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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가게'를 위한 바른 디자인

공정 거래 무역의 결과물을 재료로 삼고, 생산부터 폐기까지 친환경적인 제조 시스템을 구성하며,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공법으로 지구 온난화를 막거나,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음으로써 윤리성을 확보하는 등 도덕적으로 '바른' 기준과 디자인을 엮는 게 바른 디자인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 바른 식당에 필요한 것은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고, 그들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하는 디자인이다.

  • 전종현
  • 입력 2015.03.17 10:40
  • 수정 2015.05.17 14:12
ⓒ바르다 김선생

작년 12월 대전에 다녀올 때의 일이다. 갈 때와는 달리 돌아올 때는 고속 버스를 이용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2012년 신세계 그룹이 센트럴 시티를 매입한 후 지난 해 11월 말 호남터미널과 연결된 공간에 약 4500평 규모의 고급 식당가, '파미에 스테이션'을 구축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참에 직접 보고 싶었다. 공간 인테리어부터 사이니지, 휴식 공간, 다양한 식당들까지 흠 잡을 데 없이 정돈된 풍경에서 내 눈길을 유독 사로잡은 곳은 김밥집 '바르다 김선생'이었다.

'바르다 김선생'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요즘 '대세'인 프랜차이즈 김밥 브랜드다. 김밥 한 줄 가격이 다른 곳의 배를 호가하는 터라 '황제 김밥'이란 농담도 있지만 '바른 사람, 바른 재료, 바른 마음, 그리고 바른 식당'이란 명확한 브랜드 콘셉트 덕분에 날개 돋힌 듯 팔리는 히트 상품이 됐다. 평소 그 '바른 김밥'에 호기심이 있던 터라 우연찮게 발견한 센트럴 시티 지점을 그냥 지나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식당은 단촐하면서도 허름하지 않은 깔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분식집과는 사뭇 다르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충분히 정돈된 느낌의 테이블과 의자, 벽면, 그리고 차림표까지 일관성 있게 엮은 디자인은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밥 하나를 시켜 자리에 앉고 나니 시계는 오후 9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이윽고 가격, 맛, 분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의 '신선함'이 시작됐다.

그 시작은 물이었다. 손을 들어 종업원에게 물을 부탁하니 '셀프'라는 안내를 받았다. 아 맞다! 여기는 김밥집이지.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깜빡했다는 겸연쩍음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물이 아닌 여러 곡물을 우려낸 곡차를 준비한 세심함에 감탄한 것도 잠시, 갑자기 떠오른 기묘한 부재감이 내 촉을 자극했다. 식당에서 물을 서빙하지 않는 경우 절대 빠뜨리지 않은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 '물은 셀프'라는 표식이다. '목마른 사람이 스스로 떠먹으라'는 조언은 당사자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글자의 연합으로 실재화된다. 그런데 이 김밥집에는 새로운 곡차가 있을지언정 가장 기본적인 '셀프' 안내문이 없었다. 어쩌면 '물은 셀프'라고 하루종일 대답할지도 모를 종업원의 모습을 보니 순간 한숨이 나왔다. 아크릴 판을 걸든, A4용지에 프린트하든, 쪽지에 휘갈기든 매우 간단한 시각 장치 하나로 해결되는 문제 아니던가.

그런데 앞서 느낀 기묘한 부재감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손님이 김밥을 주문하자 종업원은 이렇게 말했다. "품절입니다." 그 김밥이 인기상품인지 나중에 온 사람들이 다시 주문을 넣고 종업원은 또 다시 품절이라고 말하는 광경이 반복됐다. 손님은 품절인 상품을 계속 외치고 종업원은 이미 다 팔렸다고 계속 맞대응하는 상황이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이런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주 간단한 디자인적 장치로도 충분하다. 중앙 차림표나 작은 메뉴판에서 매진 항목을 아예 가려놓든지, 해당 메뉴 옆에 '매진(sold out)'을 알리는 스티커나 자석 등의 도구을 붙이면 더이상 품절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손님들과 주문을 받는 단 한 명의 종업원 모두 말이다.

오후 10시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들소떼처럼 밀려 들었다. 눈치를 보니 주문이 끝난 다른 음식점에서 넘어온 피난객이다. 활짝 문을 열어놓고 분주하게 카운터가 움직이는 김밥 가게의 모습에 홀린 듯 들어온 그들은 빈 테이블 곳곳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일행과 메뉴를 상의하면서 말이다. 드디어 중지를 모은 그룹의 대표가 카운터에서 메뉴를 외치자 종업원은 이렇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포장만 가능합니다." 그 대답을 제대로 들은 사람들 중 일부는 "하하, 우리 여기서 왜 있었던 거지. 바보였나봐" 스스로를 탓하며 가게 문을 나섰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뢰 찾기 하듯 품절과 미품절을 확인하다 결국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무거나 두 줄 주세요." 그 이후에도 '포장만 가능'이란 BGM이 간헐적으로 내 귓가를 멤돌았다. 그런데 이런 사태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영업 시간을 문 바깥에 표기한 후 닫아놓거나, 외부 사인물에 영업 시간을 기입하는 방식은 어떨까. 이도저도 아니면 '포장만 가능'이란 표식을 가게 바깥 어디에나 놓으면 된다. 이 곳을 제외한 다른 음식점들이 하나같이 'Sold Out'이라는 안내판을 문 앞에 세워둔 것처럼 말이다.

단 30분 동안 접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해프닝이 일어난 장소는 다름 아닌 '바른' 식당이다. 응당 그 이름에 걸맞는 '바른' 디자인이 긴급하게 필요해 보이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공정 거래 무역의 결과물을 재료로 삼고, 생산부터 폐기까지 친환경적인 제조 시스템을 구성하며,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공법으로 지구 온난화를 막거나,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음으로써 윤리성을 확보하는 등 도덕적으로 '바른' 기준과 디자인을 엮는 게 바른 디자인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 바른 식당에 필요한 것은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고, 그들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하는 디자인이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층위의 디자인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착하다, 옳다, 바르다 등 윤리적인 단어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위해 하늘에 떠 있는 메니페스토의 성에 올라가 실마리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디자인의 기본과 핵심에서 한 치의 눈길도 떼지 않는 태도로부터 바른 디자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동화 속 파랑새가 결국 어디에서 발견됐는지 우리 모두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P.S: 어제 오랜만에 고속터미널의 '바르다 김선생'을 다시 찾아갔다. 너무 늦게 간 터라 영업 시간이 끝난 직후의 부산한 가게 모습만 살짝 보고 왔다. 문에는 ~ 22:00라는 표식이 새롭게 생겼다. 하지만 투명 유리문의 겉면에 불투명하게 처리한 시간은 보일 듯 말 듯 했고, 문까지 직각으로 열어젖히니 작은 힌트는 이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가게와 비슷하게 '영업 시간 마감' 안내판도 새로 생긴 듯 하나 어떻게 기능하는지 명확히 보지 못한 게 아쉽다.

혹여 영업 시간이 아니라 개선점을 미처 경험하지 못한 거라면 thedesigncracker@gmail.com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 필자와 유사한 디자인 경험을 겪은 분 또한 위 메일 주소로 소중한 예시를 공유해주시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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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CA Korea 2015년 01월호 'Insight'에 기고한 칼럼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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