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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과거사 갈등과 미국의 책임

전후 70년이 되도록 동북아에서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패전 처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은데 있다.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영토를 상실하거나 막대한 배상금을 짊어지지 않았다. 최고지도자였던 천황의 책임도 불문에 부쳤다. 매우 관대한 패전 처리였다. 패전국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하는데 두 가지 전제가 있었다. 도쿄재판과 평화헌법이다. 도쿄재판으로 상징되는 불철저한 패전처리에 대해 관계국들은 불만을 가졌지만, 군사력의 보유를 포기하는 평화헌법이 있어 균형을 잡아 주었기에 납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며 평화헌법을 사실상 형해화하고 있다.

  • 조세영
  • 입력 2015.03.09 10:09
  • 수정 2015.05.09 14:12
ⓒASSOCIATED PRESS

미국이 동북아 3국의 과거사 화해를 촉구한 것이 오히려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2월 27일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에서 한.중.일 3국이 영토, 위안부, 교과서와 같은 과거사 문제를 놓고 불화를 빚고 있다고 하면서, '이해는 되지만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이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과거의 적국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도발을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듯이 덧붙였다.

이것은 잘못된 어법이다. 역사인식 문제에 관해 주체적인 입장이 아니라, 더 이상 다투지 말고 서로 협력하라고 마치 제3자로서 남의 말을 하듯 했기 때문이다. 아니, 문제는 단순히 말하는 방식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고방식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과 러시아는 남쿠릴 열도의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을 두고 지금도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지만, 사실은 60년 전에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이 소련과 국교정상화를 위해 막바지 교섭을 벌이던 1956년 8월, 4개의 섬 가운데 2개만 돌려받는 것으로 양국의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일본이 2도 반환으로 소련과 영토문제를 해결한다면 미국은 점령중인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이 일.소 간의 화해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일.소 국교정상화가 되더라도 양국 간에 영토분쟁이 남아있으면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소련에 대한 견제에 계속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외교 전략을 위해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들의 화해를 방해하기까지 했던 미국이 갑자기 과거사로 인한 마찰을 서로 자제하고 화해하라고 하니 공감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미국은 한.중.일 3국을 도매금으로 비난하듯 말해서는 안 된다. 동북아에서 과거사로 인한 반목의 원인을 누가 먼저 제공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일본, 특히 아베 정권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아베 담화'를 통해 과거 침략전쟁의 책임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한국이나 중국과의 문제이기 이전에 미국과의 문제라고 인식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전후질서'를 일본이 부정하려 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묵과할 수 없다고, 제3자가 아닌 당사자로서의 어법으로 명확하게 대응해야 한다.

전후 70년이 되도록 동북아에서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패전 처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은데 있다.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영토를 상실하거나 막대한 배상금을 짊어지지 않았다. 최고지도자였던 천황의 책임도 불문에 부쳤다. 매우 관대한 패전 처리였다. 그나마 도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7명이 처형된 것이 최소한의 전쟁책임의 상징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에서는 A급 전범들이 국가를 위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든지, 도쿄재판은 공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횡행한다. 도쿄재판을 국제법적, 역사적으로 분석, 평가하는 것은 학자들이 할 일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패전 처리라는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도쿄재판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도쿄재판은 전승국이 패전국을 단죄한 것이기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고, A급 전범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쟁에서 졌다는 냉엄한 현실이 의미하는 것임을 일본은 깨달아야 한다.

패전국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하는데 두 가지 전제가 있었다. 도쿄재판과 평화헌법이다. 도쿄재판으로 상징되는 불철저한 패전처리에 대해 관계국들은 불만을 가졌지만, 군사력의 보유를 포기하는 평화헌법이 있어 균형을 잡아 주었기에 납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며 평화헌법을 사실상 형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역사인식을 더욱 분명히 해야 균형이 유지될 텐데, 아베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일본의 패전 처리와 전후질서의 설계자였던 미국이 제3자적인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 이 글은 내일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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