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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테러'에 온정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지젝의 답변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은 말한다.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형제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한 것이 너무 끔찍해서 놀랐다고 한다.(맞다. 하지만 그 형제들은 프랑스 풍자 잡지 대신 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슬람인은 사실상 서구에서 가장 착취당하고 대접받지 못한 소수라고 한다.(맞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흑인은 훨씬 더 심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하거나 폭탄을 던지지 않는다.)" 방금 본 것처럼 지제크는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 곧 쿠아시 형제에게 온정적인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공박을 모두 괄호 처리했다. 괄호는 종종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해?'라는 가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형식이기도 하다.

  • 장정일
  • 입력 2015.03.06 08:44
  • 수정 2015.05.06 14:12
ⓒ한겨레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일으킨 쿠아시 형제와 그들의 순교를 지지하는 무슬림은 풍자 화가들의 예의 없고 저속하며 지나친 조롱이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저런 주장은 이슬람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기각해야만 옳다. 이를테면 우리는 누군가와 논전을 벌일 때 '인신공격은 삼가해 줘, 대신 진정한 비판이라면 받아들이겠어'라고 당부하고는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다. 인신공격이나 퍼부어 대는 작자는 마음속으로 경멸할 수 있으나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견디기 힘들다.

무슬림은 이슬람에 대한 조롱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조롱이 아니라 예의와 진지함을 갖춘 학구적인 비판이었다고 해보자. 그런 글이 이슬람에 수용될 수 있었겠으며, 그 글을 쓴 학자는 과연 테러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학자의 명망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는 더더욱 테러를 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진지한 비판은 오히려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조롱과 달리 이슬람에 그를 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당성과 필연성마저 부여해 준다. 쿠아시 형제에게 살해당한 <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향해 '인과응보'라는 막말을 쏟아내는 좌파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마도 그 학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슬람과 같은 입장이거나 더 가혹하게 학자를 비난하고 나설 것이다.

슬라보이 지제크의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지제크의 긴급 발언이다. 이 책에서 지제크는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하게 정죄해야 한다. 은밀하게 경고하듯이 정죄해서도 안 된다"라며, 이번 사건에 대해 도착적인 논변을 편 좌파 지식인들과 본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좌파 지식인들의 '판에 박은 레퍼토리'를 하나씩 공박한다.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은 말한다.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형제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한 것이 너무 끔찍해서 놀랐다고 한다.(맞다. 하지만 그 형제들은 프랑스 풍자 잡지 대신 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슬람인은 사실상 서구에서 가장 착취당하고 대접받지 못한 소수라고 한다.(맞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흑인은 훨씬 더 심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하거나 폭탄을 던지지 않는다.)"

방금 본 것처럼 지제크는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 곧 쿠아시 형제에게 온정적인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공박을 모두 괄호 처리했다. 괄호는 종종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해?'라는 가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형식이기도 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맥락 좋아하시는 독자가 계시다면, 괄호를 하나 더 보내 드린다. "(주문을 외우듯이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 서구인은 제3세계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살인자인데, 어떻게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정죄할 수 있는가?)"

지제크는 긴급 발언을 통해 자유주의 좌파는 이번 테러 사건을 바로 해석하지도, 이슬람근본주의를 해결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못박는다. 좌파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중동에서 저지른 모든 잘못을 나의 십자가로 짊어지기로 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죄책감은 이슬람에 대한 밑 모를 관용으로 표출된다. 죄책감에 기초하고 있는 관용은 마치 초자아 앞에 우리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듯이 이슬람 앞에 항상 수세적인 양보를 거듭하게 된다. 결국 "네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관용할수록 이슬람교도는 너를 더 강하게 압박할 것이다".

죄책감에서 생겨난 관용은 현실도 정의도 왜곡시킨다. 가해자였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절멸수용소에 보내는 것을 막지 못하고 방관했다는 죄책감으로 지금껏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에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이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죄책감이 잘못된 속죄의식이라면,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좌파의 어물쩍한 태도 역시 잘못된 속죄의식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의 전반부는 이슬람근본주의 테러집단은 '악마'가 아니라 서구 근대화가 부러운 '열등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칼리프 시대를 회복해야 한다면서 실제로는 근대화를 추종한다는 점에서 나치가 등극하기 직전에 창궐한 '보수 혁명 운동'과 닮았다. 후반부는 이슬람근본주의의 발생 원인을 서구 제국주의나 세계화 또는 서구의 반이슬람주의 같은 외부 요인에서 찾는 이들과 달리, 이슬람의 기원에서 찾고자 한다. 스탈린주의를 공산주의의 오점으로 보지 않고 스탈린주의로부터 평등을 급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지제크는 여기서도 똑같은 마술을 반복한다. 즉 이슬람 최대의 약점이자 이슬람근본주의자들 손에 더욱 악화된 여성 학대가 실은 이슬람의 부정성을 덮으려는 안쓰러운 증상이며, 이슬람 현대화는 애초에 무함마드를 계도하기도 했던 이슬람 여성의 주체화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약간 김빠진 암시가 그렇다. 지제크의 말버릇을 흉내 내자면, '이것만으로는 테러를 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관용은 서로를 자기 책임의식을 지닌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9·11은 이슬람이 서구를 향해 '우리를 성인 취급 해달라!'는 통첩이었으나 서구는 그것을 묵살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어떤 일화는 서구 제국주의 탓이 아니라, 이슬람 내부에 어른이 되기 어려운 장애가 있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강간 같은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확정"하고 있는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강간을 당한 소녀는 체형에 처하고 기혼녀는 간음죄로 사형된다. 까닭은 "남자가 여자를 강간할 때, 그는 이미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혹받았거나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자극을 주면 본능이 반응한다는 이 구조와 풍자에 자극받아 총질을 해대는 무슬림 청년의 테러 행위는 얼마나 흡사한가! 강간은 남자의 죄가 아니라 자극받은 본능의 어쩔 수 없는 자동 반응이라고 배우며 자라난 무슬림 남성의 자기 합리화 속에 자기 책임의식이 배양될 리 만무하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에 따르면, 본능 이전에 자기 점검이 가능한 만큼 책임의 주체도 그만큼 뚜렷한데 말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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