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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트 대사 피습 : 흥분하는 한국, 차분해진 미국

  • 허완
  • 입력 2015.03.07 05:23
  • 수정 2015.03.07 05:25

[한국]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이 ‘종북세력’ ‘배후 엄단’을 언급하며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증폭시키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동 4개국을 순방 중인 박 대통령은 지난 5일 피습 사실을 보고받은 직후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한 데 이어, 6일엔 “백주 대낮에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했다는 것은 우리 정부와 국민에 충격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도를 높였다. 또 박 대통령은 “이 사람(피의자 김기종씨)이 과연 어떤 목적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단독으로 했는지 배후가 있는지 모든 일을 철저히 밝혀야 할 것”이라며 철저한 ‘배후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에 사실상 수사 지침을 내린 셈이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선 미국이 한국의 가장 중요한 안보 파트너라는 현실 인식과 ‘불순한 외부세력 존재’에 관한 의심이 중첩된 결과로 여겨진다. 부모가 모두 피살당하고, 자신도 2006년 커터칼로 피습을 당한 트라우마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안에선 “박근혜 정부의 외교가 중국에 경도돼 있다는 미국 쪽 불만을 의식해 (더) 강경하게 나가는 것 아니겠느냐”는 풀이도 나왔다.

이런 박 대통령의 지침에 맞춰 당·정·청은 6일 회의에서 이번 사건을 “종북세력 사건으로 규정하고 배후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에 공감했다”고 회의 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밝혔다. 김무성 대표는 “한미동맹의 심장을 겨눈 끔찍한 사건”이라고 규탄했다.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김씨를 ‘막가파 종북주의자’라고 규정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반미·종북세력”(장윤석 의원), “종북세력의 집단적 단말마”(하태경 의원) 등의 표현을 쓰고 “평양과 맥을 같이하는 특정 세력 소행이 거의 100%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다 밝혀졌다”(이인제 최고위원), “범인은 종북단체 소속이고, 방북도 수차례 했다 한다. 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고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김진태 의원) 등 김씨의 행동과 북한을 연관짓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 안에서도 “극단주의자의 개인적 일탈인데, 여기서 종북몰이를 하면 역풍이 분다”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류도 있다. 한 초선 의원은 “새누리당이 보수 정당이라, 북한을 왕래했다는 이력이 나온 마당에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지만 이데올로기 문제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박민식 의원도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마녀사냥이나 종북몰이로 활용하는 시도가 있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이것은 개인의 극단적인 일탈행위”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이번 사건이 자칫 종북몰이나 공안정국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김성곤 의원은 <와이티엔>(YTN) 라디오에서 “사건을 지나치게 정치이념적으로 보는 건 너무 나간 것”이라며 “이 사건이 한미관계를 흔들 사건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해석하는 게 한미관계에 더 부담을 줄 수 있다”고 경계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관련 주요 발언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미국]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 첫날 충격에 빠졌던 미국 정부와 여론이 이틀째 들어서는 비교적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은 5일(현지시각) <엠에스엔비시>(MSNBC) 방송에 출연해 “이라크전에 정보 장교로 참전한 리퍼트 대사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라며 “그가 가능한 한 빨리 쾌유해 업무에 복귀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무부도 언론성명을 내어 “한-미 동맹은 강하다. 우리는 분별없는 폭력행위에 위축되지 않을 것”이라며 “리퍼트 대사가 업무에 복귀해 한국 정부와 함께 양국 관계 강화는 물론 지역 및 글로벌 도전과제 해결을 위해 논의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퍼트 대사의 건강 상태에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오바마 행정부는 그의 조속한 업무 복귀를 통해 이번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로즈 부보좌관은 경호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점은 경호요원이 달려가기 직전에 용의자가 흉기로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라며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현지 당국 등과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리퍼트 대사 등에 대한 신변 보호 강화 조처를 한국 정부와 논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미국 언론 보도는 사건 첫날에 견줘 비중이 많이 줄어드는 분위기다. <시엔엔> 등 주요 방송들은 주로 폭설 피해를 보도하는데 중점을 뒀고 이 사건은 간헐적으로 보도하는데 그쳤다. 보수파들에 영향력이 큰 <폭스뉴스>는 전 백악관 비밀경호국 출신의 경호 전문가를 등장시켜 경호 소홀 문제를 주로 짚었다. <뉴욕 타임스>는 6일치에서 국제면인 6면 맨 하단에 사건 개요 중심으로 보도한 데 이어, 7일치엔 6면에 ‘한국, 단독 범행이라고 말하다’는 제목으로 경찰의 수사 속보 중심으로 보도했다. 신문은 김기종씨를 과거 주한 일본대사를 공격하기도 한 비주류 활동가라고 소개하면서, 김씨를 아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 그가 주로 단독으로 활동해왔다고 전했다.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한 극단주의자의 돌출적 행동으로 보면서 한-미관계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은 <한겨레>에 “이것은 단발적 사건으로 미국 내에서 후폭풍이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오히려 이번 공격이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브루킹스연구소 조너선 폴락 선임연구원도 “자칫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는 섬뜩한 사건이었지만 리퍼트 대사가 생명에 지장이 없어 다행”이라며 “이번 사건으로 미국 내에서 반한 감정이 생길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리퍼트 대사와 가까운 사이인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이번 사건은 한국인들의 진정한 친구에 대한 분별없는 폭력 행위다. 이것은 정치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며 “리퍼트 대사가 이번 일로 위축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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