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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6천만원, 분노한 당신에게

한때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처럼 기세등등하던 '월가 점령 운동'은 결국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상층 1%만을 겨냥했던 게 패착이었습니다. '우리는 99%이다'라는 구호가 일을 망쳤습니다. 나와 내가 어울리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고, 평생 한 번 만나보기조차 어려운 억만장자들만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은 애초 문제가 있었습니다.

  • 이원재
  • 입력 2015.03.05 09:23
  • 수정 2015.05.05 14:12
ⓒshutterstock

오랜만에 당신의 분노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연말정산을 해 보니 300만원을 내놓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며 세상을 한탄했습니다.

당신은 불합리한 세제와 무능한 정치와 비겁한 재벌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신은 나라가 중산층을 괴롭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연봉이 6천만원 이상이라면 대한민국 상위 10%입니다.

당신은 대학에 진학한 자녀를 위해 국가장학금을 신청하려다 깜짝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소득 상위 20%까지의 고소득 가정에는 국가장학금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중산층이 아닙니다. 상류층입니다.

당신이 울분을 토하게 한 300만원은 물론 큰 돈입니다.

한국에서 돈 버는 사람 가운데 딱 중간에 있는 사람이 벌어들이는 소득은 겨우 1천만원 남짓입니다.

한해 1천만원 이하밖에 벌지 못하는 나라의 절반에게 300만원은 1년 벌이의 3분의 1 가량이나 되는 큰 돈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소득의 2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월급장이 유리지갑을 털어갔다며 목청을 높였습니다.

투명하게 지갑을 내보인 당신의 정직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소득세율은 아마도 10%를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직한 자영업자가 당신과 같은 액수를 벌어들인다면 그는 당신이 내는 세금의 1.5배를 냅니다.

맞습니다. 당신에게 지난해 세제개편은 불리했습니다.

6천만원 이상 버는 이들은 부담이 늘었습니다. 그 보다 덜 버는 이들에게는 부담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 다섯 해 동안, 6천만원 이상 버는 당신의 세금 부담은 줄었습니다.

그 동안 당신보다 덜 버는 이들의 세금 부담은 늘었습니다.

물론 불의를 향한 당신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연봉 6천만원인 당신이 십만 년을 일하며 모조리 저축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을 편법 투자와 일감 몰아주기 몇 번으로 쌓은 재벌 3세들을 압니다.

이들이 소유한 대기업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법인세를 감면받아 중소기업보다도 낮은 세율을 적용받습니다.

탈세와 조세회피를 일삼는 이들도 눈에 띕니다.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일들입니다.

이들의 기득권이 먼저 깨어지는 게 옳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당신의 부담이 늘어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순서로 변화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때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처럼 기세등등하던 '월가 점령 운동'은 결국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상층 1%만을 겨냥했던 게 패착이었습니다.

'우리는 99%이다'라는 구호가 일을 망쳤습니다.

나와 내가 어울리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고, 평생 한 번 만나보기조차 어려운 억만장자들만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은 애초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10%이다'라는 구호 아래 고소득 직장인들이 먼저 나서서 개혁을 주도했다면 좀 다른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을까요?

나는 아무 문제 없으니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이들만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은 세상을 영영 제자리에 붙들어 두고 맙니다.

우리 '을'들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갑'이 됩니다.

연봉 6천만원 이상인 당신은 이미 훨씬 더 많은 이들보다 세상을 바꿀 여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출산율은 최저 수준입니다.

청년들은 삶의 대안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회적 역할을 잃은 고령자들은 빈곤과 불안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교육과 복지에 대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재정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결국 더 많은 이들이 나누어 더 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부담도 늘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 99%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사회는 억울함과 분노를 통해 변화의 동력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변화하지는 못합니다.

변화를 위해 누군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을 부담하면서 요구합시다.

복지를 위한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올바른 일을 하는 시민단체와 정책대안을 만드는 민간 독립 싱크탱크들에 대한 후원금을 부담하고, 뜻이 맞는 정치인에 대한 후원금도 부담합시다.

그러면서 요구합시다. 엉성한 과세에, 불공정한 세제에, 비효율적인 정부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합시다.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당신, 대신 불공정함 앞에 분노할 줄 아는 당신, 올바른 일을 돕는 당신, 연봉 6천만원의 분노한 당신을 지지합니다.

먼저 부담하고 책임지는 이들이 사회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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