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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 앞에서 멈춘다

  • 허완
  • 입력 2015.03.07 06:23
  • 수정 2015.03.07 06:24
ⓒShutterstock / Rafal Olkis

[토요판] 커버스토리

국내 병역거부 논쟁

“일선 법원 법관들이 겪고 있는 고뇌와 고통의 무게를 덜어줘야 합니다.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법원의 위헌법률심판 제청 의미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위헌법률심판 제청 한건 한건에 담긴 법관의 양심의 무게는, 낡은 눈금으로 저울질할 수 없는 천금 같은 것입니다.”

지난해 12월20일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와 법원 국제인권법연구회의 공동학술대회에 기조발제로 나온 전수안 전 대법관은 눈물을 비치며 기조발제를 마쳤다. 병역법 제88조 1항은 대한민국 남성에게 두가지 선택지만을 부여한다. 군대에 가거나 감옥에 가거나.

2011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합헌 7, 위헌 2) 이후, 2012년 창원지법을 시작으로 지난 1월 전주지법 정읍지원(형사1단독 강동극 판사)까지 7번의 위헌 제청이 이뤄졌다. 한 사안에 대해 이렇게 연속적인 위헌 제청은 매우 이례적이다. 본인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대법원 판결을 앞둔 백종건 변호사는 5일 “국회, 정부의 입법적 해결이 어려운 분위기이다 보니 법관들도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경묵 감독도 이날 평화운동단체 ‘전쟁 없는 세상’의 여옥 활동가와 함께 행사를 지켜봤다. 여옥씨는 “학술대회에 임한 법관들의 분위기가 매우 심각했고 해결해야겠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행사장을 나오면서 ‘김경묵 무죄 받는 거 아니냐’고 농담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논쟁은 2001년 주간지 <한겨레21>이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처음 거론하면서 촉발됐다. 여호와의 증인은 한해 수백명씩 교도소로 향하고 있었지만, 정치와 거리를 두는 교리상 직접 발언은 삼갔다. 호명의 효과는 강력했다. 다수의 소리 없는 몸짓은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불림으로써 대번에 사회적 의제로 부상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내면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다. ‘그럼, 군대 가는 것은 비양심적이냐’라는 이분법적 질문을 부를 수 있어서, 김두식 경북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같은 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 대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부르자고 주장한다. 도덕적 가치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집총과 입영은 전쟁을 반대하는 이에게는 자기 양심에 맞서는 문제일 수 있고, 전쟁을 불가피하게 보는 이에게는 양심과 무관한 문제일 수도 있다.

<한겨레21> 보도 직후인 2001년 12월 평화주의자 오태양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부터는 비종교적인 이유의 양심적 병역거부가 줄을 이었다. 김경묵 감독은 오태양씨 이후 예순다섯번째로 총 대신 감옥을 택했다. 여호와의 증인, 한때 집총거부를 했다 돌아선 안식교 신자 그리고 비종교적 이유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까지 포함하면 현재까지 2만명 가까운 이들이 수형생활을 한 것으로 추산된다.

애초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빨리 풀릴 수도 있었다. 최초의 문제 제기 이듬해 위헌심판 제청이 나왔고, 3년 뒤인 2004년에는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각각 유죄 판결, 합헌 결정이 났지만, 동시에 헌재는 “양심의 자유와 국가안보라는 법익의 갈등관계를 해소하고 양 법익을 공존시킬 수 있는 방안 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라며 국회에 법 제정을 요청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5년 국회와 국방부에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다. 대선을 석달 앞둔 2007년 9월 비로소 국방부는 대체복무 허용 방안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병무청은 진석용정책연구소에 ‘종교적 사유 등에 의한 입영거부자 사회복무체계 편입방안 연구’라는 이름의 대체복무 방안을 의뢰하는 등 실무절차에 들어갔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2008년 보고서가 완성됐다. 보고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현역복무자보다 12개월 더 사회복지시설이나 소방서 등에서 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체복무가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을 때 복무기간을 줄이도록 했다. 다만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여론조사도 병행했는데, 대체복무 도입에 대해 반대(68.2%)가 찬성(29%)을 앞질렀다. 국방부는 2008년 12월 이 여론조사를 근거로 국민적 합의가 되지 않았다며 대체복무제 도입을 백지화했다.

그 뒤 대체복무제 도입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국방부는 사회통합과 국민정서 때문에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고수했고, 몇 차례 발의된 대체복무법안도 국회에서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이예다씨, 김경환씨 등 외국에 가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이들도 생겼다. 지난해 12월 학술대회에서 국방부는 11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얻은 여론조사 결과를 들며 다시 ‘대체복무제 도입 불가’를 주장했다. 대체복무 허용 38.7%, 반대 58.3%가 나왔다.

보편적 인권의 문제를 다수결로 정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국민정서로 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불과 1년 전인 2013년 11월 한국갤럽의 자체 조사 결과는 국방부 조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때에는 오히려 대체복무 허용이 68%로 반대 25%를 훨씬 앞질렀다. 왜 결과가 엇갈렸을까? 설문지에서 추측할 수 있다. 국방부가 의뢰한 리서치앤리서치 설문지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시종 ‘입영 및 집총거부자’라고 불렀다. 병역거부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호칭이다. 반면 한국갤럽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기존 호칭을 따랐다. 이런 식으로 2000년대 이후 대체복무 여론조사는 의뢰기관의 성향이나 질문지 구성 등에 따라 찬반 비율이 널뛰었다.

병무청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거나(이후 징병제 폐지), 현재 인정하는 나라는 55개국이다. 경제수준이 높거나 민주주의가 안착한 나라는 대부분 병역거부를 인정한다. 이를테면 군사적 긴장이 상존하는 대만, 이스라엘은 물론 그리스,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이다. 반면 경제수준이 높은 나라 중에서는 한국, 싱가포르, 멕시코, 칠레 정도가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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